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 사각- 캔버스 위로 연필이 움직인다. 울적한 저녁이다. 또한 갑자기 영감이 샘솟는 저녁이기도 하다. 살짝 열어둔 창문의 틈으로, 바람이 옅은 황혼을 싣고 살금살금 들어온다. 선선한 어둠의 향기가 콧속으로 스며든다.

 캔버스 위에 점차 아리따운 여성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게 아니다. 샘솟는 영감의 형상은 이게 아니다. 바람이 창틀에 걸어 놓은 십자가를 두드리며 들어온다. 십자가와 울적한 기분이라, 예술적 욕구를 충족시킬 무언가가 떠올랐다.

 이젤에서 캔버스를 치운다. 여성의 그림은 바닥에 떨어졌다. 새 캔버스를 들고 와 이젤에 얹혀놓는다. 다시 연필이 캔버스 위를 지나간다. 과감하고 강렬하다. 굵은 직선이 캔버스 중앙에 커다란 십자가를 그려낸다. 그래, 역시 십자가다.

 예술가라면 누구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울적한 저녁, 처량하게 바람에 흔들리는 십자가를 보고 나서는. 지금은 너무나 쉽게 쓰이는 십자가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피로 얼룩진 상징이라는 것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십자가의 오른쪽 날개에 사람의 손이 그려진다. 손가락은 힘없이 늘어진 채, 박제된 지렁이처럼 굳어 있다. 그 손 위에 까마귀 한 마리를 그려 넣는다. 순식간에 그려낸, 지나치리만큼 사실적인 까마귀가 음산한 분위기를 풍긴다.

 까악- 화들짝 놀라 창밖을 바라본다. 좁은 창틀에 검은 그림자가 얹어져 있다. 커다란 까마귀 한 마리다. 크기가 팔뚝만큼은 될 듯싶다. 새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런 순간에 까마귀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연필이 캔버스 위를 빠르게 왕복한다. 얇고 야윈 팔이 십자가의 오른쪽 날개를 차지했다. 힘없이 늘어진 팔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올라가 있다. 텅 빈 캔버스의 위쪽을 바라보며 지저귀는 모양새다.

 달그락- 미풍에 십자가가 흔들리며 창틀에 부딪힌다. 까마귀는 미동도 없이 방안을 응시한다. 

 캔버스에 어깨가 그려진다. 살과 근육은 온데간데없고 뼈에 가죽만이 겨우 붙어 있다. 얇은 가죽 너머로 앙상한 쇄골이 또렷이 드러난다. 어깨뼈 위에 까마귀 한 마리가 올라가 있다. 그 시선은 아래쪽을 향한다. 천천히 그려지는 가슴에도 뼈와 가죽만이 존재한다. 뼈에 붙은 가죽은 불룩 튀어나와 있지만, 뼈 사이 공간의 가죽은 기괴하리만치 움푹 들어가 있다. 음산한 골짜기와도 같은 모양으로 갈비뼈의 윤곽이 훤히 드러난다. 어깨뼈에 올라앉은 까마귀의 부리는 갈비뼈를 향하고 있다.

 명치 부근은 튀어나온 갈비뼈와 대비되게 움푹 들어갔다. 배는 등가죽에 달라붙었다. 뱃가죽이 가파른 곡선을 그리며 흐늘하게 떨어진다. 배꼽 근처에는 약간의 지방이 남아 있다. 그러나 지방을 견딜 근육은 없다. 가벼운 지방의 무게를 따라 가죽이 당겨진다. 늘어난 가죽의 메마른 피부는 혐오스럽다.

 흰색으로 남루한 천이 그려진다. 천은 허리에 몇 번 감긴 채 늘어져 있다. 허리부터 사타구니 약간 아래까지 드리워진 천은 곳곳이 헤진 상태다. 천의 한 귀퉁이는 오른쪽 다리 아래로 뻗친다. 본디 각졌을 끝부분은 벌레가 갉아먹은 듯 허름하다.

 자그마한 까마귀 하나가 천 위에 몸을 올린다. 허리춤의 천을 발로 꽉 움켜쥔 채다. 그 서슬에 까마귀 발톱이 살결을 찢는다. 허리춤의 자그마한 구멍에서 피가 흐른다. 핏방울이 흰 천 위쪽으로 하나둘 떨어진다.

 천의 아래로 두 다리가 늘어져 있다. 힘없이 늘어진 모양은 천과 다를 바 없다. 발은 땅에 닿을 듯 닿지 않는다.

 까악- 까마귀 울음소리에 화답하듯 십자가 아래에 까마귀 무리가 그려진다. 하나같이 발을 쪼아대고 있다. 발등과 정강이에 무수한 상처가 생긴다. 흐르는 핏방울이 까마귀의 검은 털에 스며들어 사라진다. 

 까악- 잠시 창틀을 바라본다. 까마귀의 검은 깃털이 밤하늘과 겹쳐진다. 어쩌면 저 깃털도 피를 머금고 있을지 모른다. 혹은 머금게 될지도. 어디까지나 육식을 하는 동물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연필은 다시 몸을 타고 올라간다. 캔버스 위를 부드럽게 움직이며 오른팔을 그려낸다. 왼팔과는 완전한 비대칭을 이룬다. 관절이 과도하게 비틀려 팔꿈치가 십자가 위에 걸쳐져 있다. 어깨와 팔의 가죽이 맞물려 기묘하게 일그러진다. 팔꿈치 밑으로는 팔이 사선으로 떨어진다. 손목은 수직에 가까이 꺾였다. 누군가 고의로 비틀어놓은 모양새다.

 팔꿈치에 까마귀 한 마리가 올라타 있다. 다른 것들과는 팔의 모양만큼이나 다르다. 부리는 손끝을 향하고 있다. 한 발은 팔꿈치에서 내려가 가죽을 움켜잡는다. 가죽을 뚫고 나온 발톱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가학적 욕구의 상징과도 같다.

 손등 위로 커다란 연필의 발자국이 생긴다. 못. 그래, 손등을 십자가에 박아넣은 대못이다. 못의 주위로는 흘러내린 피가 흥건하다. 왼손에도, 양발이 겹쳐진 곳에도 마찬가지로 대못이 그려진다.

 세 개의 못을 박은 연필은 십자가를 타고 올라간다. 그리고 어깨 위를 채워나간다. 한껏 야윈 얼굴은 광대뼈가 적나라히 드러난다.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다. 덥수룩한 수염과 머리칼은 아래로 힘없이 늘어졌다. 비틀어진 머리칼 몇 가닥이 눈을 가린다.

 영락없는 죽은 자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눈동자는 소름 끼치도록 공포스럽다. 고개는 아래로 푹 숙이고 있지만 눈은 정확히 정면을 응시한다. 캔버스 정면, 그러니까… 나를. 

 …꼭 살인자를 보는 눈빛 같다.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캔버스 주위를 천천히 한 바퀴 걷는다. 그러다 까마귀의 앞에서 멈춰 섰다. 앞만을 응시하던 까마귀가 고개를 돌려 위를 바라본다. 기형적으로 꺾인 목이 소름 끼친다. 까마귀와 눈을 마주치고 몸을 움칫 떤다. 다시 천천히 까마귀 앞을 떠났다. 캔버스 앞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몸짓이 무겁다.

 곧이어 연필을 광적으로 움직인다. 십자가 주위로 까마귀 무리를 마구 그려댄다. 수십 마리 까마귀가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피가 철철 흘러내린다. 까마귀들은 얄팍한 가죽을 광적으로 물어뜯는다. 가죽 위로 무수히 많은 구멍이 생겨난다.

 이제 십자가의 주위로는 공간조차 없다. 그럼에도 연필은 멈추지 않았다.

 까악- 까악- 까마귀가 울어댄다. 의미 없는 울음이 재촉과도 같이 느껴진다. 캔버스의 여백에 검은 그림자가 하나둘 생겨난다. 까마귀 떼가 캔버스를 가득 채운다. 이제는 십자가의 모습마저 가려지고 있다.

 까아-악- 긴 울음이 귓가에 박힌다. 십자가마저 까마귀로 뒤덮였다. 남은 것이라고는 얼굴뿐이다. 그래, 얼굴뿐이다.

 연필이 캔버스에서 떨어졌다. 캔버스에 보이는 것은 검은색 덩어리들뿐이다. 이제는 예술적 욕구를 찾아볼 수도 없다. 원초적 욕망으로 뒤덮인 더러운 내면의 상징, 그뿐이었다.

 “흐흐… 흐하하, 흐하하하하하!”

 

 그림 속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조각칼을 꽉 움켜잡는다. 그리고 뛰쳐나갔다.

 

 푹- 화가의 뒷목에 조각칼이 박혔다.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다고 믿을 것이다. 화가는 힘없이 쓰러졌다. 캔버스 위로 엎어진 채 미동도 없다. 뒷목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캔버스를 적신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제야 내가 한 짓이 실감이 난다. 사람을 죽였다.

 그냥 그림 몇 점 훔치려는 목적이었다. 화가가 되고 싶었던 사람으로서. 그러다 화가가 돌아왔길래 수납장 안에 숨은 것이다. 그리고 우연하게도 그곳이 조각품을 보관하는 곳이었고, 난 조각칼을 집어 든 것이다.

 저 뒷목에 조각칼이 꽂혀 있는 건 전적인 내 책임이다. 그러나 지금은 책임을 질 겨를이 없다. 조금씩 뒷걸음질 친다. 이상하다. 차마 뒤돌아 뛰어가지는 못하겠다. 그림의 얼굴이 나를 붙잡는다. 그 눈동자, …살인자를 바라보는 듯한.

 까아아악- 까마귀가 날개를 펼치고 창틀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화가의 머리 위에 앉았다. 고개를 숙이며 나를 바라본다. 칠흑 같은 눈동자는 그 무엇도 알려주지 않는다.

 까마귀가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부리를 벌리고, 아아… 아… 아…….

 살점이 뜯긴 자리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창문으로 까마귀 한 마리가 더 들어온다. 화가의 어깨에 앉는다. 또 한 마리가 들어온다. 팔 위에 앉는다. 또 한 마리가 들어온다. 등가죽에 발톱을 박아넣고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까마귀가 들어온다. 더, 더…. 화가의 몸에 무수히 많은 구멍이 생긴다. 흘러나온 피가 옷을 흠뻑 적셨다. 그리고 흐르는 핏방울은 까마귀의 검은 털에 스며들어 사라진다.

 화가의 몸이 까마귀로 뒤덮였다. 커다란 검은색 덩어리다. 황급히 뒤로 손을 뻗어 문을 찾는다. 문고리가 손에 잡힌다.

 화가의 머리에 앉은 까마귀가 고개를 들었다. 부리에서 핏방울이 떨어진다. 검은 눈동자가 날 바라본다. 심연이다.

 까악-

 까마귀들이 고개를 돌린다. 먹다 만 살점이 후두둑 떨어진다. 서둘러 문고리를 돌렸다. 그리고 달렸다. 차마 뒤를 돌아볼 수가 없다. 열심히 달리기만 한다.

 까아악-

 울음소리가 메아리처럼 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