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웠던 여름이 끝났다. 시원해진 공기와 평소보다 이르게 오렌지색으로 물들여진 하늘은 가을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와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종로 거리의 한 장면이었다. 약국, 커피숍, 전당포 등 흔히 볼 수 있는 것들로 시작해서 마치 주변의 사람들, 심지어 도로를 지나치는 차들도 보라는 듯 현수막이 깃발처럼 펄럭였다.

취업 보증!

이라고 볼드체와 함께 화려한 파란색 배경이 칠해지면서.

몇 보를 걸어가다가 길 건널목에 보인 건물은 내 걸음을 멈추게 해줬다. 꽃을 연상케 하는 금빛 테두리 안에 廣藏이라고 적힌 황금색의 한자 위에 광장시장이라고 하얀색 글씨로 크게 적혀 있었다.

"빙고."

짧은 한마디와 함께 미소가 그려졌다. 엉뚱한 전철을 타서 잘못 온게 아닌가 해서 걱정했는데.

과연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 시장답게 규모가 남달랐다. 눈으로만 봐도 기품이 느껴질 다양한 색으로 전시된 한복부터 시작해서 유행이 한참 지난 옷들을 눈으로라도 보고 가라는 듯 옷걸이나 혹은 벽에 걸려 있었다. 몇 걸음 더 걷더니 보기만 해도 푹신해 보이는 이불과 베개들이 쌓인 가게 옆에 다양한 색과 종류의 직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마치 사가라는 듯 아줌마들이 지나가는 손님들을 재촉하는 와중에 천천히 구경하던 도중….

"정성운!"

찰싹! 한손으로 등을 때리는 느낌에 생선마냥 팔짝 뛰어올랐다. 목소리의 근원지를 따라 뒤 돌아보니 소녀가 서 있었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흑발의 검은색 계통의 교복과 빨간색 넥타이를 맨 소녀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내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그녀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체 작은 웃음을 내 뱉었다.

"뭘 그렇게 놀래. 다 큰 사내자식이-"
"사람들 다 쳐다보면 어떡하려고 그래? 엄청 놀랐잖아 덕분에."
"그건 네가 잘못한거야. 멍때려서 당한거라고."

약오르지? 라고 말하듯 혀를 쏙 내밀었다. 히히-하는 작은 웃음을 내뱉으면서.

"내가 늘 말했지? 방심하는 순간 그대로 기습당한다고. 이 누나가 몇 번을 말해야 하니 쯧-."
"어째 나를 어린애 대하는 듯 말하는 거 같다? 누나라느니 교육이라더니. 게다가 우리 동갑이잖아."
"내 눈에는 여전히 어린 애로 보인답니다 정성운 군. 돌봐야 하는 어린애."

쓴웃음이 지어졌다. 내가 여전히 어린 애로 보인다는 말에 저절로. 아직 세상의 빛을 본 지 얼마 안 되었을, 그 철없던 무렵부터 서로를 알고 지내온 사이였다. 원래 아이들은 어렸을 때 동성끼리 어울리는 일이 흔하고, 이성끼리 어울리는 일은 흔치 않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온 사이라서 그런지 그것에 대한 어색함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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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해야 할 일은 기억하고 있지 성운아?"
"당연하지."

주변을 감싸는 음식들은 코와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알록달록 무지개 마냥 여러 색과 종류로 포장된 떡들로부터 시작해서 명란젓, 오징어젓 등 보기만 해도 하얀 쌀밥 위에 얹어 먹고 싶은 수많은 젓갈 종류가 비닐봉지로 감싸진 철 박스에 담겨 있었다. 그 옆에는 보기만 해도 양손으로 뜯어 먹고 싶어지는 두툼한 껍질로 감싸진 족발들이 각 크기와 종류별로 놓여 있었다.

"내일 시험을 대비해서 무슨 음식을 만들지 정하기. 주제가 어릴 적 먹어본 추억의 음식 맞지?"
"맞았어. 그런 의미로 아이디어를 얻기에는 여기만큼 좋은 곳이 없지."

한참 동안 길을 걷다가 우리 두 사람은 자리에 섰다. 분식이라고 적힌 간판 아래에 쌓인 음식들 앞에.

"우리 모두의 추억 장소에. 정확히는 어린아이들의 추억 장소라고 해야할까?"

기다란 소시지처럼 둥글게 말린 검은색의 순대에서 김이 올라왔다. 그 옆에는 보기만 해도 한 수저 떠먹고 싶어지는 붉은 국물이 하얀 떡과 삶은 계란 그리고 어묵들을 똑같은 색으로 물들여졌다. 맨 앞에는 여러 종류의 꼬치들이 떡볶이 국물과 비슷한 색의 양념이 담긴  철판 위에 전시되어 있었다. 붉게 젖혀진 소떡, 떡꼬치 곁에 좋은 품질의 기름으로 튀겼는지 밝은 갈색의 그을린 핫바, 소시지 꼬치들 역시 같은 색으로 젖혀졌다.

"우리 어릴 적에 많이 와보았잖아. 올 때마다 엄마나 아줌마에게 졸라서 맛난 거 사 먹은 게 엊그제 같은데."
"특히 너는 매우 심했던 걸로 알아. 안 사주면 사줘! 사줘! 라면서 바닥에 뒹굴기도 하고."
"못됐어!"

양 주먹으로 내 몸을 망치로 못 박듯 쳐냈다. 둥글게 마른 손이 내 몸에 닿을 때마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날 정도로 아픔이 느껴졌다.

"지우고 싶은 흑역사인데 왜 굳이 꺼내야 하는 거야! 간신히 머릿속에 지웠는데!"
"미안-미안-"

짧은 사과와 함께 나는 지갑을 들고 아까부터 지켜보시던 분식집 주인아줌마에게 다가갔다. 떡꼬치 2개를 주문했지만 하나 추가로 세 개를 주셨다. 여휴 총각-애인에게 잘 대해줘-라고 하시면서. 진짜 애인은 아니지만….

"이거 사줄 테니까 그만 화 풀어. 두 개 너 먹고."
"우…. 그러다가 훔쳐 먹는 거 아니지?"
"내가 왜…."

삐져 나온 입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세상에 불만이 가득 찬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조심스레 아까 받은 꼬치 두개를 건네주었지만 찡그러진 표정은 풀리기는 커녕 구겨진 종이마냥 더욱 일그러졌다. 내가 너무 놀린건가..

"내가 훔쳐 먹을 이유가 뭐가 있어. 그러다가 너에게 혼나는-"
"잡았다-"

찰칵!

검은색 교복 안에 감추어진 가냘픈 팔로 나를 감싼 뒤 셔터음이 들려왔다. 그녀의 한 손에는 떡꼬치를 쥐었고, 반대쪽 손에는 스마트폰을 쥔 체 허공에 떠오르고 있었다. 스크린을 보니 어떻게든 귀여워 보이려 하는 듯 혀까지 내밀면서.

"뭐한 거야 너 또."
"우리 둘만의 기념사진-이렇게 단둘이서 재래시장에 오는 것은 처음이잖아. 무엇보다-"

손에 들고 있던 떡꼬치를 깨물었다. 붉은색 양념으로 발라져 있는 꼬치가 맛있었는지 음-하면서 한 손으로 우물거리는 볼을 이루어 만졌다.

"우리 성운이가 처음으로 나처럼 예쁜 여자애에게 추억의 떡꼬치를 사주었잖아. 역사적인 순간이야."
"역사적인 순간까지는. 그냥 네가 화 풀어줬으면 해서 그런 건데."
"너는 참 예나 지금이나 겸손해. 변함없이 말이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얄궂은 것은 물론 선머슴 같은 성격은 어디 가지 않은 것을-라고 입밖으로 내 뱉을뻔 했다. 정말로 그랬다가는 왠지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 뻔하지만. 겨우 화가 풀렸는데 괜히 기름 붓는 짓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래도 고마워. 이렇게 떡꼬치도 사줘서."
"천만해. 기분 풀어져서 다행이야."

그녀 따라 꼬치를 입에 넣었다. 구워진 떡의 아삭함이 귀로 들려오면서 빨간 양념에 물들여진 떡의 매콤달콤한 맛이 혀를 젖혔다. 변함이 없었다. 어릴 적 어머니 따라 재래시장에 올 때마다 느꼈던, 나이를 먹어 고등학생이 되었음에도 항상 끌리는 맛이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인지 양손으로 꼬치를 하나씩 베어 먹고 있었다. 미소를 지은 체, 행복하다는 듯.

"한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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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렌지색이었던 하늘에 어두운 사파이어색이 번졌다. 진한 푸른색과 오렌지색이 섞인 구름과 하늘은 저녁이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아직 늦은 시간임에도 놀이터에는 여전히 애들이 놀고 있었다. 머지 않아 부모님으로 추정되는 어른들이 나타나 애들을 한두 명씩 데려갔지만.

저녁 특유의 시원한 공기를 마시면서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엘리베이터 안에는 사람들이 없어서 올라가는데 쾌적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 녀석 왜 여태까지 안 들어와! 저녁이 되어가는데도!"
"오늘 시내하고 같이 재래시장에 간다고 했잖아요! 곧 오겠지!"
"사내대장부가 언제까지 요리나 하고 다닐 거야!? 계집애도 아니고!"

그 기분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순간 깨져버렸다.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 조각 난 찻잔처럼. 들려왔다. 평소처럼 들리는 고함이. 쇠로 만들어진 문안에서 들려 왔지만 마치 귀에 대고 외치는 거 같았다.

"자기 누나와 형은 대학원 졸업해서 의사에 변호사가 됐는데 어쩌다가 혼자서 어벙한 녀석이 된건지 알수 없어! 무슨 요리사가 되겠다면서 조리 학과에 가고!"
"그러다가 옆집 사람들이 듣겠어요! 적당히 하세요!"

가라앉을 생각이 없으셨다. 한번 시작된 고함은 마치 불에 붙인 기름이 서서히 불타오르듯 커져갔다. 잠잠해지기를 기다렸지만 나는 한숨과 함께 가방 속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열쇠를 돌리기에 맞추어서 등줄기와 심장이 동시에 떨렸다. 추위 또한 느끼면서.

"다녀왔습니다."
"넌 또 어디 갔다 이제 와!"

끼익-하는 미약한 쇳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고함이 귀를 찢고 들어갔다. 기다렸다는 듯.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애가 밤늦게까지 쏘다니고 와! 그렇게 해서 어느 대학에 들어가려는 거야!?"
"시내랑 재래시장 갔다 오느라."
"언제쯤 너희 형하고 누나처럼 될래! 두 사람은 독립해서 자기 밥벌이를 하면서 사는데! 언제쯤 계집들이나 하는 요리나 하고 앉아 있을 거야!?"
"여보 그만해요! 제가 있다가 잘 얘기해 볼 테니까!"
"당신이 그러니까 애가 저 모양 저 꼴이잖아!"

최대한 귀로 흘려보내면서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귀를 막고 싶은 충동을 최대한 억누르면서. 

"너 어디가!? 아버지 얘기 마저 들어야 할 거 아니야!?"

방에 들어갈 때쯤 귀에서 들려왔다. 늘 항상 하지만 이젠 익숙해진 단어가.

"한심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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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진 나무처럼 침대에 쓰러졌다. 간만에 사람 많은 곳을 돌아다녀서 그런가? 아니면 긴장감이 풀려서 그런가. 평소보다 나른해진 느낌이다. 움직이려 해도 이불의 포근함과 매트리스의 푹신함은 올라오는 밀물처럼 졸음이 더욱더 몰려왔다.

"지겹지도 않으신가."

마음속에 묻혀든 소리를 내뱉었다. 익숙한 일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들려오는 벼락과도 같은 목소리. 하지만 대처법은 간단했다. 방으로만 들어가면 되니까. 험악했던 날씨도 시간 지나면 잠잠해지듯 아버지도 진정 하실테고. 긴 한숨과 함께 주머니 속에 있던 스마트 폰을 꺼내었다. 시내라고 적힌 아이콘을 누르니 하얀색 배경과 함께 그동안의 대화 기록이 남겨진 말풍선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내일 우리 열심히 하자 시내. 최선을 다하고.-

양 엄지로 타이핑을 끝낸 뒤 전송 버튼을 눌렀다. 조금 있으면 시내에게서 답변이 올 거라는 기대감으로 들떠있었다. 사람은 약간의 응원만으로도 힘이 나는 법이니까.

"안 오네."

혹시나 해서 몇분 더 기다려 보았지만, 여전히 무응답이었다. 바쁜가? 아니면 피곤해서 먼저 잠들었나. 뭐 나도 이렇게 피곤해하는데 걔라도 오죽하겠냐만. 한참 동안 답이 없는 메신저를 바라보다가 한두 번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내려가는 블라인드 커튼처럼 감겨가는 눈을 멈출 수 없었다. 스마트폰을 쥔 손의 힘이 사라지면서 바닥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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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실로 들어오니 익숙한 광경들이 나를 먼저 맞이해 주었다. 각자 모여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거나, 혼자서 스마트폰으로 웹툰을 보거나, 다가올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공부를 하는 모습 등, 하루의 루틴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면들이었다. 길면서도 짧으며, 지루한 루틴이.

"야 정성운-"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이 등을 때린 느낌이 전신으로 전달 되었다. 억-하는 미약한 비명을 목밖으로 내 뱉으면서 고개를 돌리니 시내가 흰니를 드러낸 미소를 지은 채 내 옆에 서 있었다.

"혼자서 멍때리면서 뭐해. 염불해?"
"그냥 조별 시험에 관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어. 어떻게 해야지 높은 점수를 맞을 수 있나 이렇게."
"걱정할 게 뭐가 있어. 이 누나가 다 해주면 되잖아. 내 예쁜 손과 성운이의 실력이라면 1등은 떼놓은 당상이라고."
"아련하시겠어요. 누님."

장단에 맞출 겸 누님이라고 부르자 에헴-과 함께 헛기침을 내는 시내였다. 누나라고 부른 것이 너무나도 좋았나 보다. 검지로 코를 쓱-긋는 모습도 보인것이 그 증거였다. 그것도 모자라 우하하-나는 대단해-라고 말하면서. 저 선머슴 같은 성격 어디 안 가는구먼. 어릴 적부터 그러더니.

"아 맞다 시내. 너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는데."
"누나라고 해야 대답해 줄 거랍니다 성운 동생-"
"네- 네- 누나.

저 녀석 불붙기 시작하네. 한번 장단 맞춰주니까 계속하라고 부추기고. 뭐 어떡하랴. 안 맞추면 나만 안 좋아지는데. 저 녀석 은근히 뒤끝이 있었다. 자기 삐지게 해줬으니 한턱 사야 해-혹은 청소 너도 해! 삐지게 했으니! 라는 식으로 나오고….

"자 누나라고 했으니 물어보세요. 누나와의 질답 시간-"
"별거 없고."

말을 잇기 전 호주머니 속에서 검은색의 고무 재질로 만들어진 핸드폰 케이스로 감싸진 스마트 폰을 꺼내었다. 내 행동에 시내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머리 위에 물음표를 보였다.

"어제 내 문자 받았어?"
"문자?"
"집에 돌아오자마자 문자 하나 보냈거든. 시간 지나도 왜 대답이 없었나 해서."

말이 끝나면서 그녀의 표정이 바뀌어졌다. 웃고 있던 얼굴에서 무표정으로. 주변은 침묵이라는 커튼으로 감싸졌다. 교실은 여전히 떠들썩함으로 가득 찼지만, 시내의 아무 감정 없는 표정이 그 소리를 차단해버린 기분이었다.

"무슨 문자?"

그 침묵이 깨뜨린 것은 시내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었다.

"나 문자 같은 거 안 받았는데?"
"정말로? 띠링-하는 벨소리도 못 들었어?"
"이 누나가 왜 너에게 거짓말을 해. 네가 온 거 안 받았다고."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에 평소에 알고 왔던 시내의 얼굴로 돌아왔다. 귀로 들리지 않았던 교실의 요란함도 다시 들려왔다. 마치 멈추었던 벽시계의 초 바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거처럼.

"하지만 분명히 너에게…."
"야 정성운. 선생님이 너 보자고 해."

어떤 남학생이 다가왔다. 다른 반 출신인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선생님이? 갑자기 왜?"
"몰라. 그냥 보자고 하네? 얼른 가봐."

뭐지? 내가 최근 잘못한 거라도 있나? 머릿속에 있는 내용들을 트레이딩 카드 덱 맞추듯 하나씩 정리해 보았지만 딱히 사고 칠만한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무슨 일진도 아니고. 무엇보다 지금 시내랑 한참 대화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얘기 하던 도중 떠나는 것은 예의가 아닐텐데.

"갔다 와 얼른."

망설이는 내 심정을 꿰뚫었다는 듯 시내가 말을 꺼내었다. 손을 흔들면서.

"선생님에게 찍히면 오히려 곤란하잖아. 나머지는 갔다 온 뒤 얘기해도 되고."

바람이 창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미약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붙잡는 그녀를 보니 내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느껴졌다. 창가에서 비추어진 태양에 빛나는 모습은 마치 헝겊으로 닦은 뒤의 보석을 보는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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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축구 부원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었다. 하나-둘-셋! 하는 리듬과 함께 기합을 외치면서. 생각해 보니 조만간 우리학교 시합이 다가오는 구나. 그래서 평소보다 훈련에 매진 중이고.

뭐 다른 것을 떠나서...

"이놈의 교무실은 왜 반대편 건물에 있는 거야."

내가 다니는 학교는 조리학과 본관이 따로 분리 되어 있어서 교무실에 가려면 직접 발로 걸어야 한다. 그 덕에 반장 같은 서열 높은 애들은 자주 교무실까지 귀찮게 왔다 갔다 해야 하는 불상사(?)가 자주 발생한다. 오죽하면 조리학 전용 교실을 본관에 옮겨달라고 청원서를 낼까.

뭐 운동한다는 셈 치지. 시험 보기 전에 긴장을 풀기 위한 준비운동 정도?

"빨리 후딱 처리하고 돌아가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야 계집"

퍽!

머리를 내려 맞은 느낌과 함께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밝았던 시야에 검은 안개가 들어온듯 순식간에 어둑해졌다. 미약하게 킥킥-하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오면서 내 몸이 끌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양팔이 무언가에 의해 감싸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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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를 가린 검은 안개가 거둬질 쯤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관람용 좌석, 운동용 매트, 뜀틀 그리고 바구니에 가득 담겨진 축구공 등이 보였었다. 체육부용 창고인가? 라고 생각할때 쯤...
 
퉷-

냄새 나는 타액이 내 얼굴에 묻혀졌다. 

"여 이게 누구야-미래 미슐랭 3 별 쉐프님이 아니신가?"
"키키키킥-계집애 같이 생긴 자식-죽었으면-"
"계집애! 계집애!"

눈앞에 세명의 남자애들이 보였었다. 붉은색 머리카락을 한 피어싱을 한 건장한 크기의 남자애, 딱 봐도 모자라게 생긴 비만 체형의 남자애 그리고 얼굴은 뽀얗게 해서 원숭이와 같이 생긴 껄렁한 애 한 명...

"뜬금없이 뭐하는 짓이야? 내가 또 뭐했다-"

퍽-하고 붉은 머리 남자애가 내 배를 차버렸다. 피를 토할것만 같은 기분과 함께 양손으로 배를 감쌌다. 컥컥-하는 기침을 내는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세명에게서 웃는 소리가 들려왓다. 귀를 거슬리게 할 정도로. 

"뭐했다고오? 뭐했다고오?"
"우헤헤헤-야 들었어? 쟤 바보다-뭐했냐고 물어봐-"
"바보다 바보!"
"그래서 네가 한심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 정성운. 네가 그러니 찐따 소리 듣고. 어제 한 잘못을 전혀 모르고."
"내가 뭐 했길래 그래? 뭐 했길-"

붉은 머리 남자애는 자신의 한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콰악-하면서 내 턱을 으스러뜨릴 기세로.

"아가리 닥쳐 스토커."
"으…음!?"
"너 평소에 한시내 스토킹했다는 거 다 알아. 어제 장터로 강제로 끌어들여서 사진 찍고 그것도 모자라 먹을걸로 자기를 회유했다며? 시내가 우리에게 다 말했어 쓰레기야."

스토킹? 강제로 사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상태였다. 한거라고는 같이 시장을 돌아다닌거 외에는 없었는데? 조별 시험 준비를 위해. 시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내 귀가 잘못 된게 아닌가 했다. 나에 대해 그렇게 얘기 할 이유도 없을텐데?

"야 문 닫아."
"응! 응!"
"문 닫자! 우헤헤 문닫!"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면서 기다렸다는 듯 무언가가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발이라는 마음에 양손으로 문을 밀고 당겨보았지만, 열리기는커녕 문고리가 무언가에 걸린 듯 열릴 생각을 안 하였다. 철컹! 철컹! 하는 쇠소리와 함께.

"야! 문 열어! 재미없어!"

나는 다급하게 문을 두들기고 또 두들겼다. 지금 갇히면 안 되었다. 조금 있으면 조리 시험이 다가온다. 시내랑 같이 1점 하나라도 따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는데 모두 헛수고가 될 위기에 쳤다. 누군가가 듣기를 바라면서 선생님, 반장 심지어 시내를 부르면서 손 부숴질 각오로 두들겨 보았다. 

"나 시험 놓치면 안 된다고!"

하지만 돌아온 것은 침묵-들려온 것은 내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 외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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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선도부원들이 갇혀 있던 나를 꺼내주게 되었다. 학교는 끝난지 오래였다. 시험은 진작에 끝났다. 시내랑 같이 봐야했을 조별 시험이. 그 망할 세명 떄문에. 불행 중 다행이라면 나를 가둔 그 세 명은 교무실로 끌려가 혼나게 되었다는 거? 내일 아침이 오는 대로 세 사람을 처벌 하겠다고 선생님이 말 하셨다.

본관 밖으로 나오니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한 회색의 구름 안에 비춘 섬광과 함께 들려온 우르릉-하는 소리는 맹수가 미약한 울음 소리를 내는거 같았다.

두고 간 가방을 가져가기 위해 교실로 향하던 중 걸음을 멈추었다. 왜 하필 지금 비가 내리는 거야, 이래서 일기 예보는 함부로 못 믿는다니까 부류의 자질구레한 얘기를 하는 여고생 무리에 그녀가 보였었다. 당장 보고 싶은 그리고 만나자마자 사과하고 싶은 그녀가.

시내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녀에게 손을 뻗었지만....

"야 오늘 샘 너무 한거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점수를 그렇게 짜게 주다니..."
"내비둬. 그 샘 원래 짜서 줘서 짭짤샘이라고 하잖아."

그대로 내 곁을 쓰윽 지나갔다. 아무런 대답이나 반응도 없이 내가 존재 하지 않는다는 듯. 어? 하고 속으로 말하면서 그녀에게 고개를 돌려보려 찰나...

"야 방금 쟤 정성운 아니야? 네 친구?"
"오늘 조별 시험에서 나오지 않았다면서."

그녀 역시 친구들의 말에 고개를 돌리면서 우리 두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우르릉-하는 소리 밑에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언가를 말해야 했다. 안 나와서 미안하다고.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나 몰라 쟤."

이 말과 함께 그녀는 등을 돌려 걸어갔다. 뒤돌아보지 않은 체.

투욱 툭 툭-

이 상황에 반응 하듯 비가 내리기 시작 했다. 한 두 방울 내리던 빗물은 곧 물 쏟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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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피아에 연재하던것을 여기에 올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