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세상은 어둠뿐이었단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 빛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때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깨어났어. 남자도, 여자도, 사람도, 동물도 아닌 것이 말이야.

그가 기지개를 켜자 소리가 생겨났어. 몸의 골격이 맞춰지는 소리, 그의 목소리가 생겨나 공허한 세상을 채워갔지. 그는 세상을 존재하도록 만들고 싶었어. 자신이 존재하는지 확인하고 싶었거든. 그는 손뼉을 쳐서 자기 육신의 일부를 먼지로 만들었단다. 먼지는 공중을 떠돌다가 이내 부딪히며 빛을 만들어냈지. 그중에는 빛을 내지 못하는 먼짓덩어리도 있었어. 하지만 그는 그런 먼짓덩어리도 소중히 했단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거야. 그게 세상 최초의 외로움이었지. 그는 남은 먼지들을 요리조리 뭉쳤어. 자기 몸을 더듬으면서 모양을 잡고 입김을 불어 생명을 나눠주었어. 하지만 어떤 것은 너무 난폭하고 어떤 것은 너무 난해했단다. 그것들이 그의 세상을 가득 채우기 전에 그는 먼지를 내려쳐 종말을 일으켰어. 그는 한동안 세상을 만드는 일에 흥미를 잃었단다. 하지만 기적은 그다음에 일어났어. 종말이 일어난 한가운데에서 또 다른 생명들이 태어난 거야. 생명들은 스스로 형체를 이루고 자손을 낳았어. 오랜 세월이 지나고 그가 문득 자신의 세상을 지나칠 때쯤, 그는 그것들을 보게 된 거야. 자신을 ‘신’이라 부르며 고개 숙이는 그들을 말이야. 그 순간 그는 존재하게 되었어. ‘신’이라는 이름으로 천지의 창조자이자 구세주가 된 거지.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된 그는 한동안 그 세상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단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어. 흔적도 하나 남기지 않고.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해. ‘나의 존재를 계속 증명해 줘’. 그게 ‘신’의 마지막 뜻이라고 생각했지. 그 뒤로 생명들은 뭉치고 흩어지고 ‘신’의 존재를 자기 나름대로 증명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단다. 한 생명의 기억은 다음 생명에게 전해져서, 처음 생명이 태어나던 순간의 기억마저 어딘가에 떠돌고 있어. 그래, 그런 이야기를 전해 받아서 ‘신’과 ‘생명’의 존재를 기억하고 보존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란다. ‘신’이 여기에 존재했다고, ‘생명’이 여기에 살았다고 말이야. 우리의 ‘생명’ 역시 다음 생명들이 기억하면서 우리도 존재했던 ‘생명’이 되겠지. 지금 내가 너에게 이 기억을 전해주는 것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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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암울한 판타지 세계관에서 어린아이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준다는 느낌으로 홀리듯 써본 글입니다

딴짓하면서 무심코 써본 첫줄을 시작으로 꽤 그럴싸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같아 기분이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