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db.history.go.kr/KOREA/item/compareViewer.do?levelId=kr_103_0010_0070


전투가 끝난 자모산성(고려 자주, 현 평안북도 순천시 자산)에서는 파괴된 성벽을 복구하고 다시 이어질 몽골군의 공격에 대비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자, 빨리빨리 쌓아야 한다! 몽고 놈들이 오기 전에 모두 다 올려야 다 살 수 있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어서!"


자주부사 최춘명은 엄격하고 어쩌면 혹독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성 안의 군민들을 다그쳤지만, 이미 몽골 군대가 어느 곳에서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익히 듣고 본 사람들은 힘들더라도 최대한 빨리 작업을 끝마치기 위해 열심히 작업에 임하였다.


무엇보다 자주성 수령 최춘명은 평시에도 군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전투가 벌어질 때면 안전한 곳에서 숨기는커녕 앞장서서 활과 화살을 들고 성벽에서 싸웠기에, 군민들은 최춘명에 대한 신뢰가 가득히 쌓아져 있었다.


"끄으응..."


"자, 빨리빨리..응? 아이고, 어르신! 어찌 여기서 이러고 계십니까? 어르신은 이제 환갑도 다 되셔가시는데, 괜히 무리하지 마시고 들어가 쉬시지요."


"아이고 아닙니다, 부사 나으리께서 우리같은 것들을 힘써 지켜주시는데 어찌 그렇게 하겠습니까? 저 혼자 쉬었다가는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하이고, 거 참! 들어가시라니까~"


"아이고! 아닙니다, 아닙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게 아니라,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 너무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이래뵈도 나름 팔팔합니다!"


내년이면 환갑(60세)이 될 노인조차, 최춘명을 돕기 위해 나올 정도로 자주 군민은 최춘명을 존경하고 또 공경하였다.


"어, 어? 부사 나으리! 저기 우리 사람과 몽고 놈이 같이 오고 있습니다!"


그렇게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복구 작업이 진행될 즈음, 갑자기 한 병사가 매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최춘명이 크게 소리치며 그 병사에게 물었다.


"뭐라? 설마 우리 백성을 포로로 잡았는가?"


"아, 아닙니다! 두 사람 다 멀쩡한 상태로 오고 있습니다."


최춘명은 헐레벌떡 성벽의 계단을 뛰어오르며 성루로 올라갔다.


그리고, 최춘명은 얼굴을 찌푸렸다.


자색 옷을 입고 각진 관모를 썼으며, 무엇보다 비대한 살집에 이상하게 난 콧수염이 눈이 띄는 저 자는 바로 안북성 전투에서 3군을 대패하게 만든 자이자, 은문상국 최우의 두 번째 장인 대집성이었기 때문이다.


대집성은 그 조상인 대도수와는 달리 겁이 많고 성품이 옹졸했으며, 안융진에서 수만의 거란군을 막아낼 정도로 능력이 있던 대도수와는 달리 안북성에서 대회전을 고집해 3군의 반절이 궤멸되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로 인해 안북성에서 3군이 대패하자, 상장군 이자성에 의해 동선역에서 패해 북쪽으로 퇴각한 몽골군은 다시 개경을 향해 남진했고, 주력군인 3군의 반이 궤멸되어 개경을 지킬 군사가 없어진 조정은 결국 어사 민희와 회안공을 보내 몽골군에 화친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현종 원문대왕 시절의 통쾌한 승리를 재현할 수도 있었던 기회가, 바로 눈 앞의 저 자 대집성에 의해 날아간 것이었다.


그런 대집성의 얼굴을 보자마자 얼굴을 돌리려 한 최춘명이었으나, 대집성이 외치는 소리에 다시 얼굴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려 후군 진주(陣主)대집성이다, 너희 수령에게 전할 말이 있으니, 어서 너희 수령을 불러 내 말을 듣게 하라!"


대집성의 말을 들은 성루 위의 군사들이 최춘명에게 물었다.


"부사 나으리, 어찌해야겠습니까?"


최춘명은 성루의 의자에 걸터앉으며 병사들에게 말했다.


"내가 몸이 좋지 않아 직접 나설 수가 없으니, 다른 병사를 시켜 대신 내 말을 전하게 하겠다 전하거라."


병사들이 성벽 밑의 대집성에게 전하자, 대집성이 노하며 말했다.


"아니, 너희 수령은 윗사람을 대하는 예를 모른단 말이냐? 조정의 명을 전하러 온 자를 이리 대하는 예가 고금에 있었는가!"


대집성이 계속 역정을 부리며 큰 소리를 내자, 옆의 몽골 관리가 대집성을 흘겨보며 그만하라는 눈치를 주었다.


순식간에 기가 꺾인 대집성은 잠시 '흠, 흠' 거리며 자세를 가다듬고는,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내가 수령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은 이것이다, 이미 조정과 3군이 항복하였으니, 자주도 속히 명에 따라 성문을 열고 항복하라!"


병사들이 최춘명에게 어찌할지 묻자, 최춘명은 답했다.


"조정의 명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거늘, 무엇을 믿고 항복하겠노냐 전하거라."


"우리 부사께서 이르시길, '조정의 명이 항복하지 않았는데 무엇을 믿고 항복하겠느냐' 고 하셨습니다!"


대집성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외쳤다.


"회안공께서 이미 몽골 진영에 가시어 항복을 청하시매 3군이 항복한 것이오, 그런데 이것으로도 믿지 못한단 말인가?"


이번에는 최춘명이 일어나, 직접 성루에 나가 말했다.


"성 내의 사람들은 회안공께서 누구신지도 모르오, 조정에서 성지가 내려오면 그때 항복할 것이니, 속히 돌아가시오!"


회유가 실패하자, 대집성 옆의 몽골 관리가 약간 어색한 우리 말로 대집성에게 말했다.


"거, 여기서 이러지 말고 직접 들어가 수령과 이야기하시오! 대관절 공은 어찌 저들을 직접 타이르며 설득할 생각은 않고 이 성벽 아래에서 윽박지르기만 한단 말입니까?"


"아, 알겠소."


기세에 눌린 대집성이 쩔쩔매며 자모산성에 들어가고자 성루로 향했다.


성루로부터 180보 정도 거리에 대집성이 섰을 때, 갑자기 화살 몇 개가 대집성의 발 바로 앞에 박혔다.


"히익!"


대집성은 기겁하며 발을 뒤로 빼다가, 그만 그것이 꼬여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파하며 엉덩이를 문지르는 대집성을 향해, 최춘명이 외쳤다.


"그만 돌아가시오! 더 이상 가까이 온다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소이다."


대집성이 엉덩이의 흙먼지를 털고 일어나며, 다시 말했다.


"이, 이보시오. 최공! 이러시지 마시고..히이익!"


그러나 대집성의 말은 끝마쳐지지 못했다. 다시금 화살이 날아와, 대집성이 기겁하며 몸을 숙였기 때문이었다.


"이보시오! 대관절 어찌 이러..으악!"


화가 난 대집성이 다시 일어나 외쳤으나, 역시 이번에도 날아오는 화살에 기겁하다 뒤로 크게 넘어졌다.


"이놈! 반드시 크게 후회할 것이다!"


톡톡히 망신을 당한 대집성이, 두 번째로 날아온 화살에 벗겨진 관모를 수습하여 쓰면서 자주성에서 벗어났다.


멀리서 몽골 관리가 대집성에게 삿대짓을 하며 뭐라뭐라 하는 모습을 보며, 다른 병사들은 최춘명을 향해 약간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부사 나으리, 이래도 되는 겁니까?"


"조정의 명은 믿어도 저 대집성이란 작자를 어찌 믿겠는가? 자기가 3군을 패하게 만들어 회안공이 항복하게 한 주제에, 회안공이 항복해서 3군이 항복한 것 마냥 인과를 바꾸어 말하니, 결코 신뢰할 만한 자가 아니다."


최춘명은 다만 그렇게 답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