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사귀는 사람은 있어?"


한창 분위기가 무르 익어가던 술자리에서 취기에 용기를 얻어 어렵사리 꺼낸 말이었다. 주변은 들뜬 분위기에 시끄러워 아무도 내가 하는 말을 듣지 못한 모양이다. 다행이다.


우리 과에서는 물론 학교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눈에 띄는 미모를 가지고 있는 그녀를 흠모하는 녀석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내가 그녀에게 관심이 가는 이유를 뽑자면 딱히 자신의 외모를 과신하지 않는 겸손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한 그녀는 누구한테나 상냥하게 웃어주는 천사같은 아이였다. 


"에이~ 나 그런거 없어."


그녀 역시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살짝 높아진 목소리였다. 하지만 진지하지 않은 짓궃은 질문 정도로 여기는 것일까. 웃으면서 손사래를 치는 그녀.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술의 힘을 빌린 김에 못했던 질문을 계속 해보기로 한다. 


"그럼 이상형은 어떤 사람이야?"


그녀는 누구에게나 두루두루 친절했지만, 학교에서 누군가랑 사귄다는 소문 같은건 전혀 없었다. 그런 소문이 없다는건 다행스러웠지만 솔직히 그 정도의 미모와 성격으로 연애를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그녀의 남성 편력이 수수께끼인 이상 직접 본인이 원하는 이상형을 들어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진지한 이야기를 피하고 싶거나 혹은 나와는 진지한 관계를 피하고 싶어하는 그런 눈치였다.


"딱히 그런 것도 없어."


거절의 뜻으로 봐야할까. 애써 괜찮은 척 했지만 속은 쓰리다. 그녀 역시 딱잘라 말하기 민망했는지 잔에 남아있는 맥주를 홀짝거린다. 


서로가 불편한 짧은 침묵. 이미 차인거나 마찬가지인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른채 연거푸 술잔만 비우고 있었다. 


기분좋은 취기가 지나서 약간 눈앞에 어지러워질 때 즈음.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너는 생전 처음 본 누군가한테 첫눈에 반한 적 있어?"


"처음 본 사람한테? 그건 무리지..."


팔짱을 낀채 가장되게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 나를 지켜보는 그녀의 표정은 씁쓸하지만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있다.


"진짜로 딱히 이상형이 있는게 아니야. 나는 운명이 있다고 믿거든. 지금도 그렇고."


"낭만적이네..."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한마디가 단순한 감상이 아닌 그저 비아냥일 뿐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술의 힘이 가져다 준건 용기뿐 만이 아닌 것이다. 자신의 추잡스러움을 감출 이성마저 어느새 술기운에 마비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에 그녀 역시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나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때때로 그녀가 술잔을 내밀면 잔을 맞대기만 했다. 


술잔을 부딪히자 지나치게 맑은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런 유리잔 건너편에 보이는 상대. 말없이 술잔을 나누고 있는 우리는 불편한 남녀 관계가 아닌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그 뿐인 것이다. 그녀에게 여지가 없다고 해도 그녀와의 관계는 끝나지 않는다. 


여느 때와 같은 표정으로 술을 마시다가 눈이 마주치면 웃어준다. 그런 그녀를 보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와 동시에 술에 몸을 맡긴채 어리석은 말을 했던게 미안해진다. 


"그..."


"그러고 보니까 영미 언니는 오늘 안나왔나보네. 혹시 낮에 어디 간다고 들은건 없어?"


"아... 글쎄? 그런 소리는 못들었네."


"그래."


그리고 다시 말없이 그녀는 빈 술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


"다녀왔어."


"오늘은 꽤나 많이 마신거 같아. 못할 짓을 했거든."


"걔도 진심이었을텐데..."


"더 같이 마시고 올 걸 그랬나. 그렇게 생각하지?"


"영미 언니."


형광등이 켜지자 그녀를 보며 손과 발이 모두 묶인 여자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주변에 물건은 없어서 뭔가 부숴지거나 하지 않았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아, 내가 너무 늦게와서 약기운이 떨어진 모양이네."


기분 나쁘게 얼굴이 어루 만져지는 느낌에 여자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여자가 할수 있는 저항이라곤 있는 힘껏 고개를 돌려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며 원망이 가득찬 눈길로 노려보는 것 뿐이다. 


"맞다. 말도 못했지? 알았어. 입에 있는거 치워줄게."


그녀는 여자의 입에 물린걸 풀어 주었다. 입이 자유로워지자마자 여자는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미친년이! 이게 무슨 짓이야! 얼른 이거 풀어!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수 있어? 너같은년은 경찰에 신고해서 인생을 끝내버릴거야! 미친년아 이거 빨리 풀라고!"


잠자코 욕설을 듣고 있던 그녀는 참지 못하고 눈을 질끔 감는다. 떨리는 눈꺼풀 아래로 눈물이 한방울 흐른다. 


"뭘 잘했다고 울.. 커헉!"


여자는 직후에 오는 목의 충격에 강제로 말문이 틀어 막히고 말았다. 순식간에 그녀의 발이 여자의 목덜미를 짓눌러버렸고, 그녀는 숨통이 막혀서 괴로워 하는 여자의 상태를 아랑곳 않고 더욱 더 서러운 듯 흐느끼고 있다.


"언니는 몰랐지? 언니를 처음보는 순간부터 사랑했어. 언니의 모든 모습이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컥, 콜록, 콜록."


"근데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수 있어...?" 


발을 떼고도 여자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고 기침만 내뱉었다. 여자로서는 그녀의 말을 대꾸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들 뿐이었다. 


"조금만 머리를 식히고 얘기하자. 그러는게 좋겠어."


목덜미에 주사기 바늘을 들이대는 그녀의 모습에 여자는 아연했다. 부조리함에 대한 분노를 넘어서 밀려오는 공포에 온 몸이 떨려왔다. 그에 비해 주사기를 들이대는 그녀의 손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계속해서 여자의 목덜미를 향하고 있다. 불과 몇 센티도 안되는 거리였다. 


"나, 나, 나도."


지금 당장 뭐라도 하지 않으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굴러가는 모든 상황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여자의 턱이 덜덜 떨린다. 최대한 태연하게 말을 하려고 했지만 사람인 이상 두려움을 완벽하게 감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도 너, 널 사랑해..."


이렇게 티가 날 정도로 더듬어대는 사랑 고백이 통하는 것일까. 동시에 여자는 조금만 더 신중하게 얘기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여자의 우려와는 다르게 그녀는 왼손에 쥐고 있던 주사기를 바닥에 내려 놓은 채로 여자의 눈 앞에 무릎 꿇는다. 


그렇게 눈높이가 맞으니 자연스럽게 서로의 눈을 바라보게 되었다. 여자는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기로 다짐을 하며 똑바로 마주한다. 그리고 마주하고 있던 그녀의 눈은 더욱 더 촉촉해지기 시작한다. 


"드디어... 알아주는구나."


그러고는 덥썩 여자를 끌어 안는다. 정말 아이러니 하게도 그녀의 품이 우스우리만치 따뜻하고 포근하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안긴 채로 그녀의 뒷통수를 바라보며 여자는 생각했다. 


겹치고 있는 몸이 떨어지는 순간 있는 힘껏 그녀의 목을 물어 뜯어 버려야겠다.


"그래... 널 사랑해."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히 상냥하게 거짓말을 속삭인다. 여자의 목소리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무방비한 그녀의 뒷통수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눈에서만은 웃음기가 없는 그런 미소였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그녀는 더욱 더 강하게 여자를 끌어 안았다. 마치 거센 저항이 있을 거라는걸 예상하는 것처럼 그녀의 팔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여자는 불현듯 자신의 왼쪽 복부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살을 억지로 비집어서 뚫고 들어오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다.


"어...?"


여자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이변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놓지를 않는다. 오히려 무언가를 확인 하는 것처럼 더욱 더 안겨 들어온다. 그녀가 안겨 들어올수록 통증과 감각은 더욱 더 깊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피부를 뚫고 살결을 넘어 존재조차 느껴지지 못했던 장기까지 도달해 오는 걸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나도 언니를 사랑해."


몇 년이나 그녀와 알고지낸 여자조차 그런 목소리는 들어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몇번이나 되새긴 감정일까. 차분하고도 몹시 가슴을 울리는 목소리를 하고선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는 그녀의 행동이 더 이상 농락이라고 여겨지질 않는다. 


그녀는 진심으로 미친 것이다. 


하지만 그 깨달음은 이미 늦어버린 채로 여자의 의식은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간신히 목덜미를 뜯어내어 죽여버릴 각오를 했건만, 그녀는 여자를 꼭 끌어 안은 채로 힘이 다해 무너져 가는 것조차 허락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