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첩방은 남의 나라라 했던가마유미는 오늘도 언뜻 들었던혹은 읽었던 한마디를 떠올렸다본인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사람들길거리글 한 줄이나 노래 한 소절까지 전부 지금의 그녀에게는 남의 나라 일이었다도대체 누가 이런 말을 떠올렸을지 생각해보며책상에서 슬쩍한 마유키 언니의 담배 한 대를 물고 저녁노을을 올려다보는 그녀였다.


  「담배 도둑이 너였구나?


  마유미는 눈 한 번 찡그리지 않은 채 왼쪽을 흘깃했다. 노을만큼이나 얼굴이 붉어진 젊은 남성이 빈 녹색 유리병을 그러쥔 채 앉아있었다. 연기 섞인 한숨이 마유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도둑이라니요, 이제 내 건데.


  그러면 오빠는 술 도둑이게요, 마유미가 아무렇게 뱉은 한마디가 혁수의 웃음보를 터뜨렸다. 둘 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도무지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는 상태였다. 알코올 냄새 풍기는 웃음을 그친 혁수가 대꾸했다.


  「두고 갔으니 이제 내 거지. 네 담배처럼.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은 마유미는 산 뒤로 숨는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새 다른 병을 연 혁수도 그녀의 시선 끝을 좇았다.

 

* * *

 

  새벽이 되어서야 혁수가 눈을 떴다. 그의 희뿌연 시야 너머에는 마유미의 심드렁한 표정이 있었다. 마유미는 말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혁수의 얼굴 위로 수건을 던지고 베란다로 갔다.


  「소리 좀 그만 질러요. 방음 잘 안되는 거 알면서.


  끙 앓는 소리를 낸 혁수는 수건으로 얼굴을 문댔다. 꽤 잤는데도 어지러웠고, 뺨은 얻어맞기라도 한 듯 얼얼했다. 그가 다시 누워 대자로 뻗으니 베란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언제까지 여기서 잘 거예요? 안 그래도 좁아터진 방인데.


  혁수는 목이 잠겨서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떠오르는 대로 입에 올리는 게 그의 천성은 아니었지만, 지금이라면 정말로 아무 말이나 내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치 구리 뱀을 올려다보던 유대인처럼 냉장고 쪽으로 고개를 돌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온 음료 쪽으로 향하던 혁수의 떨리는 팔이 돌연 술병 쪽으로 뻗치자, 그를 지켜보던 마유미는 담배를 문 채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술병을 빼앗더니 혁수를 깨울 때처럼 뺨을 후려갈겼다. 다다미 석 장짜리 방에 돌연 정적이 찾아왔다.


  「―」


  먼저 입을 연 건 혁수였다. 그는 마유미를 밀치려다 말았다. 한순간 마유키를 봤기 때문인지, 마유미의 뺨에 그려진 자국을 보았기 때문인지 혁수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그가 희번덕거리던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고 나서야 마유미는 베란다로 돌아갔다.


  「속 나아지면 뭐라도 먹어요. 면도도 좀 하고.


  얌전히 음료수로 목을 축인 혁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옆집으로 돌아갔다. 마유미는 담배를 외벽에 비벼 끄고서 아직 따뜻한 이부자리에 드러누웠다. 거기에 남은 건 혁수의 체취와 온기였지만, 그녀는 그 안에서 마유키의 흔적을 더듬고 있었다.


  「언니는 뭐가 좋다고 저런 남자를.


  언니도 없는데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라지, 마음에도 없는 말을 중얼거린 마유미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눈부신 백열등에는 헤실거리면서 담배를 건네주던 마유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밤이면 밤마다 술과 담배에 절어서는 집안을 엎던 사람이, 혁수를 만나고 나서 완전히 바뀌었음을 느낀 순간이었다.


  그렇게 달라진 언니가 혁수를 지키려다 철로에 떠밀리기까지 했다. 이 사실이 마유미에게는 언니의 희생이 아니라 혁수의 실패로 다가왔다. 게다가 며칠째 술만 마시고, 언니가 자던 곳에 누워있기나 하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혁수가 들어오면서 마유미의 생각도 멈추었다. 또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틈도 없었다. 무덤덤한 혁수의 표정 아래 왼쪽 턱에 길게 그어진 상처가, 드문드문 묻은 면도 크림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술 마시고 면도칼 쓰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어요!


  마유미의 입만큼이나 손도 다급했다. 마유키의 서랍 안 구급함을 열어, 거즈나 연고 같은 걸 꺼내 혁수의 상처를 닦고 싸매는 동안에도 그녀의 입은 쉬질 않았다. 여러 약품과 피 냄새에 채 가시지 않은 술 냄새가 섞였다.


  「언니가 사준 전기면도기 두고 무슨 짓이에요? 그거 쓸 면목이 없다고 자각은 하고 있나 봐요? 그냥 솔직하게 말해요, 죽고 싶다고! 멍청하게 멍때리다가 손 놓친 것처럼 등신같이 스스로 그어서 확 죽어버리고 싶었다고!


  언니가 살려준 목숨 또 함부로 해봐요, 그리 덧붙인 마유미는 혁수의 정강이를 차 넘어뜨리고 풀썩 주저앉았다. 뒤로 넘어진 혁수의 미안하다는 중얼거림은 누구를 향한 사과인지 알 새도 없이 마유미의 훌쩍임에 묻혀 사라지고 말았다.

 

* * *

 

마유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바닥에 쪼그려 앉아있었다는 게 그녀의 마지막 기억이었지만눈을 뜬 곳은 제 이부자리였다눈을 비비고 주위를 둘러보니 혁수는 온데간데없고 그녀 혼자만 남아있었다.


가느다란 하품과 함께 몸을 일으킨 마유미는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아직 김이 올라오는 스파게티 한 접시 옆에 작은 메모지가 있었다담배 사 올게삐뚤빼뚤 적힌 글씨가 그녀의 시큰둥한 표정을 아주 잠깐 바꿔놓았다.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스파게티를 조금씩천천히 먹던 마유미의 눈길이 갑자기 벽에서 현관으로 옮겨갔다혁수가 전화하면서 들어왔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그의 목소리에 술기운이 서려 있지 않았다술에 절어있던 그가 갑자기 괜찮아진 이유를그녀는 달력 오른쪽 아래에 그려진 하트 표시를 통해 짐작할 뿐이었다.


햇빛이 들어오는 방에는 혁수의 말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마유미는 겨우 알아듣는 두세 단어의 한국말을 머릿속에서 엮으면서그의 손에서 쇼핑백을 낚아채듯 가져갔다안에는 담배 열 갑과 함께 포장지로 꼼꼼히 감싸인 상자 하나가 들어있었다.


이게 뭐예요?


미소를 머금은 혁수는 자신을 올려다본 마유미의 눈을 잠깐 바라볼 뿐이었다눈살을 찌푸린 마유미가 상자를 꺼내 들었다적당한 무게감과 함께 상자와 포장지 사이에 있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테이프를 긁어 떼어내고는 포장지를 펼쳤다.


전화 잠깐 멈춰봐요곧 돌아가는 건 알고 있는데뭐라고 이런 걸 줘요?


마유미는 혁수의 오른팔을 붙잡았다그는 잠시 귀에서 휴대전화를 떼고 단어 하나를 입에 올렸다마유미로서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그녀는 무슨 말을 덧붙이지도 못한 채 다시 상자로 시선을 돌렸다언젠가 언니에게 가지고 싶다고 넌지시 말했던 휴대전화였다상자 아래에는 작은 연두색 카드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


마유키가 공항에서 줄 거라고 했는데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어느새 전화를 마친 혁수가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마유미를 내려다보았다툭 떨어진 눈물이 카드를 적셨지만글자가 번지거나 지워지지는 않았다마유미는 내용과 전혀 맞지 않는 날렵한 글씨를 소리 내어 읽다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마유미의 울음이 잦아들 즈음 빈정대는 투의 한국말과 함께 그녀의 머리 위에 따뜻한 손이 얹혔다생일 미리 축하해혁수가 마유키 몫까지 건넨 한마디에 그녀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 * *

 

  어느새 혁수의 귀국일이 성큼 다가왔다. 그가 집 청소를 마무리하는 동안, 마유미는 베란다에서 담배를 문 채 눈으로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녀의 집과 같은 크기인데도 짐을 싹 빼니 꽤 넓어 보였다. 나라면 대충 했을 텐데, 픽 웃으며 중얼거린 그녀는 담뱃재를 베란다 바닥에 털었다.


  「그걸 거기에 털면 어떡해?


  혁수가 양손을 제 허리춤에 얹었지만, 마유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대를 그의 입에 물렸다. 이거 피우고 진정하라는 말과 함께 그녀가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자 그는 입꼬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연기를 한 모금 빨았다 뱉은 마유미는 시선을 바닥으로 옮겼다. 아직 비우지 않은 재활용 상자가 그녀의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곧장 혁수의 옆구리를 두어 번 찔렀다.


  「뭐야, 면도칼 버렸네요?


  마유미는 옆구리를 가린 혁수의 손을 치우더니 몇 번 더 찌르고는 키득거렸다. 혁수는 입술 사이에서 튀어 나가려는 담배를 두 손가락으로 잡고서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요, 요즘 저런 거 누가 쓴다고.


  얼마간 이어지던 침묵을 깬 건 마유미였다. 이젠 다쳐도 치료해줄 사람 없겠네요, 그녀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혁수의 손날이 마유미의 정수리를 톡 쳤다.


  「전기면도기 쓰는데 다치기나 하겠어?


  다 피운 담배를 비벼 끈 혁수의 옆구리에 또다시 마유미의 손가락이 닿자, 그는 웃으면서 방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곧이어 마유미가 헤실거리는 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입을 채 다물지 못하던 그는 곧바로 눈을 돌렸다.


  「맞다, 내년 기일에는 내가―」


  「오지 마요, 내가 갈 거니까.


  언니가 못 가봤으니 나라도 가봐야죠, 그리 덧붙인 마유미는 혁수를 등지고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잠시 그녀의 등을 바라보던 혁수는 그대로 드러누워, 마유미 머리 위에 걸린 해를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