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 아이아트(AIA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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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보안결계-기묘한 멜트다운-움직임 ::


14화 :: 아이아트(AIART) ::



† 2 †


오후 6시. 


하늘이 맑았다. 높새바람이 불어와 공중의 계단을 어루만졌다. 달로 향해있는 그 계단에는, 어두워 보이는 한 남자가 빛을 밟으며 등반하고 있는 모습이 멀찍이 보였다.


안개가 옅게 끼어있고 노을은 거의 저물어가고 있었다. 숨을 내쉬면 유령 모양의 입김이 시야를 어지럽혀 올 것만 같았다.


이재형은 아시아로 향하는 중이었다. 길동무 포지션을 지키던 태창현은 파견 확인서를 제출해야 했으므로, 이만 가본다며 계단으로 올라가기 직전에 엇갈리게 되었다.


통- 통- 통- 경쾌한 울림소리가 발 밑에서 들려오던 그때, 이재형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살비에르의 연락이었다. 


그는 아리와 함께 이야기할 것이 있다고 했다. 그 자리에 이재형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반드시 함께 이야기해야 하니, 지금 해야만 한다는. 그런 내용.


그러나, 광휘의 계단을 오르는 도중에 변심하여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금기가 있다는 것은 둘째치고, 재형으로서는 저녁에 낼 시간조차 없는 것이었다. 적당히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난 다음에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중요한 이야기라고 했지만, 오늘은 정말로 더 시간을 내지 못한다. 할 일이 많다. 산더미처럼 많다.


그렇다고 해도 이재형은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복귀 이후로부터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다. 그 중 단 하나의 이야기라도 이쯤이면 나와야 했다. 살비에르가 그 첫 대화를 시도하러 온 것이다.


오늘 오후에 결계를 수색했을 때 벌어진 이상한 일. 인원을 교체할 때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구겨져 있던 아리의 표정. 그리고 전례가 없을 정도로 힘없던 그녀의 목소리. 당시에는 태연한 척. 아무것도 아닌 척 속아주며 넘겼지만. 사실 그 일이 넘겨버릴 정도로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재형은 인지하고 있었다.


이재형도 아리와 같은 종류의 '가면을 쓴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알아챈다'의 기준을 느슨히 하자면, 조금만 관찰력이 좋아도 일반인 수준에서 알 수 있을 정도로 아리의 인상은 평소와 판이하게 달랐다.


기숙사 근처에서 들렸던 어떤 소리를 듣고 다가가려고 했을 때. 살비에르는 필사적으로 막으려 들었었다.


다른 곳에 시선을 두지 말고 우선 갈 길을 가자고 했던 살비에르의 부탁에 유순히 응했으나, 아무것도 모른 척 했던 것은 연기. 이재형은 꺼림찍하고 미묘하게 되어버린 분위기에 압도되어 그때의 장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확실히. 


모든 장면을.


그리고 기묘한 기류의 증거는 하나 더 있었다. 


20분 정도를 기다려서야 만날 수 있었던 김지현과 아리.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알 수는 없었지만, 좋은 예감이 들지는 않았다.


살비에르는 이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다.


「녀석이 나에게 해야 한다는 중요한 말. 그것도 아리와 함께 있을 때 내게 전할 말이라면... 」


그때의 일 뿐이다. 단순히 메시지로 전할 만큼 가벼운 사항이 아니라면. 더더욱.


재형은 그렇게 넘겨짚었다.


「하... 그나저나 오를 때 마다 정말 긴 계단이네.」


어떻게 설명하건 높이 약 150미터의 그 투명질 계단은 확실히 길게 느끼기에 충분했다.


예치라에서 아시아로 이어진 거대한 투명 빛 계단. 계단의 끝 부분을 올려다 보면 마치 최면 유도 영상처럼 아득한 느낌에 전율하게 되는 그런 감상이다. 


구오오오- 하는 공기의 진동음이 들려오는데, 세상의 끝자락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음산하고 소름끼친다. 


그럼에도 햇빛이 가득하고 반짝반짝한 그 이질감은 이곳이 마치 경계공간인 것처럼 느껴진다. 왜, 리미널 스페이스라고도 불리는 그런 공간. 아무도 없고 데자 뷰 처럼 느껴지는. 친숙하면서도 두려운 공간 말이다.


외롭게 공중에 솟아오른 언덕을 오르던 도중, 재형은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일까.


혼자만이 오르고 있다고 생각한 그 계단에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약 40m 전방.


아니. 오르고 있던 것은 혼자였다.


누군가가 이 계단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꽤나 빠른 속도. 두 칸씩 내려 오는 것 같은데. 그렇게 서두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넘어지면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고 무심코 걱정이 들어 버렸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누군가였다. 벨리아와 함께 있던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벨리아와는 다르게 차분하고 조용한 느낌의 분홍 머리 소녀. 


계단의 끝이 저 멀리 보이고, 그 소녀가 점점 다가온다. 


약간 묶은 분홍머리의 얌전해 보이는 소녀. 어깨까지 오는 길이다. 소화하기 힘들 만도 한데 고딕 풍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마치 인형같네-하고 생각하던 찰나, 그녀는 계단을 오르던 이재형을 빠르게 스쳐 내려갔다.


-뭐야,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벨리아와 같은 시작의 파티 동료였나. 헷갈린다. 벨리아와는 같이 학생회 입회 준비를 하며 교류가 있었으나, 그녀의 주변 인물과는 그렇게 교류가 많지 않았기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재형은 복잡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지금 걷는 길에 집중하기로 했다. 소녀가 지나간 뒤의 텅 빈 계단 앞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째서 그렇게 경쾌한 동작으로 급히 내려갈까 하는 작은 의문을 남기고 재형은 냉철히 전진했다.




† 3 †


[아카데미-영혼기록원]


영혼기록원에 도착했다.


깔끔하고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의 아카데미의 다른 건물과는 다르게, 영혼기록원만은 고풍스런 옛 궁궐이 떠오르는 건축양식으로 되어 있다.


중세시대의 것처럼 보이는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을 관리하고 있던 4학년 한 명이 재형을 불러세웠다.


"저기, 무슨 일로 왔어?"


-뭐, 뭐야? 저 모습...




마치 황금 옷을 입은 백조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화려하다.


무슨 무력체계를 동기화 한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평범한 무력체계라면 저 정도의 날개를 펼치는 것도 불가능할 텐데.


솔직히 하자면, 4학년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이재형은 그 격차가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했을 뿐이었다.


더 맥 빠진 채로 있기는 어려워, 재형은 적당히 대답했다.


"내일 긴급 업무가 있다고 들어서요. 그 전에 무력체계에 동기화 좀 해 두려고 영혼기록원에 왔습니다."


"그럼 네가 2학년의 이재형이겠네."


"네? 저를 알고 계신가요?"


"4학년 사이에서는 유명하지. 아마 네가 3학년이 되면, 틀림없이 아카데미 최강이 될 거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어."


"네? 어째서요? 저는 아직 학생회 입회조차 못했는데."


"곧 알게 될거야. 고학년들은 너희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알고 있거든."


그녀는 평범하고 적막하게 웃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잠깐, 제가 '3학년이 된다면' 이라 하셨으니..."


"그래. 우리 학년이 졸업하면 아마 네가 무력 면에서는 최강이 될 거야."


"그거, 자한드 선배 때문이죠?"


"그래. 베른하르트 자한드. 그는 규격 외의 인물이라서, 역대 아카데미 역사를 통틀어 봐도 그 정도의 강함은 찾아볼 수 없어. 졸업하기도 전에 이미 공화국을 넘어 인류 연합 최강급 전력으로 평가받고 있지."


"하하, 아무리 그래도. 저는 아직 모의전에서 3학년 선배들도 이긴 적이 없는데."


그녀는 당황한 이재형을 차가운 미소로 바라보며 가볍게 악수를 내밀 뿐이었다.


"쿠로소라 마리야. 내일 잘 부탁해."


맞잡은 손을 깃털처럼 흔든 뒤에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쿨하게 떠났다. 퍼스널 컬러를 생각해보면, 시로소라 마리야가 맞는 거 아닐까 생각하다가 문득, 


-잠시만, 내일? 그렇다는 건...


아무래도 이번 긴급 임무에 무려 4학년이 하나 투입될 모양이다. 생각보다 더 철저히 준비해야겠다고, 입학 후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스승님이 주신 검을 빼들어야 할까 고민했다.


적절한 긴장감을 가지고 이재형은 동기화실에 들어갔다.

학생 인증을 하자, 머리에 전자장비가 덕지덕지 달라붙은 헬멧이 씌워지는 것을 시작으로 동기화 준비 작업이 시작되었다. 무력체계라는 시스템은 육체적인 전투를 인공지능에 맡길 수 있는 혁신적인 체계로, 온 몸의 모든 신경을 데이터베이스에 동기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학생에게 심어진 특이 유전자와 그 보호 염기서열을 선택적으로 파괴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동기화를 위한 일종의 리프레시로, 공명방사선을 통해 선택적 유전자 파괴와 동시에 신경계를 공명시켜 커넥토믹스* 체계를 시각화하는 작업이다. 일단 신경계의 상태를 확인해야 AI와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응광을 조사한 후, 리트랜스포존이 시작됩니다.

-잠시 호흡을 멈추고 시선을 정면의 붉은 고정점에 두십시오.

-공명방사선 방출중!

-선택적 유전자 파괴 프로토콜 종료, 역행 엔트로피실로 들어가십시오.


아카데미, 나아가 인류 연합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이 행위를 '동기화 준비'라고 한다.


이후 역행 엔트로피실에 들어가, 공명된 신경세포 커넥토믹스 체계를 '영혼'이라는 비정형의 패턴 체계와 융합한다. 그것으로 사용자의 신경 연결은 영혼이라는 것에 연결되고, 그 영혼은 인공지능과 연결된다. 이것이 바로 '동기화'. 


이때, 기록된 영혼을 현재 시간대로 정렬하기 위해 엔트로피를 역행시켜 '마치 시간이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흉내낼 수 있다. 마치 중력과 가속도를 구별할 수 없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은 즉 혼돈상태의 수 즉, 엔트로피의 증가와 구분할 수 없다는 개념을 응용하여 적용시킨 기술이다.


-엔트로피를 역행합니다.

-초 고밀도 시간 압축에 주의!

-신경 커넥토믹스가 '영혼'과 동기화되었습니다.

-동기화 완료.

-영혼기록계승을 원하시면, 혼록서고로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혼록서고. 바로 이곳에서 '적합성'에 맞는 다른 '기록된 영혼'을 사용자에게 덮어씌워 '영혼기록계승'이라고 불리는 작업을 한다.


-적정 수준의 영혼을 선택해 주십시오.

-적정 영혼 : 페르쇼스 아이테르.

-진행합니까?

-선택 완료.

-영혼기록계승이 진행 중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력체계'가 가진 초월적인 기술, 자동전투모델 아이아트(AIART*)와 융합하게 된다.


-AIART 동기화 체크중...

-AIART 동기화 완료!

-개시 프로토콜 실행 대기중...


"이걸로 끝인가..."


이재형은 영혼없이 중얼거린다. 영혼기록원에 올때마다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한다. 


「그런데, 이 영혼. 리스트에도 없는 이상한 영혼이 내 기록에 남아있는 이유는 도대체 뭐지?」


계승의 기록을 살펴보려 벽의 스크린을 터치하자, 맨 아래. 최초의 계승 기록에 모르는 이름이 나와 있었다.


No.0 :: 사탄의 성녀 에스케리카


「뭘까. 늘 의문이지만, 역시 무사히 졸업하기 위해선 저런 이상한 영혼을 재동기화 시키는 건 말도 안될 노릇이지.」


절대 저 영혼을 동기화시키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는 이재형이었다.


*AIART : Automatic Interface of Armament and Razer Tools


**신경 커넥토믹스 : 모든 신경의 연결 상태를 지표화한 정보의 집합 또는 그 시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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