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샌가 유행을 타고 폭발적으로 늘어난 가로수길, 괴기 현상 해결 업체를 표방하고 있는 영화의 사무소는 그런 아류 가로수길의 한 귀퉁이에 있다. 개설 초기만큼의 활력은 찾아볼 수 없다지만 나무 아래를 거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줄어든 것도 아니어서, 거리는 여전히 나름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에게 찾아오는 고객들은 그런 거리의 분위기와는 다른, 음습한 의뢰만을 들고왔으니.


“그래서...나한테 들러붙은 것은…."


“예, 이제는 더 해를 끼치지 못 해요.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딱 한 가지만, 더 하겠습니다.”


 사내가 그 말을 받아들이는 동안 영화는 벽에 걸린 검을 들어 호흡을 골랐다. 원념을 완전히 끊어내는 것이 마지막으로 해야하는 일. 사무소를 열고 몇 번이고 한 일이지만 날붙이를 다룰 때 마다 영화의 마음 속에는 불안감이 생겨났다. 서슬 퍼런 칼날에는 그것을 쥐고 있는 영화, 그녀 자신도 비춰지고 있으니. 영화는 숨을 내뱉으며 지금 있는 불안을 떨쳐내려 했다. 칼자루를 휘두르는 것은 호흡이 끝나는 순간.


“가만히 계세요.”


 한 마디를 내뱉은 영화는 곧장 사내를 베었다. 그 차디찬 한 마디가 사내의 귀에 채 닿기도 전에 그를 왼쪽 어깨부터 사선으로 잘라내었다. 단 한 발자국의 간격을 남겨두고. 자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 지 사내가 이해한 것은 그가 뒷걸음질 쳐 벽에 등을 기댔을 때 였다. 자신을 해칠 칼날이 한 치 앞까지 다가왔던 것을 목격한 사람은 그대로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검을 휘두른 사람도 몸을 떨며. 사무소는 한동안 정적에 휩싸였다. 


“하, 하하… 놀랍네요.”


“죄송합니다. 늘 이런 건 아닌데…”


 사내는 지금의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썩 유쾌하지는 않았으리라. 사내는 아무 말도 없이 본래 제시된 값을 치르고 문을 열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 소리가 들릴 때 쯤, 영화는 검을 본래 있던 장소에 걸어놓고. 사무소의 한 구석에 서서 이 모든 걸 지켜보던 여자는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건 끝났네요.”


 사무소의 유일한 고용인이자 영화의 아주, 아주 먼 친척. 영아는 긴장이 풀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영화의 곁으로 다가가 그 몸을 부축했다. 


"이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분명 필요한 일이었어요. 남아있었던 령이 비치고 있었으니까.”


 영아는 짙푸른 눈으로 영화를 또렷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파문도 일지 않는 호수와 같은 색. 그것은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으니.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그 푸른 빛은 분명 괴로운 마음을 위로해주는 색이기도 했다.


“정말인걸요. 차를 내올테니까 쉬고 계세요.”


 영화는 호의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에 온 몸을 기댔다. 풀어지는 몸, 그와 함께 눈은 저절로 감기고… 혼미한 정신은 과거를 쫓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 일을 했을까. 별다른 일이 없었더라면 이처럼 기괴한 것과 얽히지 않는 삶을 살았을텐데. 그런 미래란 어느 가을 날의 한 골목에서 산산히 깨져버리고 말았다. 지독한 증오와의 조우, 깨어지는 몸, 느껴지지 않는 좌반신의 감각.


‘한 번 홀리고서는 벗어날 수 없어. 어떻게 할래?’


 짧은 잠에서 깨어나는 건 그리도 불쾌한 기억을 헤집고 나서 였다. 편히 쉬는 순간에 어째서 그런 것이나 기억하는 걸까. 방금까지 느꼈던 원념이 몸 속 깊이 각인된 기억을 자극해서일까.


“푹 주무시나 했는데.”


 그런 고통은 드러낼 수 없어서.


“기껏 타준 차가 식으면 아깝잖아.”


 영화는 너스레를 떨었다. 사무소의 하루는 대개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사무소에서 의뢰를 처리하고, 휴식을 취하고. 사람이 아닌 장소에 사념이 깃든다면 그 자리에서 그것을 끊어내고. 괴기 현상이라지만 단순한 처리만을 반복하며, 사소한 고통은 홀로 참아내고 내일을 맞이한다.


 특이한 일이 없는 한은, 말이다.


“...여보세요? 예.”


 쌀쌀한 바람이 불지만 햇살만은 따사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가을날. 창틀 사이로 비치는 햇빛에 몸을 내맡긴 채 누워있는 영화의 곁에서 영아는 전화를 받고 있었다. 


“지금은 잠깐 쉬고 계세요. 예… 아니, 그렇게 갑자기 진행하시면… 그야 그렇죠. 예…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그렇게 수화기를 내려놓는 때.


“미희 언니지?”


 영화는 곧장 말을 걸었다. 영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눈치 빠르시네요.”


“네가 그렇게 존칭을 붙이는 사람은 몇 없으니까. 일 이야기?”


“예, 이 쪽을 소개해줬다고 해요. 소개받은 의뢰인이 한 시간 뒤에 곧 찾아올 예정이라고.”

“어떤 종류의 의뢰인 지는 아무런 말도 없었고?”


 영아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알 수 없는 의뢰, 더군다나 미희의 소개를 받아 방문하는 사람. 영화는 한숨을 쉬었다. 


“그 언니가 소개해주는 일은 수지가 안 맞는데…”


“저희가 그런 걸 가릴 처지인가요.”


 영화는 그 말에 별다른 반박을 못하는 스스로의 처지가 싫었다. 빚을 갚아야하는 처지라지만, 갖은 고생을  미희가 소개하는 일거리들은 달랐다. 미희가 영화에게 던져주는 일거리는 쉽게 끝난 적이 없어서, 영화에게 돌아오는 것은 한없이 0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는 미희의 일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거두어진 순간부터 사무실을 차리기까지 신세졌던 모든 건 빚으로 돌아와, 둘은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가 되었으니까. 


 영화는 그저 이번 일이 괴롭지만 않기를 바랬다. 가릴 수 없는 사정에 그 일이 조금이라도 편하다면 다행일테니. 시침이 다음 숫자를 가리킬 때 쯤에 약속한 사람이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앳되보이는 인상. 자신을 예담이라 소개한 여자의 눈동자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불안을 투영한 듯한 눈빛… 영화는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이 좋았다. 작금의 상황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미신을 믿으며 억지를 부리는 사람의 고집스러운 눈매와는 달라서. 다른 사람의 의사가 섞여버린다면 분명 일을 그르친다고, 그렇게 믿고 있는 영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뢰인을 맞이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자리에 앉으세요.”


 영화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영아는 의뢰인을 소파로 이끌었다. 


“아, 감사합니다.”


 엷은 미소는 잊지 않은 채로. 


“편히 있으세요.


“그래서 어떤 일로 찾아오셨죠?”


“이런 말을 해서 믿으실 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운을 띄운 예담은 품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이미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녀. 함께 이야기하는 추억은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는 봄날을 담고 있었으며, 또한 숲의 푸르름에 녹아내렸던 여름날을 그리고 있었다. 물론 이야기의 결말은 비극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그런 좋은 아이였어요. 그 아이의 빈 자리를 받아들이는 게 쉽지는 않았죠.”


“그래도 어떻게든 이겨냈는데, 친구분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다른 분들은 제 착각이라고 하지만 제겐 너무도 생생한 일이었는데...”


 그렇게  예담은 자신의 목격담을 이야기한다. 죽은 친구가 아지랑이처럼 그녀의 곁에, 사는 곳에 나타난다고. 그 이야기를 잠자코 들으며 예담을 관찰하는 영화였지만, 어떠한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스스로가 둔감한 탓일까 생각해 영아를 돌아봤지만 영아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 모든 건 예담의 기분 탓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그 가설을 확신으로 바꾼 것은 이야기 도중 예담이 꺼낸, 전에 들렸던 사무소에서 받아온 은제 장식이었다. 이런 걸 손님에게 내주는 그 아저씨는 영화보다도 유능한 사람이었다.  


 보통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로 결론이 지어지면, 영화는 완전히 손을 뗀다. 로자리오나 부적같은 걸 팔아치울 말재주도 따로 없어서, 얌전히 손님을 보내준다. 하지만 지금 다른 누구도 아닌 언니의 소개로 왔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 사람이 이런 손님을 보낼리가 없는데. 다른 때와는 다르게 한참을 생각하다 영화가 내린 결론은.


“한 번 찾아뵐게요.”


 죽은 친구가 나타난다는 장소로 향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의외네요. 보통은 신경도 안 쓰시면서.”


“언니가 보낸 사람치고는 아무 일도 없는 게 영 꺼림칙해서.”

 

 그것말고도 영화의 가슴 속에 도는 것은 묘한 고양감이었다. 마에 홀려버린 사람은 헤어나올 수 없다. 늘상 괴로워하며 없던 과거로 치부하고 싶어하더라도, 결국에는 이렇게 되는걸까. 영화는 자조하듯 웃었다.


 그리고 어느 날의 밤. 영아에게 마무리를 부탁하고 나온 영화는 어느 골목에서 잔뜩 상처입은 채로 스스로의 천성에 쓴웃음 짓고 있었다. 


 의뢰인이 알려준 장소들을 돌던 때, 문득 그녀를 찌르는 것이 있었다. 그 다음 이어지는 습격은 피했지만 찔려버린 왼팔은 국소적으로 스파크를 튀기며 꺼져가고 있었다.

 

“하필이면…”


 어느 날 마주친 원념이 앗아가버린 좌반신. 그 날, 원념은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얄궂게도 영화에게 미지의 존재와 맞설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보통은 인지할 수 없는 것들과 접촉하게 해주는 시술. 헤아릴 수 없는 것, 령을 연료 삼아 움직이는 신체는 이전에는 느끼지 못하난 감각을 가져다주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새로이 얻은 부분에 한해서였다. 달리 말하자면 새로 얻은 좌반신이야말로 그녀의 힘의 근원. 영화에게 남은 수는 없었다. 지금 자신을 습격하는 존재가 이 정도로 만족하기를 빌 뿐.


“이럴 줄 알았으면 영아랑 같이 올 걸 그랬나...”


 그런 불만을 내뱉는 것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보이지 않는 적은 집요하게 영화를 쫓았다. 먼저 기척을 느낄 수 없어서, 통증을 느낀다면 그 반대로 겨우 겨우 몸을 틀어 치명상만은 피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이로 상처를 입는 신체는, 령을 잃어가는 좌반신은 서서히 그 기능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바탕 구른 뒤 일어나려 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땅을 짚었던 왼팔에 커다란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다리라도 바삐 움직이려 했지만 조금씩 바스라지는 왼발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심야의 골목, 미지의 습격자는 여전히 영화를 공격하고... 흐르는 피에 정신은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끝나지않는 고통, 해결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 영화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는 끝내 생을 놓아버리고 싶다는 욕구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느 골목에서 언니에게 거두어졌을 때와 같은 감각. 그렇게 생의 실감이 점차 흐릿해지는 영화의 눈에는 문득…


 영아의 푸른 눈동자가 비쳤다. 


 주마등이 비춘 환상이라 여겼지만 끈적하게 늘러붙는 피는 아직 그녀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 앞에 있는 고용인이 진짜라는 것도. 그제서야 영화는 역전의 실마리를 붙잡을 수 있었다. 푸른 눈동자는 모든 것을 비추니.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뜬 두 눈에는 상처입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영화 자신과 그런 그녀를 노리는 아지랑이를 비치고 있었다. 그 감각을 믿고 검을 뽑아내어, 영화는 칼날을 벽에 꽂아 넣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한 수. 그리고 영화는 승리했다. 이제껏 영화를 괴롭히던 것은 칼날을 벗어나지 못하고, 서서히 사람의 형상을 갖춰나가고 있었다. 어느 여인의 모습, 하지만 어린 티가 나는 그 얼굴은 분명 영화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인물이었다. 


 함께 어른이 되지 못한 누군가. 추억으로 흘려보내야만 했다는 사람. 이 원념은 곧 그 사람의 미련이리라.    


“...지금 여기 있다면 얼굴을 보여줘요, 예담 씨.”


 꽂은 도신을 한층 더 밀어넣으며 말했다.


“이런 건 서로 찝찝할테니까.”


 엷은 가로등의 불빛이 겨우내 지탱하는 골목의 사이에서 의뢰인이 걸어나온다. 끝을 예감하는, 비참한 표정을 그 얼굴에 품은 채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칼자루를 쥐고 있는 이상, 애시당초 주도권은 예담에게 없었다. 이는 권유가 아닌 강요. 그를 알고 있는 예담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붙잡고 있어줘.”


 예담의 대답을 본 영화는 칼을 빼들었다. 그 빈 자리는 영아의 팔이 채워져 그림자를 그 자리에 묶었다. 고통은 전해지지 않도록, 단지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만. 영아의 조치를 확인한 영화는 예담에게 다가갔다.


“죄송해요.”


 눈을 마주친 예담이 내뱉는 것은.


“...죄송해요.”


 사죄의 말이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읊을 수 밖에 없는 것. 

 

“오히려 미련을 가지고 지박령으로 남긴 건 당신이었군요.”


 벽에 갇힌 원념은 예담이 보여주었던 사진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가 품었던 미련의 구체화. 어떻게든 그 형체를 유지하고 싶어, 지금처럼 령을 찾아 사람들을 습격했으리라. 이제야 미희 언니가 이 의뢰인을 내게 보낸 이유를 알았다. 이 사람의 처리를 내맡기기 위해서라고.


“지금까지 몇 명이나 이런 식으로 해친거죠."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직접적으로 찌른 건 당신뿐이에요. ...혼자였으니까.”


 그나마 다행인걸까. 예담은 아직 업보는 쌓아 올리지 않았다.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더라도, 이래서 안 된다는 것 쯤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그래도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았어요. 겨우내 사랑한다고, 마음을 전할 수 있었는데. 제가 그 아이를 어떻게…!”


  그렇게 끓어오르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내뱉던 예담은 순간 입을 닫아버렸다. 두 눈에 비친 영화의 몸 곳곳에는 상처가 벌어져 있었다. 이기심의 말로. 자신이 저지른 죄를 목도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고통을 가져다주니.


“죄송해요… 정말로… 정말로…”


 순간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얄팍한 수일까, 진정한 참회일까. 정확히 무엇인 지 판별할 수 없는 눈물을 보며 영화는 많은 것을 생각했다. 한낱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지만 어떻게든 그 환상을 끌어 안으려하는 여자. 잃어버린 몸을 차가운 금속으로 채우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의 일을 내려놓지 못하는 자신. 마에 홀린 사람은 결코 헤어나오지 못하니.


 한참 침묵이 감도는 사이, 영화는 칼을 빼들어 영아가 붙들고 있었던 것을 베었다. 칼이 그린 궤적을 따라 원념을 이 세상에 붙들어놓는 령이 새어나오기 시작하고, 예담은 끝을 직감했다. 그를 확신으로 바꾸려는 듯이 영화는 잔혹한 말을 이어나갔다.


“다시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못 할 거에요.”


 완전한 소멸. 그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예담의 표정은 순간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이 또한 감내해야 하는 일이라고 각오는 했지만 막상 닥친 현실은 참혹하기 그지없어서. 차오르는 비애를 다시금 눈물로 흘려보낼 뿐이었다. 


“단지 그 뿐이에요.”


 조롱처럼 들리는 말, 하지만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말이었다. 예담이 눈물을 닦고 바라본 곳에는 그녀의 친구가, 갈 곳을 잃은 미련이 있었다.   


“말을 하지 못하더라도 전해지는 것은 있을테니까.”


 사랑하는 연인들에게 내려지는 마지막 자비. 영화는 이내 영아의 부축을 받고 서서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예담은 고개를 조아렸다. 자신이 저지른 모든 일에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어서, 그리고 그런 자신을 용서해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방도란 없을테니.


 예담을 뒤로 한 둘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골목 사이에 나있는 계단이었다.


“꽤나 아슬아슬했네요.”


“죽기 직전이었지.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방금 전의 소란으로 망가진 신체가 휴식을 요구해서, 영화는 계단에 걸터 앉아 삐걱거리는 왼팔을 짜맞춘다.


“감각이 예민해서 무엇이든 금방 알아챌 수 있으니까요. 거기다가 그게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가족의 일이라면 더더욱…”


 처음 사무소를 찾아온 영아에게 이미 들었던 이야기였다. 사람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곳에서 찾아온, 강철로 된 몸을 가지고 있는 먼 친척.


“할머니의 할머니한테 고마워해야겠네, 이거.”


 그들은 또 어떻게 맺어진 인연일까 생각하는 사이로 처치가 끝난 팔이 안정적인 구동음을 내고 있었다. 시험삼아 손가락을 구부리자, 손은 영화의 의지대로 주먹을 쥔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끝내도 괜찮을까요.”


 그런 식으로 영화가 자신의 몸을 확인하는 사이, 영아가 물었다.


“다시 그런 일을 벌인다면, 그 때는 또 다른 누군가가 책임을 묻겠지. 업이라는 건 분명히 있어. 게다가 방금 챙긴 령이 꽤 되서.” 


 팔아치우면 본전은 챙길 수 있다고, 영화는 말을 덧붙였다. 거기에 영아는 고개를 가로지으며 다시 물었다.


“제가 말하는 건 다른 의미에요. 마지막에 끝까지 베어내지 않은 건, 어째서인지.”


 분명 그 말대로 영화는 여유를 두지 않고 베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들끓던 원초적인 분노는 복수를 종용하고 있었으니까. 


“그 얘기야? 그건 말야.


 하지만 그 결정적인 순간에 영화는 예담의 미래를 상상했다. 의뢰인, 이 거리의 그림자를 쫓는 사람, 그리고 필사적으로 사랑을 이어나가려 했던 여자. 그 사람은 다시 또 내려놓지 못하는 미련을 짊어지게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될 바에야 지금 이대로, 사랑하는 채로.


“사랑하는 두 사람을 떨어뜨려 놓고 싶지 않았어.”  


 사랑, 그런 말을 들으리라고 상상이나 못했다는 듯이 영아는 놀란 눈으로 영화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향해지는 의문섞인 시선을 느낀 영화는 되물었다.


“왜? 이상해?”


“사랑이라니, 설마 그럴 거라고는 생각을…”


 놀라운 그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사람에게 영화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감상에 빠질 수도 있지. 내가 사랑을 못 해본 사람도 아니니까.”


 영아는 이어지는 말에 더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런 영아에게 평소에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며 쏘아붙일까 했지만, 영화는 입을 닫고 물끄러미 지평선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제 곧 해가 떠오르리라. 다시 또 내일이 오리라. 이 새벽 사이에 있었던 소동은 타오르는 불꽃에 사라져, 살아숨쉬는 생명이 거리를 채우겠지. 그런 생각에 호응하듯 영화의 두 눈이 향하고 있는 장소는 서서히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어둠은 걷히고 동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