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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질 수 있기를




 애증이란 단어의 깊이를 실감하게 될 때쯤 목사님이 돌아가셨다.

 

 정확하게는 어머니와 함께 수발을 들어 드리던 목사님이 돌아가신 것이다. 처음엔 금방 나아지실 것이라는 희망으로 시작된 어머니의 작은 간호였으나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는 목사님의 건강에 결국 그저 간호가 아닌 병수발로 바뀌게 됨으로써 목사님은 우리 집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하셨다.

 

 아무리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신 존경하던 목사님이라 해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다. 그렇다 할 정도로 종교에 심취한 집안도 아니었기에 목사님을 돌볼 이유도 여력도 없었다. 그러나 목사님을 선뜻 돕겠다는 가족이 없다는 사연은 우리 가족에게 계속해서 연민을 느끼게 했고 끝내 목사님을 포기하지 못했던 우리집은 활기찼던 일상을 포기하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 터널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점점 어두움과 막막함에 익숙해졌다.

 

 병자를 포기하지 않는 대가는 혹독했다. 시간이 지난 지금도 병수발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힘들고 고통스러운 감정이 마음속에서 일렁인다. 그러나 목사님과의 생활 중 가장 마음 깊은 곳까지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이었다.

 

 종종 새벽에 발작을 일으키신 탓에 놀란 마음을 안고 응급실에 가게 되는 날에는 대기실에서 말없이 울며 기도하시는 어머니 손을 맞잡아 드릴 뿐이었다. 밤을 새우고 한참을 기다린 결과는 매번 같았다. 의사의‘버텨보자’라는 말 한마디와 희미하게 꺼져가는 삶을 아주 조금이나마 더 연명하기 위한 알약이 수두룩한 약 봉투뿐.

 

 요양병원을 매번 권하는 의사 덕분에 요양병원이란 곳이 말 그대로 요양하러 가는 곳이 전혀 아닌 마지막을 준비하는 곳이란걸 알게 된 때이기도 하다. 뻔한 결말을 알면서도 매번 새벽잠을 깨워 병원으로 향할 때의 기분은 쉽사리 적응되지 않았다. 그러나 응급실에서 주사를 맞고 조금은 안정된 목사님의 모습을 볼 때면 혹시 모를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곤 했다. 그러나 이렇게 잠시 타오르는 희망이 결국 잿더미만 남은 마음에 작은 지푸라기를 던지는 것뿐이란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으신 목사님을 겨우 부축하여 차에 태운 뒤 어두운 새벽 도로를 달리며 집으로 돌아올 때면 앞자리에 누워 자는 불쌍한 노인에 대한 측은한 마음보다는 언제 이 고생이 끝나려나 하는 짜증 가득한 마음만 느껴지곤 했다.

 

 정정하실 때의 목사님은 박식하셨고 카리스마가 넘치셨다. 그런 모습만 나의 기억 속에 남은 탓이었을까. 그저 병든 노인의 모습을 한 목사님이 매일 같이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아프다며 고함을 지르고 약이 뜨겁다며 투정을 부릴 때는 결국 참지 못하고 목사님께 소리를 지르곤 했다. 그렇게 말도 편하게 하지 못하시는 목사님에게 소리 지르고 뒤돌아 갈 때면 목사님은 그저 희미한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말만 한 채 방으로 들어가 주무셨다.

 

 그렇게 미안함과 짜증이 공존하는 생활이 계속되던 어느 날 목사님께서 본인도 유튜브를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처음엔 터무니없는 소리라 생각하여 무시했지만 계속해서 졸라대는 목사님을 힘껏 부축하여 의자에 앉힌 뒤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누르자 신기하게도 병에 신음하던 노인은 사라진 채 젊은 시절의 낭낭한 목소리와 강한 총기를 띈 눈으로 자신의 지식과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내겐 어려운 철학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기에 큰 관심을 두진 않았으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할 때의 힘찬 목사님의 모습은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촬영을 마치자 어김없이 힘겨워하시는 목사님을 침대에 누여드리고 당시 유행하던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 드렸다. 그렇게 평소와 다름없이 희미하게 눈을 뜨시고 방송을 보시는 목사님의 모습을 뒤로하고 잠에 들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차갑게 식은 목사님의 손을 잡게 될 뿐이었다.


 그게 마지막 모습일 거라고 누가 알 수 있었을까. 여느 사람들처럼 멋진 유언이라도 남기고 떠나실 거라 막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인 걸까. 작은 예고조차 없이 찾아온 이별에 그제서야 목사님의 가족들이 찾아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목사님이 너무 그립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장례식장을 가득 이루었다. 그러나 목사님이 떠나가신 직후부터 계속해서 자기 탓이라고 오열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자 사람들이 진정 필요할 때는 다들 바쁜 척을 하더니 이렇게 되고 나서야 거짓된 위로만을 남긴다는 원망이 들었다.

 

 그런 착잡한 마음 때문일지 삼일장을 치르는 내내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사실 눈물이 나오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평소에 죽음이란 것이 끝이 없는 끝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미 끝난 이별에 슬퍼하며 눈물 흘려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 스스로가 너무나도 냉혹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남겨진 목사님의 가족들을 보며 결국엔 서로 타인일 뿐인 목사님을 담담히 마음에 묻은 채 시간을 속절없이 흘려보냈다.


 그렇게 목사님이 떠나신 지 삼 년쯤 지난 지금은 목사님을 알던 사람들을 만나거나 심지어 어머니와 만나게 되어도 목사님의 얘기를 하지 않는다. 굳이 기억을 되살리려 하거나 이야기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현실과 싸우기에 바쁜 탓일지 우리 가족을 포함한 남겨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목사님의 이름은 점점 흐릿해질 뿐이었다.

 

 그렇게 목사님과의 기억은 그저 옛일 정도로 생각하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도중 도서관 신작 소설 칸에서‘남겨진 이름들’이란 소설이 눈에 들어왔다. 제목만 보았을 때는 조난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라 생각하여 단순히 재미를 위해 빌려보게 된 책이다. 그러나 책을 펼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먼 타국을 배경으로 하여‘탄생과 이별’이라는 주제를 선선히 전달하는 책인 것을 알게 됐기에 자세를 고쳐잡고 빠져들어 가게 되었다.

 

 책에서‘윤’이란 이름의 주인공은 키르기스스탄 유학생 시절의 친구 ‘우징’으로부터 유학 시절 신세 졌던 하숙집의 주인 ‘라리사’의 부고를 듣게 된다. 그런 라리사는 유언과 함께 세 권의 공책을 윤에게 보낸다. 공책은 윤이 전혀 알지 못했던 라리사의 수양딸 ‘나지라’가 두서없이 적은 나지라 본인의 삶에 대한 기록이었다. 평소 글을 즐겨 쓰는 윤을 기억한 라리사가 나지라의 이야기를 읽어보기를 부탁한 탓에 윤은 키르기스스탄어로 적힌 나지라의 이야기를 한국어로 번역하게 된다. '한 사람의 삶이 온전히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내용과 함께 윤이 번역하는 나지라의 이야기는 글을 읽는 우리에게 자연스레 전달된다.

 

 이야기의 초반 나지라는 아는 지인들을 만나지만 자꾸 사소한 것들을 잊어버리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 사소한 기억들부터 진정한 자신만의 기억이라 할만한 기억들조차 잊어가며 점점 자신을 상실해 간다. 그렇게 점점 희미해지는 중요한 기억을 붙잡기 위한 목적으로 사 년 동안 자신이 입주간병인으로서 도움을 준 카탸와 쿠르만에 관한 이야기를 공책에 적어나가게 된다.

 

몇 년 전 불의의 트럭 사고로 인해 전신 마비가 된 카탸, 그리고 그런 그녀를 돌보는 남편 쿠르만은 간단한 소통조차 눈을 깜박이는 것으로만 할 수 있는 그녀임에도 진심으로 사랑해 준다. 그는 매일 성심껏 그녀를 돌보며 언젠가 다시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그녀의 모습을 상상한다. 

 

 카탸의 간병인으로 일하는 나지라 또한 다양한 상실과 상처를 겪어 흔들리는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묵묵하게 카탸를 돌봄과 동시에 종종 지쳐가는 쿠르만을 지탱해 준다. 서로를 깊게 사랑하지만 소통할 수 없는 부부의 진심 어린 마음을 연결해주는 중간 역할도 하며 덤덤히 감정을 죽인 채 부부와 함께 일상을 보낸다. 

 

 그러나 끊임없이 카탸를 사랑하고 소통하려는 둘의 노력과는 다르게 점점 숨이 막혀 오는듯한 길고 긴 싸움은 그들을 서로가 서로에게 갇힌 존재가 되어가게끔 한다. 매일 달라지는 것이 없는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예전의 카탸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은 점점 멀어져 갔고 그저‘오늘도 별 이상 없었다.’라는 의사의 말을 듣기 위한 반복 속에서 쿠르만은 이따금 포기를 생각하게 된다. 나지라 또한 점점 자신이 진정 알고 있던 자신인지에 대한 확신을 잃게 된다. 그렇게 카탸로부터 남겨진 둘은 그저 카탸의 옆을 지킬 뿐인 매일을 맞이한다.

 

 그러나 끝내 카탸는 서른이라는 나이에 쿠르만과 나지라를 남겨 두고 영원한 이별을 고한다. 그런 카탸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며칠 동안 둘은 슬퍼하는 법을 잊어버린 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그녀를 떠나보낸다. 그저 카탸와의 이별 앞에 선 둘에겐 살아생전 아름답던 카탸의 모습만이, 그리고 카탸가 사랑했던 둘의 모습만이 그들의 가슴속에 생생하게 그려지게 될 뿐이었다. 

 

 그렇게 남겨진 둘은 카탸의 죽음을 통해 탄생과 사랑 그리고 이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죽음과 이별이란 단어의 의미를 선연히 느끼게 된다. 언제 다가올지 알 수 없는 이별을 준비하던 매 순간들이 결국 카탸를 떠나보낸 후엔 그녀를 기억하는 이야기가 되었음을 알게 되며 둘의 마음속엔 카탸가 더욱 깊이 남겨지게 된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게 된 나지라는 지난날 겪었던 상실의 아픔들과 자신의 망각으로 인해 쓸쓸히 남겨지게 될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천천히 적어 내려가게 된다. 그렇게 적어 내려간 나지라의 공책은 처음엔 단순히 희미해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한 기록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자아를 잃어가며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던 나지라에게 그러한 기록의 시간들은 나지라로 하여금 결국 자신만의 이야기가 진정한 자신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며 이야기는 끝난다.

 

 서문에 있는 라리사가 윤에게 보낸 편지에‘이야기는 살아가고, 어떻게든 우리 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니.’라는 대목이 나온다. 생전 나지라를 본 적 없는 윤에게, 그리고 이야기를 읽는 우리에게 소설은 분명 허구임을 알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서 나지라는 어떤 모습과 이야기로 숨 쉬게 될까. 

 

 이야기 속 나지라의 모습에 흠뻑 빠져 있을 때면 잊고 살아가던 목사님과의 생활이 투영되어 머릿속에 자꾸만 맴돌았다. 말 그대로 끝이 없는 싸움을 계속하며 희망보다는 절망이, 사랑과 헌신보다는 애증이란 단어의 깊이를 알게 하던 그날들이 점점 선명해졌다. 책 속의 나지라처럼 내가 적어 가야 할 이야기는 과연 무엇일까. 나란 사람은 어떠한 이야기를 가진 채 살아가야 진정한 나를 마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덮으며 천천히 그 시절을 회상하자 사실 나의 기억 속에 남겨진 목사님은 그저 타인이 아니었음을 느끼게 되었다. 병마를 이겨내고 건강을 되찾으시길 간절히 기도하던 나의 모습이 진정 내가 기억해야 할 나 자신이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됐다. 그러나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탓일까. 힘겨운 시절과 순간들이 계속해서 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쌓이고 쌓인 탓에 목사님의 죽음을 마주했던 순간에도 쿠르만과 나지라처럼 눈물 흘리는 법을 잊게 되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초연해진 마음을 가진 채 당시에는 전혀 마음 가지 않았던 목사님의 유튜브를 찾아보게 되었다. 가장 처음으로 녹화하신 영상의 제목은‘천당과 지옥에 관하여’였다. 그렇게 매일 죽음 앞에서 전전긍긍하시던 목사님이 선명한 모습으로 담담하게 죽음 이후를 설명하는 모습을 보니 과연 당신께서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하고 열 개 남짓한 영상들을 훑어보게 되었다. 

 

 계속해서 영상을 보게 될수록 목사님 뒤로 보이는 우리 집의 책상, 그리고 목사님의 휴양을 위해서 잠시 빌리게 되었던 산골의 주택. 예전 그 모습들을 보니 그때의 기억들이 선연히 떠오르며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사실은 누구보다도 간절히 목사님이 돌아가시기를 바라지 않았던 나의 모습과 진정한 기억들이 영상 속 목사님의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제야 장례식에서조차 흐르지 않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 속 깊은 곳에 몰래 잠가 두었던 나의 진짜 모습을 기억해내기 시작한 것일까.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떡볶이를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시던 목사님의 모습과 이를 터무니 없다는 듯 바라보던 나의 모습이 엮어지며 단지 미뤄놓았을 뿐인 모든 기억과 벅찬 감정들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게 힘들던 순간에도 분명히 환하게 빛나던 순간들이, 그리고 매일 함께하며 나눴던 이야기들이 사실은 목사님과의 이별을 통해 더욱 아련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단 것을 알게 되며 마음속 깊은 응어리들을 씻어 내렸다. 

 

 목사님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에게 목사님은 어떤 기억이며 이야기로 남아 있을까. 우연히 서로를 알게 되는 첫 만남에서부터 쌓아가던 이야기들이 마지막을 향해 달려 나갈 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서로의 끝을 맞이해야 하는 것일까. 

 

 죽음과 이별이 단지 끝이 없는 끝이라고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생의 마지막이 단지 허무함만 남는 끝은 아닐 것이다. 이별을 겪으며 함께 쌓아온 기억과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더욱 선명해지고 깊이 있게 느껴질 때 우리 모두의 이야기는 서로의 가슴 속 깊은 곳에 남아 잊어왔던 그리움을 기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직은 나를 모르는 그대가 나의 이야기를 읽어 나갈 때 세 글자의 이름이 소개하는 이야기는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 그대를 이루는 수없이 많은 기억의 조각 중 작디작은 이야기로 써 내려간 나의 진심이 그대를 이루는 하나의 조각으로 남겨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