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


 이재형은 두 시간 동안 침대에 누워 그 속에서 생각했다. 어쩌면 꿈의 세계와 현실의 경계면에서 바라본 환상일지도 몰랐다. 


 환상은 아닌 듯싶다. 환상이라기보단, 기억. 유하나에 대한 기억이다. 이재형은 더욱 눈을 감는다…


「음…」


수면용 롱쿠션을 꼬옥 안는다. 아주 소중한 뭔가를 품에 간직하듯이.


「후음…」


─내가 아는 유하나라는 소녀는 유달리 몸이 약했다. 이런 몰골을 병약소녀라고 하던가.


 육체적인 활동을 자주 하는 아카데미에서조차 육체적인 일엔 일절 참여가 금지되어 있으며 그에 따라 외부 현장으로의 임무도 당연히 허락되지 않았다. 정말 이례적인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병원에 가야 하고 터무니없는 양의 약을 먹어야 한다.


 가느다란 손가락과 당장이라도 생명이 꺼질 듯한 생강빛의 눈동자. 희미하게 사라져버릴 듯하면서도 또렷한 목소리. 집보다는 병원이 익숙하고 침대보다는 병상이 익숙하며 일상복보다는 환자복이 익숙한 아이였다.


 정말이지 그런 몸 때문에 ‘절대 제 명에 못 산다’ 라는둥, ‘일과가 끝나면 병원으로 돌아간다’ 라는둥, ‘언제 죽어도 이상한 병약소녀만 아니었으면…’ 이라는둥, 누군가의 가십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런 주제에 성격이 힘차고 의지가 뛰어나서 사람을 만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렸을 적 뛰어노는 다른 아이들과 같이 뛰며 어울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여타 다른 활동적인 취미생활을 한다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빛에도 약한 모양인지 집에서 혼자 영화를 보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중학교에서도 간신히 특수반 한정 입학 허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결코 마음이 꺽이는 법이 없었다. 유하나라는 아이는 늘 적극적이었으며 때론 악마적이기도 했다.


 뭐랄까, 특수반 아이치고는 의외로 정상적인 면이 있는 편이었다.


 조금이라도 약하거나 자기들이 보기에 어딘가 이상하면 응당 잿빛 발길질로 교복 셔츠가 뒤덮인 꼴이 되고, 던져지는 썩은 우유와 욕설섞인 구겨진 종이뭉치들 투성이에서 학창시절을 보내야 하는게 당연한 이 나라의 평범한 중학교를 다닐 터인데도.


 어지간히 못된 악동들과 동네 양아치들도 하나를 감히 건드릴 수 없었다. 그건 통상적인 ‘감히’와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였다. 


 다른 선량한 학생들은 잘만 괴롭히면서 하나에게 만은 그럴 수 없던 이유는.


 하나에게 혹시라도 손대면 진짜 죽어버릴 것 같아서 감히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여차하면 살인마가 될 것 같으니까, 그들에게는 움직이는 폭탄이나 하등 다를 것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무리 양아치라고 해도 살인이라니, 그들도 그 정도로 대담하지는 못했다.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이 마음을 불편케 하는 것과는 별개로 어쨌건 강력 범죄를 저지르고 이 나라의 수사 체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그들은 그저 편하게 후배의 돈을 뜯고, 지나가는 여학생의 치마 속을 탐하고, 약한 애들만 골라서 발길질을 하는 정도 밖에 못하던 저질일 뿐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내가 아는 유하나라는 소녀는 나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물론 어릴 적 이야기라, 부모님도 항상 같이 있었다.


 아직 구상나무 밑의 선물 꾸러미와 산타라는 존재를 믿었을 때였으니까. 하나의 방은 병실이나 다름없었고, 실제로도 용도는 그것이었다.


 내 유년기의 하나에 대한 기억은 퍽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와서 새삼스럽게도 녀석은 병원비가 아주 많이 나왔다.


 하나의 집안은 평범했다. 구청 전화업무를 보던 어머니와. 실적 부진의, 술로 인생을 그린 영업사원 아버지를 두었던 하나의 집안은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자본에 찌들은 병원들은 특수 체질 유하나의 진단과 수술을 거부했다. 하나는 그해 여섯 살이 될 무렵 병원들의 치료 거부로 죽을 위기에 처했다.


 그에 반해 우리 집은 그나마 여유가 있었다. 어머니는 L&S의 전 연구원이었고 아버지는 투자 업계의 베테랑이었다. 그런 식으로 죽어가는 하나를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어서 우리 부모님은 하나네 집안을 돕기로 했다.


 상황이 급박했고 하나가 갑자기 건강해진다는 보장도 없다 보니 상환기간도 이자도 없는 조건으로 병원비를 지원해 주었다.


어린 마음에, 5살의 나는 그 행동을 두 글자로 기부라고 하면 되지 않느냐고 아버지에게 따졌지만 오히려 야단을 맞았다.


 하나가 너에게는 단지 불쌍하기만 한 존재였냐며. 하나는 네 친구고 소중한 인연이지 않느냐며.


 아버지의 지원금은 그저 불쌍한 중생을 구원한다는 선민의식 같은 단순한 마음가짐으로 지원한 돈이 아니었다. 


 하나의 아버지는 옛날에 우리 아버지를 도와주던 오랜 친구였고, 그를 믿었기에 어려운 시기임에도 흔쾌히 도왔던 것이다. 뭐, 좀 더 복잡한 관계가 엮여 있었지만, 어렸던 나는 그 정도밖에 몰랐다.


 마지막으로 봤던 하나의 어머니는 수첩처럼 보이던 무언가를쥔 채 눈물을 흘리셨다. 다시 그 장면을 보니 아마 가계 장부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가 그렇게 무릎을 꿇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그 소녀의 떨리던 어깨를 기억한다. 그렇게 하나는 살 수 있을 줄로 알았다. 그러나 하나의 전생에 죄가 지독했는지 어쩐지 그 아이의 운명은 기구했다.


 “하나 엄마, 그게 정말이라구요?”


 “제발요. 더 이상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어떻게 남편한테 그 돈을 전부 맡길 수가 있나요?”


 “믿고 있던 사람이었어요. 제발. 우리 하나좀 어떻게 살려주세요. 제발. 재형 어머님.”


 “해외 어디로 튀었는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시죠.”


 “네. 말도 안 하고 갑자기 나갔는데, 전화해 보니 해외 전화라고…”


 “도와드릴 방법이 하나 있긴 해요.”


어째서인지 모습 한 번 비추지 않던 하나의 아버지는 들어왔던 그 돈을 차곡차곡 모아 모조리 들고 해외로 도주했다. 


 하나의 검진에는 전혀 보태지 않았다. 그는 신뢰를 밟아버리고 자신의 딸을 죽이자는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어떤 이유로 도주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결국 그는 배신자이자 살인자였다. 그대로 두면 딸이 죽을 것을 알고도 돈을 들고 도주한 것은 살인이나 마찬가지니까.


 내가 봐도 상황은 새까맣도록 암울했다. 다섯 살. 모든 것이 반짝이고 예쁘게 보이는 그 나이에. 몇 년이 지나고 학교를 다닐 나이가 됐을 무렵에도 소녀는 나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이 없었다.


 어느덧 위험한 건강은 적절한 활력을 찾고, 우리 집 생활에 적응했을 터인데도 유하나는 도저히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야, 유하나.”


 “…”


 “뭐야, 맨날 입 다물고 있긴.”


 “…”


 “아무튼, 나 새 게임기 샀다? 비싼 거니까 만지지 마.”


 “…”


 “잠깐만. 너한테 줄 게 있어. 주방에 갔다 올 테니까 기다려봐.”


 “…”


 “자. 이, 뭐냐. 보석 브로치 말야. 아빠가 너한테 선물 준 거야. 받아. 그리고 착각하지 마. 내가 주는 거 아니니까.”


 “…”


 “어라? 이거 왜 안켜지지… 야, 너가 이거 만졌냐? 응?”


 “…아.”


 “아오, 진짜 디질래?”


 “…”


 “아, 미안… 울 것까진 없잖아.”


 “…건전지.”


 “뭐? 건전지가 뭐.”


 “여기… 헤헤.”


 “건전지 빼놨던 거야? 질리지도 않냐. 장난치지 말고 말을 하라고. 말을.”


목이 긁어지는 소리가 난다.


 “으응. 말. 아직… 힘들어….”


 “아무튼 야, 봐바? 이걸 귀에 걸고 침대에 이렇게! 누우면…”


하나는 그때 아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기에 폴짝폴짝 대단해! 라고 외치는 것처럼 박수만 보냈다.


 “몰입형 가상현실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이말이지! 온라인으로 출시된 건 이 디바이스로만 할 수 있다고?”


 “…”


 “어때, 너도 나랑 같이 한 번 해 볼래?”


 “…”


 하나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쓰다듬어 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왠지 부끄러워 난 그만 고개를 돌렸다.


 “하, 재미 없긴. 질렸다. 질렸어. 난 친구들이랑 파티 맺어서 놀 거야. 너 빼고.”


 “…”


 나는 소녀를 버려두고 편한 선택지를 택했다. 솔직히 학교에서를 제외하면 하나와 대화하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다.


 학교에선 그렇게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되면서, 집에 오면 언제나 그 애는 누워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이따금씩 새벽에 어머니가 그 애의 방에 들어가곤 한 것을 제외하고 유하나란 소녀는 정말이지 있는 듯 없는 듯 했다.


 그래도 내심 아쉽긴 했다. 


 내가 싫었던 걸까.






 그래서였는지. 중학교에 올라갈 무렵 나는 부모님께 임무를 받았다. 일주일에 한 번. 하나가 병원에 가야 하니까 네가 바래다 주라고. 그 일을 의무감에 하러 갈 때마다 알아간 것은 그 애가 정말 악마적인 기질이 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애는 수천가지 종류의 장난을 시도해 왔고, 그걸 감당해 내야 하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야. 목요일이다. 병원 가야될 거 아냐. 걸어가기 힘들어 하던데, 버스는 알아 봤어?”


 “병원가는 버스는 380번이야. 어제 알아봤어.”


 “그래?”


병원 가는 버스가 그게 맞았는지 헷갈린 나는 안일하게도 하나의 대답에 넘어가 버렸다. 


 역시는 역시. 그 버스는 잘못된 버스였다.


 또 그런 식으로 장난을 쳐 왔겠다. 하여. 나는 복수극을 준비했다.


 “헉? 길을 잃었어! 집에 어떻게 가더라아?”


나의 삼류 배우만도 못할 연극 인생은, 그 무렵부터 시작되었던 듯싶다.


 “너… 너! 모, 모르고 탄 거야?”


거기에 보기 좋게 당해 버리는 하나의 앳된 당황을 지켜보며, 연기를 뚝심있게 지속한다.


 “난생 처음 오는 곳인걸? 이제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지이?”


 “거, 거짓말! 이재형 넌 길 잃은 적 없잖아. 세상 어디에 떨어져도 집에 돌아올 수 있으면서.”


 “어? 나는 모르는 일이다?”


 “어떡해… 나 장난으로…”


 “이렇게 된 거, 오늘은 병원 땡땡이 치는 거 어때? 약은 집에 있잖아. 휠체어도 당분간 안 해도 좋다며.”


 “…좋아! 히히히.”


 그날 병원을 빼고 하나와 야시장을 몰래 다녀왔고, 물론 어머니에게 걸려 된통 혼났지만, 기분은 끝내줬다. 


 그렇게 짖궂은 장난의 공방이 시작되었고, 일주일에 한 번은 전쟁을 치뤘다.


 언제부턴가 병원 가는 날이 즐거워 지기 시작했다.


 또한 하나는 여전했다. 다른 날엔 아무 말도 않다가 일주일 중 한 번만 장난을 명목으로 한 전투를 치뤘다.


 외계인이 하늘에 있다고 거짓말 한 뒤 갑자기 사라져 걱정하게 만들거나, 보석처럼 생긴 사탕을 건네줘서 핥아 봤더니 짜디 짠 소금이었다던가, 내가 책상에서 엎드려 피로를 해결하고 있으면 포스트잇으로 등 뒤를 덮어 놓는다거나.


 검진이 끝난 뒤 같이 집으로 향할 때는 어찌나 그렇게 해맑던지 순수악이나 다름없었다.


 마지막 교시가 끝나고 병원으로 가는 길에 있는 길거리 간식의 감귤맛 나는 새콤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좋아했고, 일주일에 한번은 그걸 내 앞에서 맛있게 먹어치웠다. 


 일주일에 한 번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이 더 우월하다며 설득하는 것 또한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같이 집에 돌아와 각자 방으로 들어가기까지 하나의 그런 행동은 멈추는 법이 없었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모든 시간 동안 나에게 어떤 장난을 쳐야 재밌을지 연구하는게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였다. 


 덕분에 내 학창시절의 모든 일주일 중 하루, 전체의 칠분의 일 정도는 하나에 대한 기억이었다.


 우리는 일주일 중 단 하루, 세상 누구보다 가까웠었다. 물론 남녀 간의 사랑 같은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그때까지도 짓궂은 장난을 칠 때가 아니라면 같이 살던 집에선 도통 먼저 입을 열거나 하지 않았다. 어차피 진짜 가족도 아니거니와, 나도 괜히 엮이기 싫어서 서로 굳이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분명히 그건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그 아이에게 정이 많이 들었지만, 본능적으로 이 아이를 좋아해선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녀석을 좋아하게 되면 아무래도 썩 괜찮은 최후를 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단지 그저 이 정도의 생활이 계속됐으면 했다. 의사 선생님이 “유하나 양, 들어오세요.” 라고 할 때마다. 하나의 표정을 눈여겨 보곤 했다.


 웃는걸까? 비명을 지르는 걸까? 지금은 활력이 넘치는 눈동자로 행복을 말하고 있지만.


 여섯 살 때의 그 일이 더는 반복되지 말고, 그냥 지금처럼 평범하고 미적지근히 행복했으면 하고 생각한다. 


 여하튼 여기까지가 그나마 기억에 남는 녀석과의 유년기에 대한 기억이다.


 지금은 그런 과거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성공했고, 작년 봄 아카데미에 입학한 우리는 각자의 방법으로 이곳 학생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다.


 아카데미. 무려 아카데미의 학생이다.


 “드디어 입학이다. 그렇지? 내가 항상 가고싶어 하던 그곳. 아카데미!”


 컴퓨터 모니터에는 ‘아카데미’ 합격란에 “이재형”과 “유하나”의 이름이 동시에 띄워져 있다.


 “난 안 가고 싶었지만. 헤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 입학하는 건 정말 드물거든. 그치만, 앞으로가 더 중요한 법이지!”


 “왜?”


 “몰랐어? 아카데미를 무사히 졸업하는 건 신입생 전체의 오 분의 일도 안된다고.”


 “어… 그러면 나는…”


 “걱정하지 마. 이 몸이 약속하도록 하지! 유하나를 살벌한 아카데미에서 상처 하나 없이 졸업 시키겠다고. 자! 약속!”


“…약속!”


하나가 웃었다. 손가락을 걸고. 머리를 맞댔다. 맞댄 머리 너머로 하나의 미소가 살짝 보였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꿈에 그리던 아카데미 생활. 이제. 시작이다. 국가 최고의 수행요원을 양성하는 첨단 교육기관.


 기관…….




† 5 †


 새 지저귀는 아침.


 조회가 시작되고, 카일 트레이페 교수는 팀별로 역할을 지정해 주었다.


[알립니다]

□ 현재 아카데미에 대규모 실종 사건이 발생했으며, 괴현상을 효율적으로 파악하고 대처하기 위해 평소와 달리 팀을 편성했습니다. 

□ 각자 단말기에 받은 리스트에 적힌 동료가 서로 팀입니다. 학생 여러분은 꼭 팀원과 함께 다니길 바라며, 팀별로 주어진 작은 일 정도만 맡아 주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면 전략 1팀부터 6팀은 조사팀에게 받은 보고를 바탕으로 앞으로 어떤 행동 규칙을 세울지 잘 조율해 주는 겁니다.


 형식적인 절차는 없었고, 앞으로 휴대폰의 [알립니다] 기능을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겠다는 정도의 언급을 끝으로 5분 정도 만에 해산했다.


 1학년 학생들은 새벽에 진행했던 긴급 방송 덕에 조금 진정된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격이 강했던 건지, 여학생 너댓 명은 조용히 울고 있었으며 고개를 푹 숙인 세 명의 1학년 남학생들이 지나가며 눈에 밟혔다.


 이재형은 조사팀에 배정받았다. 조사 4팀에는 그를 포함하여 살비에르와 아리가 있었으며 팀장으로 김지현이 배정받았다. 


 카일 교수는 두 번의 수업을 뺄 수 있게 해주었고, 그 시간은 조사팀으로서의 업무를 수행하도록 지시했다. 


 얼떨결에 생긴 4시간은 사실상 자유시간이나 다름없는 일로, 어지간해서는 벌어지지 않는. 사실 이재형은 이번이 처음인. 그런 드문 일이었다.


 조사 1팀은 영혼기록원과 도서관 그리고 교수동을. 조사 2팀은 기숙사와 종합치료원, 유틸리티 시설 등을. 


 조사 3팀은 각종 게이트와 보안용 시설 점검을. 그리고 여기, 조사 4팀은 가장 넓은 범위, 즉 아카데미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보안결계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적색 괴현상이니 만큼, 할 수 있는 한 학생 실종 현상과 관련된 자료를 모으는 것이 급선무라는 점에서. 조사팀은 전략팀 만큼이나 중요한 일을 맡은 셈이다.


 “그렇게 되었으니, 둘로 나눠 반 바퀴씩. 아카데미 가장자리를 돌면서 달라진 점이 있나 살펴보도록 하자꾸나.”


 총 네 명인 인원을 두 팀으로 한번 더 나누어 2인 1조로, 각각 반대 방향으로 출발해 결계 주변을 돈다. 그렇게 반 바퀴를 돌아 만나게 되면, 인원을 바꿔 다시 진행하는 것으로. 


 이재형은 살비에르와, 아리는 김지현과 첫 반 바퀴를 돈다. 


 이후 반 바퀴를 돌아 서로 만나면 아리와 살비에르는 조를 바꾸기로 했다. 


 두 번 일할 필요 없이 교차검증이 가능한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이재형은 살비에르와 함께 천천히 아카데미 외곽을 따라 걸었다.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부유섬 끝자락을 감싸고 있는 보안 결계를 손으로 짚어가며 돌기로 했다. 푸른 하늘이 보안 결계에 막혀 투명하게 비쳐 보였다. 뭉게구름, 양떼구름, 털구름, 날쌘구름.


 그 바탕은 바보같이 파란 하늘과 잔잔한 초봄의 햇살. 가끔가다 희미하게 비쳐 보이는 일곱 색 무지개. 


 그 아래는 끝없이 펼쳐진 도심 정글. 가끔씩 보이는 녹색 얼룩과 대부분의 회색 모자이크들. 보통 크기의 산보다도 높은 바벨과 셀레스티아조차 하나의 평면처럼 보이는 높이.


 그 풍경이 거의 반 바퀴를 돌 동안 계속됐다.


 카일 교수는 수업을 뺄 수 있게 해주고 학생들에게 이 일을 맡겼다. 


 나름 진지해 보이던 그의 태도와 달리 마치 산책처럼 평온한 시간이었다. 


 

이건 작은 휴가나 마찬가지다. 그럴 리가 없는데 왜 이리 한가로운 걸까?

 ─라고 생각한다. 


 어딘가 잘못된 건 아닐까? 몇 번이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맡은 일 안에서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실종 사건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그 원인을 밝히는 것은 학생이 할 일이 아니다.


 계속되는 평화에 살짝 지루해지려 한다. 


 그러던 차에, 어떤 소리가 들려온다. 비명일까. 기숙사로 들어가기 전의 오솔길에서 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살비에르. 방금 들었어? 저기서 무슨 소리가 났던 것 같은데.”


 그러나 그는 재형을 지긋이 치켜올려 볼 뿐이었다. 그리곤,


 “아니. 저. 쪽은. 보면. 안된다. 임무에. 방해만. 된다.”


 뭔가 필사적으로 막는 느낌이 들었다. 이재형은 그런 살비에르를 보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뭐, 굳이 이 평화로운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겠지. 싶었다.


 “그래. 일단은 결계에 이상이 생겼는지 확인하는게 우리 일이었지.”


 그런데, 반 바퀴를 다 돌았음에도 아리와 김지현은 나타나지 않았고.


 “거의 다 돌지 않았어? 아리랑 지현 선배 쪽은 좀 늦는 것 같네.”


 “…”


 이재형은 저쪽의 상황을 모르는 듯했다.

.

.

.

.

《기숙사 앞의 오솔길 깊은 곳》


 “그래서, 언니? 저… 이제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김지현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다는 듯, 아리보다 머리 세 개는 더 위에 있는 고개를 비틀어 비스듬히 아리를 쳐다본다.


 “무얼 말이니?”


 “그, 결계에서 이렇게나 벗어나서 여기까지 온 이유 말이에요.”


 “하하, 지금은 모두 수업을 듣는 중일 거란다. 그 말은, 기숙사 앞 오솔길의 깊숙한 곳은. 누구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다는 뜻이란다.”


 “네? 그건 무슨-”


 갑작스러우나, 침착하게. 김지현의 거대한 체구는 큰 동작을 준비한 뒤, 망설임 없이 개시했다.


 오른손을 살짝 내려 아리의 머리채를 거머쥔 뒤, 다른 한 손으로는 멱살을 붙들고 지면 아래로 무자비하게 가속했다.


 아리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다가오는 검은 무언가. 그것은 보호대가 걸쳐진 김지현의 무릎이었다. 거대한 다리는 7자를 만들어 정확히 아리의 명치에 꽂힌다.


-퍼억!


 아리의 몸은 통렬한 충격에 한 뼘 정도 비행한다. 경황이 없어, 그대로 중력에 끌려가 쓰러진다. 무력체계는 동기화되지 않은 상태였고, 실드조차 없던 그 맨 육체는 비명을 울렸다. 


 주체할 수 없이 복강 내부에서 피가 차오르기 시작한다. 갈비뼈는 비틀려가면서 부러져 췌장과 창자를 찢을 것이다.


 “아극… 윽…”


 바닥에서 바르작댈 뿐인 아리의 머릿결은 점차 채도가 옅어져 간다. 김지현은 아리의 멱살을 잡고 다시 올린다. 하늘 위로 그녀의 몸을 던진 뒤 떨어지기 직전에 걷어차 내동댕이친다.


 아리는 고통에 몸을 만 채로 발길질에 세차게 굴러갔다. 잔뜩 찡그리며,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다. 가문비나무 밑동이 그녀의 몸뚱이를 멈춰 세우기 전까지 호되게 회전했다.


 아리는 하늘에 등을 보이며 축 쳐진다. 등에 비스듬히 매어져 있던 샷건은 이미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가쁜 숨을 골라 보지만, 훌쩍대는 숨결과 진한 고통만이 올라올 뿐. 호흡을 다잡으려 안간힘을 다하지만, 그 의지가 허망하도록. 숨이 제대로 쉬어지기도 전에-


-콰득! 

-퍼억!


김지현은 등을 보인 아리의 몸을 무참하도록 짖밟는다. 죽여버릴 기세로 그 하이힐은 인정사정 없이 내리 꽂힌다.


-퍼억!

-푸걱!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발길질이 가시고, 김지현은 쓰러져 있는 아리를 차갑게 내려다본다. 서리가 얼어붙듯 주변의 공기는 한기를 머금었다.


 “아리.”


 “선배… 왜… 쿨럭!”


아리는 마치 창자를 토해낼 것처럼 거세게 복강에 찬 혈액을 입 밖으로 게워냈다. 입술에서 붉게 물든 타액이 뚝 뚝 떨어진다. 


 “흐극… 윽…”


아리의 폐는 멋대로 작동해 말이 나오기도 전에 흐느껴 버렸다. 


 쓰러진 채 김지현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눈물로 얼룩진 눈가엔 작게 화장이 번졌고, 볼은 눈물과 코피가 흘러간 자국과 낙엽 가루가 붙어 있었으며, 턱은 피로 찰박였다. 아리는 견디지 못하고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우는 것이니?”


 김지현은 잔악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 미소는 파멸과 책임을 묻는 듯했지만 아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김지현의 얼굴을 직시한다. 김지현 역시 눈을 내리 깐 채로 아리를 내려다 봤다.


 “왜 회의가 시작하고 도망쳤니? 아리.”


 돌연, 마치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이던 김지현의 눈이 또렷이 빛난다.


 “대답해.”


 아리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공포에 젖은 두 눈은 그럼에도 똑바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썩어 떨어지기 직전의 마지막 잎새를 보는 듯 간절한 시선.


 그 시선은 김지현이 다가오며 보기좋게 어긋난다. 


 그녀는 아리의 턱을 잡고 벌렸다. 체구가 큰 남성보다도 거대한 그녀의 힘을 아리는 견뎌낼 수 있을 리 없었고, 곧이어 피에 젖어 찰박이는 아리의 덧없는 혀가 끄집어내 졌다.


 “대답 할 생각이 들지 않는 거니?”


 아리는 게워지는 피를 억지로 뱉으며, 힘겹게 대답하려 한다. 김지현은 슬며시 움켜쥐었던 아리의 혀를 풀어줬다.


 “바… 바토리에게, 흑…”


 “…”


-파악!


김지현은 더 이상의 대답은 필요치 않았는지, 아리의 목을 바닥에 꽂듯이 던졌다.


 “다시 말하겠지만, 이곳은 아카데미란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내쉰다.


 “너는 강하지만, 여전히 약해. 등에 맨 샷건을 왜 꺼내 들지 않았니?”


 “으흑… 흐욱…”


 “난 알고 있단다. 그건, 네가 여전히 약하기 때문이란다.”


 돌에 꽂혀진 귀검처럼. 김지현은 고독하지만 위압적으로 꼿꼿이 서 있었다.


 어디서 꺼낸 것인지 모를 원통형의 유리병을 열어 손에 톡톡 덜어낸다. 충분히 덜어낸 후, 손바닥을 비벼 그 약을 손바닥에 펴바른다. 이윽고, 김지현의 거대한 손은 아리의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피투성이 육신을 향했다.


 “이 포션은 제조자가 대상자를 잘 아는 만큼, 그리고 대상자가 제조자를 신뢰하고 있는 만큼. 회복력을 강화시켜 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단다. 다시말해. 신뢰를 검정해주는 포션이지.”


 김지현은 흥분한 듯, 숨을 폐에 가득 몰아넣듯이 들이쉰다. 그리고 떨리는 숨을 다시 내뱉으며,


 “너는 과연 어떤 결과를 내 줄까?”


눈동자가 다시금 빛난다. 야릇한 손은 아리를 더듬는다. 


 옷이 약을 바르는 데에 방해가 되자, 힘으로 찢어발긴다. 나체가 된 아리는 정신을 반 쯤 잃은 채로 그 유약한 육체를 맡길 수 밖에 없었다.


 “흐핫, …핫! 완벽하구나. 나의 착하고 예쁜 아리.”


 김지현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여 잇몸을 보일 정도로 길게 입꼬리를 늘려 폭소한다. 


 그러면서도 온몸 구석구석 아리의 나체를 탐하듯이 포션이 발라진 손바닥을 대고 온몸에 문지르는 중이었다. 


 이윽고 약병을 완전히 기울여 아리의 몸 바깥쪽으로 원을 두르듯 나머지를 쏟아버린 뒤─


 어떤 주문을 외우곤 아리의 나체를 끌어안는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네게 권한을 승계해 줄 거란다.”


 그리고, 뒷목에 입맛춤하며


 “네가 부탁했듯이.”


 찢어진 옷은 아무렇지 않던 몇 시간 전의 상태로 돌아가 있었고, 인형처럼 쓰러진 아리의 고개 반대편에는 이마를 맞대고 미소지은 김지현의 광소가 드리워 있었다.


─에밀 바토리. 그 아이였나.


 어떤 학생의 이름을 떠올린 그녀는, 눈을 감고 잠시 동안 아리의 온기를 음미한다.


경계 공간 : liminal 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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