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W, 19) 엄청 야한 연애 소설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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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기억하다


이제야 모든 것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내가 잊은, 잊으려 한 기억들… 그 모든 이야기를 하려 한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아무래도 내 아버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로데론 왕국 남부 언덕마루 구릉지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2차 대전쟁에서 오크에게 부모님을 잃고 로데론의 소꿉친구, 내 어머니의 집에서 자라 어머니와 결혼했다. 부모의 원수나 마찬가지인 오크를 쓸어버리기 위해 군인을 지원한 아버지는 3차 대전쟁 당시 로데론의 왕자 아서스 메네실의 휘하 병사로 오크와 싸웠다. 하지만 정의로웠던 아버지는 아서스의 스트라솔름 학살 직전 탈영을 감행했고, 천신만고 끝에 로데론으로 돌아와 만삭이던 어머니를 데리고 로데론을 떠나 스톰윈드로 이주했다. 아서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로데론을 멸망시키기 일주일 전이었다.


그 후 아버지는 스톰윈드 소속 군인으로 복무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기껏해야 놀이나 정리하는 수준이던 와중에… 그 날이 오고야 말았다. 11년 전, 내가 6살이었을 때… 깨어난 리치 왕 아서스 메네실과의 원정에 앞장서서 지원한 아버지는 원정대의 하급지휘관으로서 차디찬 노스렌드로 향했고… 돌아오지 못했다. 나중에 아버지의 전우들이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깃발을 전하면서 했던 말이 어린 나에게도 확실하게 들렸다.


“카스놀바 중위님은 리치 왕에 의해 부활하는 바람에… 유해 수습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는, 항상 밝게 미소를 짓고 다니던 어머니는 그날 이후 미소를 잃었다. 더 이상 이웃들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하지도, 잠들기 전 나에게 키스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매일 밤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을 만지며 슬퍼할 뿐이었다. 그런 어머니는 끝내 미쳐버렸고, 리치 왕이 죽은 후 갑자기 나타난 ‘황혼의 망치단’의 신도가 되고 말았다. 집안의 남은 재산까지 모조리 바친 어머니는 대격변 이후 나까지 끌고 다니며 그들을 따르게 강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내 눈 앞에서… 황혼의 망치단을 막기 위해 그림 바톨에 침입한 용사 일행의 칼에 쓰러졌다. 그들은 어린 나를 분명 봤지만 그냥 떠나갔고, 난 죽어가는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죽음이 다가와서야 정신을 차린 어머니는 1여년 만에 나를 다정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랑한다 믹… 정말 사랑한단다… 널 사랑한다고… 더 말해줬어야 했는데… 믹, 우리 아들… 꼭 살아남으렴.”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어린 나는 그날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배웠고, 사흘 뒤 뒤처리를 위해 진입한 드워프 부대에 발견되기 전까지 차갑게 식은 어머니의 시체 곁에 누워만 있었다.


그 후 긴 시간 고아원에서 생활했다. 마음의 문을 닫고, 그 어떠한 것과도 소통하지 않으려던 나는 고아원을 나와… 우연히 연구소를 차렸고, 우연히 그녀를 만났다. 케시… 낯선 것에 날이 서 있던 나를 다정하게 대해준 건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래, 케시를 보고 느낀 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사랑이었구나. 이제야 모든 것이 짜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키리고사가 입을 열었다.


“이제 좀 과거가 보이시나요?”


“네, 확실이요.”


내 기억을 케시도 보고 있었는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믹…”


“괜찮아. 아무런 문제없어. 그보다 키리, 마지막 부탁이 있습니다.”


키리고사는 눈치를 챈 것 같았지만, 모르는 듯 물었다.


“뭐죠?”


“아버지가 잠든… ‘얼음왕관’으로 가고 싶습니다.”


키리고사는 고개를 저었다.


“얼음왕관은 여전히 스컬지로 가득한 곳… 너무 위험해요. 하지만, 얼음왕관이 보이는 곳으로는 보내드릴 수 있어요.”


키리고사가 손을 휘두르자, 차원문이 나타나더니 그 너머에서 찬 바람이 몰아닥쳤다. 키리고사는 허공에서 꽃다발을 만들어 케시에게 건넸다.


“무덤가에 놓는 꽃이에요. 케시, 죄송한데 먼저 들어가실 수 있나요?”


케시가 별 말없이 차원문 너머로 걸어가자 키리고사는 장미꽃다발과 예쁜 반지를 건넸다.


“그리고 이건 여자친구 분께 드리는 용도예요.”


나는 당황하고야 말았다.


“어… 어떻게 알고?!”


“오래 살면 생기는 일종의 통찰력이죠. 결혼 미리 축하드려요.”


나는 키리고사에게 감사를 표하며 차원문을 넘었다. 도착한 곳은 설산, 내리는 눈 사이로 희미하게 거대한 건축물이 보였고, 남서쪽에는 하늘을 뚫을 듯 높게 솟아오른 불길한 성체가 보였다. 살을 애는 추위조차 잊을 것 같은 광경에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여긴…”


“폭풍우 봉우리네. 얼음왕관 옆에 위치한 고산지대야.”


케시는 내 앞에 서서 얼음왕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용이 얼음왕관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보내준 모양이야. 저기가… 얼음왕관 성체. 한때 리치 왕이 있던 곳이지.”


하늘을 뚫을 것처럼 솟아오른 첨탑을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케시는 지팡이를 가볍게 휘둘러 망토를 소환시키더니 내 몸에 덮어주었다.


“케시, 여기에… 무덤을 만들어야 겠어.”


“무덤…?”


“아버지의 가묘가 스톰윈드에 있긴 해. 거의 방치 수준이겠지만. 그래도… 여기에 꼭 묘를 두고 싶어.”


“아버님의 성함이… 어떻게 돼?”


“마르크 카스놀바.”


케시는 곧바로 차원문을 열더니 그 너머로 사라졌다. 오래지 않아 케시가 돌아왔을 땐, 반쯤 썩은 나무 상자와 비석과 함께였다. 케시는 단숨에 땅을 조금 파버리더니 그 안에 상자를 넣고 다시 흙으로 덮은 다음 비석을 꽂았다.


“글자도 다시 새겨야겠어. 뭐 좋은 문장 없어?”


잠시 생각에 잠긴 끝에, 입이 열렸다.


“여기 한 남자의 정신이 담겨 있노라. 그의 육신은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의 정신과 피는 영원히 남아 흐를 것이라.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 당신은 최고의 아버지였노라고 말할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을 기약합니다. – 당신을 자랑스러워하는 아들, 마이클 카스놀바.”


그렇게 말한 그대로 비석에 새로이 새겨졌다. 곧바로 케시가 꽃다발을 건네자, 나는 그것을 비석 앞에 내려놓았다.


“믹…”


내가 계속해서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있으니 걱정이 된 모양이다. 외투 위로 그녀의 손길이 느껴지자, 나는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케시… 난 말이야. 항상 사랑을 갈구해왔어.”


“사랑…?”


“어린 시절부터 사랑을… 부모의 사랑을 갈망해왔지. 어느 순간 그것은 단순한 사랑으로 변했지만… 그 사랑이 뭔지 몰라서 방황하기만 했지. 육체적인 관계만을 추구하는 사랑 말이야.”


자리에서 일어나 케시를 마주보자, 그녀는 무슨 소리냐는 듯 어깨를 으쓱 했다.


“그런데 널 보면서… 새롭게 생각했어. 무엇이 사랑일까…하고. 그리고 이제야 알았어. 사랑이란 것을 말이야.”


등 뒤로 손을 뻗자 장미꽃다발과 반지가 만져졌다. 자연스럽게 무릎은 굽혀졌고, 팔은 앞으로 펴졌다.


“케시, 나와 결혼해 줘.”


케시는 반지와 꽃다발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웃었다.


“하하하… 뭐야 진짜. 여기까지 와서 고백을 하면…”


아니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웃음에서 나오는 눈물이 아니었다.


“너무… 기다리고 있었…다고…”


반지가 그녀의 손가락으로 들어가자, 케시는 오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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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어떻게 주인공은 그렇게 많은 여자들을 후리고 다녔나요?

A: 개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