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16일, 김영수 총재 제명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분노가 부산에서 터졌다. 부산대학교에서 시작된 시위는 고신대, 동아대로 퍼졌고, 어느새 마산까지 퍼졌다. 파출소와 방송국은 불타고, 시민들의 분노는 그칠 줄을 몰랐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가 터지자, 당연히 청와대에도 빨간불은 들어왔다. 박준희는 즉시 김경원 비서실장, 차승철 경호실장, 정성하 참모총장, 전두한 보안사령관과 함께 나를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김 부장!”


청와대에 들어오자마자 들리는 호통에 차마 표정을 찌푸릴 뻔했다. 아마 또 부마항쟁에 대한 책임론을 중정에다 덮어씌우려는 것이겠지. 나는 목을 가다듬고 이야기했다.


“각하, 부산대는 원래 데모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 부산대 학생들마저 움직였을 정도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김영수 총재 제명을 철회하고 시위대들을 진정시키는 게 어떨까 합니다.”


그러자 차승철이 고함을 쳤다.


“각하, 부산, 마산까지 빨갱이들이 진을 쳤습니다. 계엄령 선포하시고 밀어버려야 합니다.”


“참모총장은 어떻게 생각해?”


박준희가 정성하에게 물었다. 정성하 총장은 한참을 고민하더니만 조심스럽게 건의했다.


“아직 상황을 봐서, 군이 움직일 상황은 아닐 듯합니다, 각하. 경찰들을 먼저 투입하는 게 낫다고 봅니다.”


그러자 전두한이 말을 이었다.


“각하, 계엄령을 선포하고 1공수를 투입하시면, 진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


“각하, 계엄령을 선포하셨다간, 부산에서 마산, 잘못하면 양산까지도 번집니다.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평화적으로 해결하셔야 합니다.”


“김 부장, 안 될 게 뭐 있어? 군대가 뭐 보통 힘이야? 각하, 탱크로 밀어버리시지요.”


박준희는 고민에 빠진 듯 줄담배를 태우고 있다. 그러나 나는 박준희가 내릴 결단이 무엇일지 안다. 실제 역사에서 박준희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자칫하면 발포 명령까지 내릴 준비를 마쳤으니까. 박준희는 담배를 몇 개비 더 피우더니만 재떨이에 담배를 비빈 후 말했다.


“계엄령 선포해, 그리고 1공수, 3공수를 보내서 진압해.”


청와대를 나와 차를 타니 박형준이 내게 말했다.


“부장님, 미 대사관에서 부장님을 찾으십니다.”


“그래, 그쪽으로 가지.”


“…그래서, 김형돈 전 중정부장이 실종된 것에 대해서 중정 측에서는 아는 바가 없다… 이 말이십니까?”


주한미국대사, 리처드 윌리엄스가 내게 물었다.


“차승철 실장이 요즘 각하의 신임을 얻으려고 난리입니다. 김형돈 부장도 그 대상이었겠죠. 중정에서는 개입한 적이 없습니다.”


“하… 요즘 워싱턴에서 난리입니다. 이성윤 주불 공사도 엮여있다는 의혹이 있다면서요? 차승철 실장이 주불 공사까지 움직입니까?”


“차 실장의 월권행위를 저도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저보다 상관인 줄 알아요.”


리처드가 내게 라이터를 건넸다. 나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한참 태우다가 리처드가 입을 열었다.


“부산은 또 왜 그런답니까? 박 대통령, 더는 미국이 주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막 나가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죠. 곧 상황이 바뀔 겁니다.”


“정말입니까?”


“물론요, 저만 믿어주십시오.”


미 대사관을 나오자 박형준이 내게 물었다.


“부장님, 어디로 갈까요?”


“박 대령, 헬기 준비해서 부산으로 가자.”


부산 상공을 헬기에서 내려다보니, 부산이 불타고 있다는 말이 과연 적절했다. 그러나 박준희, 차지철이 주장하는 북괴, 빨갱이들이 아닌 그저 시민, 학생들만이 있었을 뿐이다. 한편, 무전으로는 중정 요원들의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다.


“학생, 시민들의 저항이 거셉니다. 현재 시위는 부산을 넘어 마산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그래. 차승철 이 미친 새끼가 섣불리 군대만 보내지 않았어도 이리 힘들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아무튼, 시위대의 요구는 김영수 총재의 복귀와 유신 정권의 퇴진입니다.”


박준희가 저 두 요구 중 하나라도 들어줬다면 이 사달이 나지는 않았겠지. 그러나 그 늙다리는 전혀 들을 생각이 없었다. 부산이 불타든, 마산이 불타든, 그저 군대로 다 쓸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79년 10월 26일 김현규가 박준희를 쏴 죽이지 않았다면, 1980년 전두한의 광주 학살 때보다도 더 큰 학살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심에 빠져있던 찰나 중정 요원이 한마디를 거들었다.


“부장님, 상황이 4·19 때랑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었다간 서울까지 위험합니다.”


“…그래, 내가 각하를 다시 한 번 설득해보지.”


10월 20일, 청와대에서 다시 한 번 회의가 열렸다.


“김 부장, 부산 상황 어때? 조용하지?”


“폭도 집단보단 학생과 시민이었고, 시위는 더욱 격화되어 마산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뭐?”


“각하, 계엄령을 해제해주시고, 김영수 총재를 복귀시켜주십시오. 그렇게만 하면 저자들 다 멈출 것입니다.”


“야 임마, 김 부장!”


차승철이 나를 향해 고함을 쳤다. 나도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차승철에게 소리를 쳤다.


“차 실장은 뭘 잘했다고 그렇게 당당하오? 원래 이 시위는 부산에서 끝낼 수 있었소. 차 실장이 막가파처럼 막 나가려고 하니까 저 사람들도 들고일어나는 거 아니오?”


“빨갱이들 때려잡는 게 뭐 잘못됐어? 김 부장 보면 참…”


“그만들 해!”


박준희의 고함이 청와대를 때렸다. 저 늙은 노인네, 무슨 말을 하려는 지 곧 예상된다. 차승철을 두둔하며 발포 명령을 내릴 각오를 했다고 밝히겠지. 박준희는 담배를 뻑뻑 피우더니 입을 열었다.


“김 부장, 차 실장이 막가파면 그 말을 들은 나도 막가파겠네?”


“아닙니다, 각하. 단지…”


“경찰서에 불을 지른 이상 다 폭도들이야! 시위가 마산으로 번졌다고?”


“각하, 캄보디아에선 300만 명도 희생했습니다. 우리가 한 200만 명 민다고 그렇게 문젯거리가 될 거 없습니다. 탱크로 밀어버리시죠.”


나왔다, 전설의 그 발언. 그렇게 빨갱이를 싫어하는 양반이 크메르 루주 그 빨갱이들이 저지른 학살은 지지하는지 원. 그렇지만 박준희가 이런 정신나간 발언을 걸러 들을 정신상태가 아니었다. 유신 헌법이 가져다준 초월적인 권력에 취해 막 나가던 시절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박준희가 입을 열었다.


“곽 실장 말이 맞아. 자유당 때는 곽용진이 발포 명령을 내리고 사형을 당했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누가 나를 사형시키나?”


누가 자기를 사형시키느냐고? 나다. 6일 뒤 죽을 양반이 미래는 모르고 자기는 천년만년 해먹을 수 있을 거라 상상하는 꼴을 보니 가소롭다. 전두한, 차승철 이 두 사람은 내가 거의 박준희에게 아무 말도 못한 것처럼 보인 꼴이 우습다 듯이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결국 속으로 웃을 수 있는 것은 나일 것이다. 전두한과 차승철도 결국 내 거사를 마친 후에는 사라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