【겁쟁이의 도약】

아버지가 이렇게 된 것에 내 책임은 없었다. 그가 어느날 갑자기 쓰러진 것은 평소 그의 좋지 못한 생활 습관 때문이요, 더 나아가서는 그가 쌓아온 악업의 응보일 뿐이었을테니.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그저 막연히, 이 사람이 이렇게 죽어버리는건가 하는 정도의 감상만이 들었을 뿐이니.

내가 나의 아버지를 이렇게 평가하는 것은 내가 비정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그의 삶이 나로 하여금 그를 이렇게 평가하도록 만들었을 뿐이었다.

허구한 날 술을 마시고 돌아와 어린 자식과 제 아내를 두들겨 팼다. 한때 저축해두었던 돈은 도박으로 모두 날려먹었고, 감당할 수 없는 빚을 계속 쌓아가면서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도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어머니가 집을 떠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를 향한 사랑만으로 버티기에는, 아버지가 휘두르는 주먹과 술병은 너무나도 아팠으므로. 어머니가 떠난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저 그 사랑을 짓누를 정도로 괴로운 현실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떠날 무렵의 어머니는 무척이나 지쳐있었다. 나를 향한 사랑은 여전히 건재했지만, 그녀를 괴롭히는 현실 또한 여전히 건재했으므로. 그저 그러했기에, 너무나 오랜시간 고통받아온 어머니였기에. 그저 그러했기에, 어머니는 나를 데려갈 수 없었던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떠났다. 아버지를 두고, 나를 두고. 너무 지쳐버린 나머지, 그렇게 홀로 떠나버린 것이다.

어머니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아버지는 분개했다. 은혜도 모르는 것이 도망쳤다며 술을 잔뜩 퍼마시더니, 안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집안 살림들을 때려부쉈다. 부서진 의자의 나무 파편이나 깨어진 술병의 유리 파편같은 것들이 날아들어 내 살갗 이곳 저곳을 할퀴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나의 고통과 상처는 아버지에게 관심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그때 아이는 무얼 했냐고? 아이는 분노한 아버지를 피해 구석에 웅크려 있었다. 아이 또한 어머니가 그러했던 것 만큼 아버지를 무서워 했지만, 그녀는 아이였기에. 버티고 버티다 끝내 도망치자는 결론을 내린 어머니와는 달리,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을 만큼 용감하고 담대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했기 때문에, 아이는 어머니가 떠난 후에도 여전히 웅크린 채 집에 남아있었다.

폭력이 지배하는 집안에서 아이가 배울 것이라곤 웅크리는 방법 밖에 없었으니까.

어머니가 떠난 후에도 아이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사랑을 나누어 줄 단 한 명의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을 빼곤, 정말로 변한 것이 없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아이를 때렸고, 학교에선 여전히 왕따를 당했으며, 집안의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니까.

아이의 삶이 변한 것은 그녀가 마침내 한 사람의 어엿한 성인으로서 인정을 받게 된 후 였다. 아이가 더 이상 아이가 아니게 되는 시기, 더 이상 부모의 보살핌 아래 거하지 않아도 된다고 국가에서 허락해주는 그런 시기. 어머니가 떠나고도 그 정도의 시간이 더 흐르고 나서야, 아이는 드디어 그 끔찍한 집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사실 아이의 독립은 그보다 빨리 이루어질 수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단 한번도 멀쩡한 부모로서 기능한 적이 없었기에, 아이가 제 어머니와 같이 조금의 용기만 내었더라면 아이의 독립은 그보다는 훨씬 이른 시기에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아이는 그러한 선택을 내리지 못했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난다는 담대한 용기를 품기엔, 아이는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 아버지와 함께 있었으므로.

아이는 어느 순간 부턴가 그런 삶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었다. 사랑받지 못하고 의지하지 못하는, 그저 기약없이 언제까지고 아버지에게 학대받을 뿐인 그런 삶. 작고 유약한 아이에게 삶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랬던 아이였던 만큼, 아이의 독립은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기적같은 일이었다. 그녀의 18번째 생일이 찾아오던 날, 국가가 그녀에게 한 사람의 어엿한 어른으로서 기능하라고 자격을 내어준 그 날. 아이가 그 지옥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는 그 보잘것 없는 깨달음이 그녀에게 자그마한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어른인 어머니가 도망쳤던 것 처럼, 어른인 나도 도망치자. 그 누구도 그녀에게 어른이 되기 이전엔 아버지에게 도망칠 수 없다고 단언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있어 아버지란 아이의 몸으로는 대항할 수 없는 강인하고도 두려운 존재였다. 감히 도망치는 것 따위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토록 절대적인 지배자였다.

그녀가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이 그녀가 아버지에게 대항할 수 있는 강한 완력을 선사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저, 한 명의 아이로서, 언제까지고 학대만 받으며 살아오던 아이로서. 어른이 아닌 작디 작은 아이로서는, 지금껏 자기를 이겨오기만 했던 부모를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용기는 그런 것이었다. 육체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변하는 것 없이 모든것이 그대로였던 그곳에서 피어오른 보잘 것 없고도 자그마한 자각. 자신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니고, 아이가 아니라면 부모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터무니없는 사고의 흐름.

그녀의 용기는 고작 그런 것이었다. 논리적 비약으로 점철된, 이성적인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인식의 변화. 고작 그런 것으로, 그런 것 만으로도 그녀는 뒤늦게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도망칠 수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막연히 아버지가 없는 곳을 향해 어디로든지 달렸다.

그녀의 독립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 만큼은 어렵지 않았다. 물론 무일푼으로 집을 벗어난 만큼 처음 몇 달 간은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그녀의 딱한 사정을 들은 여러 선인들의 도움으로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서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여건을 갖추게 되었다.

그녀는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아버지를 인생에서 지워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녀를 다시 과거로 돌려놓을 단 한통의 전화가 걸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


그냥 그런 이야기였다. 아버지를 질색하여 떠난 아이가, 소녀가, 어딘가로 훌쩍 떠나버렸다 다시금 아버지에게로 돌아오게되는 그런 이야기.

그 이야기의 끝이 이곳이다. 한 때 그렇게나 미워하고 두려워했던 아버지가 지금은 내 옆에 누워있다. 그 병신이 되어버린 몸을 조금이나마 더 살아있게 해줄 여러 약물들의 효과로 깊게 잠든 채.

"..."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감은 눈 바깥의 세상엔 관심도 없다는 듯이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어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문득 울컥하는 마음이 치밀었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당신이 나를 괴롭혔던 기억들이 떠올라 단 한순간도 편한 적이 없었는데, 당신은 이렇게나 편한 얼굴로 내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네요.'

여전히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아이가 말했다.

'어째서 죽지않고 살아있는 건가요. 그토록 위급한 순간을 몇 번이고 겪었으면서, 어찌도 그리 끈질기게 살아있는 건가요. 어찌하여 착한 사람들에겐 오지 않는 그러한 기적이, 당신에겐 몇 번이고 찾아오는 건가요.'

여전히 아버지를 미워하는 소녀가 말했다.

'그렇게나 두렵고 미운 당신을,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요.'

여전히 아버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어른이 말했다. 

"..."

멍하니, 아버지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던 내가 아버지 옆에 놓여있던 베개를 집어든 것은 그 때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는 내가 내려준 어떠한 답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로 하여금 그 보슬보슬한 베개를 집어들게 한 그 충동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그때의 내가 그 베개를 집어든 것은 어쩌면, 막연히 그리 해야만 했기에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충동의 근원이 무엇이었든, 설령 그것을 언제까지고 이해 할 수 없다고 한들, 그 충동이 낳을 결과는 도약이었다. 그것은 언제까지고 진실로 자유하지 못했던 나를 위한, 오랜 시간을 겁쟁이로만 살아왔던 나를 위한 또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렇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그것은 도약이었다. 타고난 겁쟁이었던 나를 보다 용감하게 만들어줄, 완전무결한 성장의 기회였다.

결심을 굳히는 데에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남은 것은, 직접 내 손으로 그 도약을 일구어내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 위에 누우면 편안히 잠에 들 수 있을 것만 같은 부드러운 베개를 꼭 움켜쥐어, 곤히 잠든 아버지의 얼굴 위에 그것을 그대로 얹었다.

살짝 올려놓은 것 뿐이었기에 아버지가 잠에서 깨어나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는 그저 제 얼굴에 무언가가 닿은 것이 조금 불편한 듯, 으으응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희미하게 저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그만큼 깊게 잠들어 있던 것이었다. 그토록 강인하고 무서웠던 그 아버지가, 이토록 병신이 되어 내 앞에 곤히 잠들어 있는 것이었다.

곤히 잠든 아버지와, 아버지의 얼굴 위에 살포시 놓인 베개. 그 광경이, 온전히 내 결단만을 남겨두고 있는 그 아찔한 광경이 내 온 신경을 달구기 시작했다.

나는 차오르는 희열에 몸을 맡긴 채, 천천히 아버지의 침대 위로 기어올라갔다. 내 무릎과 손이 침대 이곳 저곳을 깊게 눌러 굴곡을 만드는 와중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깊게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하하."

그곳에서 아버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나를 두렵게하고 괴롭게 했던 그 무서운 얼굴이, 그 보잘것없는 베개에 가려져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얼굴을 대신하여 존재하는 것은 그의 쌕쌕거리는 숨소리 뿐이었다. 그의 얕은 숨소리는, 그의 얼굴과 달리 내게 어떠한 두려움도 주지 못했다.

아버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기에 두려움은 없었다. 결단을 내렸기에 망설임 또한 없었다. 나는 천천히, 아버지의 얼굴을 덮은 베개 위로 올라타기 시작했다.

"에잇."

마침내 베개 위에 내 몸을 완전히 올려놓았을 즈음에는 괜히 흥겨운 마음마저 들어, 답지도 않게 발랄한 소리를 내며 그 위에 주저앉았다. 어린 시절엔 내어 보지 못했던, 내 인생에서 내어 볼 거라고 상상조차 못했던 비음 가득한 애교였다.

체중에 짓눌린 베개가 아버지의 얼굴을 압박하자, 그제서야 아버지가 괴로운 듯이 음음 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무어라 웅얼거리며 버둥대기 시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마치 떼쓰는 어린아이 같아 보이기도 해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피식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만족감이 들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약기운에 취해 버둥거리는 것 조차 어설픈 아버지의 모습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우습게만 보였다.

팔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삐걱거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어릴 적 내가 그토록 갖고싶어 했던 예쁜 관절인형 같기도 했다. 아버지는 금발도 아니었고 머리숱이 풍성하지도, 머리카락이 길지도 않았지만, 이곳 저곳이 삐걱거리면서도 정해진 범위 바깥으론 움직이지 못하는 아버지의 너절한 팔다리는 정말로 어릴적의 인형을 떠올리게만 했다.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어릴때 충족되지 못한 호기심이 뒤늦게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저는 어렸을 때 인형이 갖고 싶었어요, 아버지."

스스로도 그것이 변명이 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괜히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마 언젠가의 나는 인형을 사주지 않은 아버지를 탓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 그것을 핑계삼아 그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에잇."

예의 그 비음을 흘리며 아버지의 팔을 꺾어 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느정도 힘이 실려있어 나로 하여금 긴장을 풀지 못하게 했던 그 팔은, 이제 힘이 다 빠져버린 것인지 내가 꺾는대로 저항없이 딸려 왔다.

점점 잦아들던 아버지의 비음이 다시금 그 소리를 높였다. 높아진 소리라 해봐야 그 얼굴을 깔아뭉갠 베개에 묻혀 그리 크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아마 아프다는 뜻이겠지. 부족한 숨으로 껄떡이며 내뱉는 그 신음소리에 순간 마음이 약해졌지만, 슬프게도 뒤늦게나마 한껏 피어오른 동심은 제 손에 쥔 장난감을 그리 쉽게 놓아주고 싶지 않은 듯 했다.

신음을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숨을 다 내뱉어 버린 것인지, 그 순간을 기점으론 팔을 이리저리 비틀어도 베개 아래서 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어느샌가 그가 어느곳으로든 돌리려 노력하던 고개도 그 움직임을 멈추어, 조금씩이지만 얼굴 위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던 내 몸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마침 다행이었다. 괴로운 신음이 없으면 죄책감이 솟아날 일도 없었으니까. 그의 얼굴도, 그의 신음도 없는 지금, 나를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가 더 이상 신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팔을 더욱 꺾어보려 했으나,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았다. 가동범위를 벗어난 인형이 똑하고 부숴지듯 그의 팔 또한 부숴져주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해보니 팔을 비트는 것도 힘들었거니와 그의 어깻죽지가 딸려 올라와 그 앙상한 팔이 부숴지는것을 있는 힘껏 막고 있었다.

순식간에 실망감이 차올랐다. 뚝 하고 그의 팔이 떨어져 나오는 것 까지 바라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똑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팔이 확실하게 부숴질 줄 알았는데. 

사람의 몸은 생각보다 튼튼했다. 아무렴, 내가 어릴적 바랐던 플라스틱 장난감보다는 튼튼했다. 그런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한창 꺾어올리고 있던 그의 팔을 툭 하고 내려놓았다. 팔 꺾기에 대한 호기심은 충족 되었으니, 이제는 다른 놀이법을 찾을 시간이었다.

병실 바깥에서 우당탕하는 발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때 였다. 내가 아버지의 팔을 내려놓고, 여전히 아버지의 얼굴 위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 다음엔 무엇을 할까 하고 고민하던 바로 그 때.

그러고보니 내가 병실문을 잠그었던가- 하는 한가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감과 동시에, 점차 가까워지던 발소리들이 멈추고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병실 문을 잠그지 않았던 것이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이 병실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순식간에 침대 옆까지 다가온 그는, 그제까지도 아버지의 얼굴을 짓누르고 있던 나를 옆으로 밀어내곤 아버지에게 달라붙어 그의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그를 뒤이어 따라들어온 분홍색 옷을 입은 사람들은 아버지의 머리맡에 널부러진 나를 침대에서 끌어내리며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끌고갔다. 저들은 어찌 이리도 빠르게 아버지의 상태를 알고 여기까지 뛰어온걸까.

"아..."

그것에 대한 답은 양팔을 붙들려 끌려가다시피 병실 밖으로 내보내지면서 찾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옆에 놓여있던 모니터가 삐삐 거리며 높은 비프음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집중한 탓이었을까, 나는 아버지를 죽이는데 열중한 나머지 저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들이 이렇게 빨리 아버지의 상태를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저것이 어딘가에 연동된 채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아버지의 상태를 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핫..."

사소한 실수로 장난감을 조금 일찍 빼앗기게 된 것은 많이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내 입가에선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입가 뿐만이 아니었다. 아쉬움의 탄식을 내뱉기 위해 벌어졌던 입에선 이미 미처 숨기지 못한 환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하하하..."

내가 병실 밖으로 완전히 끌려나오기 직전까지도 들려오던 모니터의 반복적인 
비프음이, 내가 문턱을 넘자 마자 삐- 하는 단조로운 장음만을 내기 시작했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럼 그 환자는 결국 어떻게 된거야? 죽은거야?"
"...죽었어. 결국. 어떤 미친년 하나 때문에."
"미친년?"
"어. 자기가 어릴적부터 아버지한테 학대를 받아왔고, 그것에 대한 복수로서 그 환자를 죽인거라 주장하는 미친년."
"... 복수가 잘한 짓은 아니긴 한데, 그래도 어릴적부터 학대를 받아왔다면 납득이 아예 안가지는 않는걸."
"...아니야."
"응? 아니라니, 뭐가?"
"복수. 그년이 말하는 복수 말이야. 그건 복수가 아니었어, 그저 살인이지."
"...왜? 그렇게나 학대를 받았었는데?"
"그년, 고아였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년, 고아였다고. 아버지 따윈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고 학대를 당한 적도 없는데 그냥 그렇게 믿고있을 뿐인 정신병자야. 나 어느 병원에서 일하는지 잊었냐?"
"...그럼..."
"그래. 그년, 애꿎은 사람만 죽인거라고. 그건 복수도 뭣도 아니야. 그냥 미치광이가 저지른 살인일 뿐이지."
"..."
"됐어. 술이나 마시자. 술마시러 와서 이런얘기 하는것도 힘들다."
"..."
"빨리, 얼른. 잔 들고, 짠."
"...그래, 짠."
【겁쟁이의 도약, 또는 미치광이의 망상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