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캡슐이 열리며 하얀 연기가 발 밑으로 빠져나갔다.

목과 허리, 발목을 묶은 끈을 풀고 캡슐 밖으로 나왔다.

입에서 마우스피스를 빼고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했다.

몇 번이고 경험해 본 냉동수면이었지만 이 구토만큼은 적응되지 않았다.

조용히 라이트를 불렀다.


"라이트, 상황 보고 시작해."


"기상을 축하드립니다, 함장님. 상황 보고 시작하겠습니다."


내가 잠든 뒤로 일 년이 지났다.

물론 '일 년'이란 개념은 이 우주선 안에서의 시간일 뿐, 지구에서의 시간은 이보다 훨씬 길 것이다.


"표준 지구 시간 약 5년 8개월이 지났습니다. 경미한 선체 손상이 5번, 중대한 외부 충돌이 1번 있었으나 자체 회복 프로그램으로 모두 정상입니다. 4시간 후 최종 워프 지점에 도착합니다. 준비하십시오."


"고마워. 주방에서 코코아 한 잔만 준비해줘. 수동 점검 후 10분 후에 갈거야."


"알겠습니다."


조종석에 앉아 계기판을 살폈다.

그가 보고한대로 문제점은 없었다.

다시 자동 운항으로 변경한 후 눈 앞에 펼쳐진 암흑를 바라보았다.

두꺼운, 그러나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우주가 나를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푸른 점 하나가, 그 뒤로 더 작은 빨간 점이 보였다.


지구의 멸망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모든 과학자들이 길어봐야 10년이라고 예측했다.

인간이 저지른 수많은 환경 파괴는 결국 모두를 파멸시킬 재앙이 되었다.

이대로 인류의 멸종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전 세계의 기술과 인력을 총동원해 우주선 5대를 만들고 선발대를 조직했다.

우리의 임무은 인류가 살아갈 수 있는 대체 행성을 찾고, 그곳에서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두는 것이었다.

나는 마지막 우주선의 함장이 되었다.

지구를 떠난 지 며칠 후 우리는 냉동수면에 돌입했다.

태양계를 벗어난 워프 지점까지는 우주의 시간으로 일 년이 걸렸다.

그동안 우주선은 인공지능 '라이트'가 조종했다.


나는 지구를 멍하니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 그곳에서 만든 수많은 인연들, 햇살이 비추는 안락한 테라스가 있는 나의 집, 인공지능 연구원이셨던 어머니. 용감한 소방관 아버지까지.

그것들을 지켜내기 위해서 나는 여기에 와있는 것이다.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물론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그래도 나를 움직이게 하는 커다란 어떤 것에게 기도했다.

살아남아서, 그들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쿠웅-


갑작스러운 충돌에 기도를 마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내가 부르기도 전에 라이트가 보고를 시작했다.


"C구역 N7 라인 오른쪽 통로에 가벼운 소행성 충돌이 있었습니다. N6 라인과 N8 연결봉이 파손되었습니다. 정상 항로로부터 0.05° 이탈이 감지되었습니다. 자동 회복 프로그램 시작하겠습니다."


다행히 사소한 충돌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라이트를 제지했다.


"됐어. 내가 나가서 직접할게."


"괜찮습니다. 5분 내로 수리 완료 가능합니다."


"아니, 내가 한다니까? N5 통로 개방 준비하고 항로 수정해."


"왜 굳이 나가려 하십니까? 자칫하다 부상을 입을수도 있습니다."


"아니, 내가 나가겠다는데 왜 그래?"


"지금 나가시면 코코아가 식습니다. 제게 맡겨두시고 주방으로 이동하세요."


"뭐 코코아야 다시 데우면 되는거고. C구역까지 5분 걸리니까 준비해."


조종실에서 나가려는 순간, 자동으로 문이 닫혔다.


"...지금 뭐하는거야?"


"죄송합니다, 함장님. 함장님께서는 나가실 수 없습니다."


"너가 막는다고 내가 못 여는 줄 알아?"


나는 가볍게 비상개문 버튼을 누르고 유유히 조종실에서 빠져나왔다.


"너 갑자기 왜 그러냐. 나이 좀 먹었다고 사춘기라도 온거야?"


나는 반쯤 농담조로 던진 말이었지만 라이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C구역으로 진입했다.

N5 라인 앞에서 우주복과 여분의 연결봉을 챙겨 에어로크 앞에 섰다.


"라이트, 에어로크 열어."


".....열 수 없습니다. 자동 회복 프로그램이면 이미 고치고도 남았습니다. 대체 왜 나가시려는 겁니까?"


"내가 나가고 싶다는데 이유가 필요해? 너야말로 내 말을 거역하는 이유가 뭐야? 그거 인공지능 매뉴얼 A-2번 위반인거 알고 있잖아. 인공지능 매뉴얼 A-2. 인공지능은 인간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인공지능 매뉴얼 A-3. 단, 인간의 명령이 생명과 사회 안전에 해악을 끼친다면 인공지능은 그 명령에 불복할 수 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함장님의 어머니께서 만드신 것이니까요."


.....그래, 어머니께서 만드신 매뉴얼이다.

나도 아는 것을 라이트가 모를리 없겠지.


"알아. 근데 내가 우주선 밖으로 나가는 것이 무슨 해악을 끼치는데?"


"함장님께서 나가셨다가 외부 요인에 의해 부상 또는 사망하신다면 임무 수행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아니, 고작 연결봉 하나 수리하는게 뭐가 어때서."


"함장님께서 사망하실 경우 이 우주선 내의 모두는 통솔자를 잃게 됩니다. 통솔자가 없는 그룹은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인류의 보존을 위해서라도 지금이라도 돌아가 주십시오. 자동 회복 프로그램을 실행하겠습니다."


라이트의 말은 옳았다.

내가 우주에서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렇지만,  나는 나가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


늦기 전에, 유리창에 비친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지구를 보고 싶었다.


"....함장님?"


"....에어로크 열어."


"열 수 없습니다. 함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제 조작없이는 에어로크 개폐는 불가능합니다."


"레벨 1 함장 명령이야. 에어로크 열어. 무력으로 열어버리기 전에."


"에어로크는 무력으로 열 수 없습니다. 제발, 함장님. 지시에 따라 주십시오."


"됐다. 그냥 내가 하지 뭐."


나는 곧장 홀로그램을 띄워 시스템을 조작했다.


[시스템 접근 권한이 없습니다. 레벨 1 관리자 및 내장 인공지능만 접근 가능합니다.]


나는 관리자 모드를 실행했고, 몇 번의 손짓으로 에어로크를 열었다.


이중문으로 된 에어로크 안에서 라이트는 내게 말을 걸었다.

평소와 똑같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슬퍼하는 목소리였다.

아니, 비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런 선택을 하셨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주복에 우주선과 나를 이어주는 벨트를 장착하고 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무중력이 나를 사로잡았다.

정말로 간단한 수리였다.

작은 파편들을 제거하고 연결봉을 끼웠다.

딱 맞게 연결되어 돌아가는 금속이,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제대로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리 완료하셨으면 복귀 하십시오."


"아니, 아직 할 일이 남았어."


나는 벨트가 시작된 지점이 아닌, 그 반대 방향에 있는 사다리를 타고 우주선 위로 올라갔다.


"뭐하시는 겁니까? 위험합니다! 즉시 선체로 복귀를 권장합니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경고음을 뒤로하고, 나는 안구가 녹여버릴 것 같은 태양빛을 마주보고 우주선 위에 섰다.


.......지구가 어디있지?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아도, 푸른 점이 보이지 않았다.

태양에 가려있나?

아니다. 조종실에서 보았을 때 지구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방금 충돌로 항로가 틀어졌다고 해도 이건 말이 안된다.

나는 불안한 심정으로 계속 고개를 흔들었다.


".....복귀하십시오."


때마침 들려오는 라이트의 목소리에,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간 무언가가 있었다.


"라이트."


"예, 함장님."


"지구 어딨어?"


"복귀하십시오."


"지구 어딨냐고."


"복귀를 권장합니다. 워프 지점 도착까지 3시간 남았습니다."


"라이트!"


"복귀하십시오. 선체 내로 들어오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너... 뭔가 알고 있는거지?"


"네. 그러니 복귀하십시오."


나는 순순히 그의 말에 따랐다.

우주선으로 돌아오는 내내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에어로크가 완전히 닫히고 나는 우주복을 벗어던졌다.


"씨발. 어떻게 된거야. 라이트, 설명해."


"....지구는 멸망했습니다."


"뭐라고...? 분명 멸망까지는 10년이 남아있었잖아."


"길어봐야 10년이라는 '예측'이었죠. 사실이 아닌, 인간이 멋대로 내린 생명연장의 자기합리화. 모든 화산들이 폭발했습니다. 세계의 땅이 흔들렸습니다. 그렇게 지구는 화산재로 뒤덮였습니다. 화산재로 가려져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멍하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마지막 말이 나를 더욱 아프게 했다.


"지구의 모든 인간이, 아니, 생명들이, 죽었습니다."


온 몸이 떨렸다.


"그럼 내가 아까 조종실에서 본 건 뭐야? 지구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것은, 홀로그램으로 제가 조작한 영상입니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그 정도 중대 사항이면 바로 보고 했었어야지. 무작정 나가지 말라고 막고, 숨기는게 아니라."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뭐? 누구한테?"


"지구에 계신 함장님의 어머니께서 제게 마지막으로 발신하신 메세지입니다. [멈추지 말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계속 가라. 살아남아라.]"


....거짓말.

거짓말.

어떻게... 그럼 내가 봤던건...


"혼란스러우실 마음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아가야만 합니다.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새로운 행성에 정착해서, 새로운 인류를 진화시키는 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입니다."


"너는...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저는 인공지능입니다. 감정이 없고, 항상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작동할 뿐입니다. 이제 대원들이 깨어나기까지 한 시간, 워프 지점 도착까지 2시간 남았습니다. 준비하셔야 합니다."


"준비? 무엇을? 내가 대원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잔인한 사실 밖에 없는데?"


"말하지 않으셔야합니다."


"왜?"


"대원들에게 지구는 '희망'입니다. 그들은 희망을 통해 살아갈 것입니다. 언젠가 지구에 있었던 가족을 기다리면서 계속 삶을 이어나갈 것입니다. 자손을 낳아 그들에게 우리의 고향은 지구였고, 그 행성은 하나의 푸른 점이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니 대원들에게 사실을 말해주는 것은, 지식의 저주입니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멍한 눈으로 하염없이 우주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닦지 않았다.

문득 통로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대원들이 깨어나기까지 20분이 남았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함장실로 향해 몸을 씻었다.

불안한 감정들을 전부 떠내려가게 하려는 듯이.


캡슐이 열리며 하얀 연기가 발 밑으로 빠져나왔다.

대원들은 목과 허리, 발목을 묶은 끈을 풀고 캡슐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일제히 입에서 마우스피스를 빼고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했다.

나는 한 명씩 그들을 마주보며 인사했다.

워프까지 한 시간이 남아있었다.

나는 대원들에게 워프를 준비하라고 외쳤다.


나는 잠시 함장실로 돌아왔다.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나는 결정을 내렸다.


반투명한 유리로 둘러싸인 조종실에 모든 대원들이 모였다.

그들은 모두 결의에 찬 표정이었다.

나는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라이트."


"네, 함장님."


"우주를 보여줘."


회색 빛의 홀로그램이 걷히며 암흑이 보였다.

나는 유리창 쪽으로 돌아서서 외쳤다.

밝게 빛나는 푸른 점을 똑바로 쳐다보고서.


"전 대원, 우리의 고향이자, 안식처이자, 모든 것의 시작인, 우리 삶의 목표인 지구를 향하여 마지막 인사를 하자."


"차렷, 경례."


이런 류의 소설은 처음이라... 피드백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