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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이번 화는 뭔가 학원물 웹툰 같은 느낌이 나네요.



13.

목요일. 현지는 사정이 있어서 이번 주에는 학교에 못 온다고 했다.


"그럼 다음 주에 도와줘."


전학생은 포기를 모르는 것 같다. 나는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번 주는 이 일로 날 귀찮게 하진 않겠지.


"빵 머거."


그는 이마에 손을 대고 생각에 잠겨있는 나에게 소보로빵을 내밀었다. 상당히 지능적인 수법을 쓰는군. 3교시를 앞둔 지금은 하루 중 가장 배고픈 시간이다. 그가 내민 빵은 아마도 이 점을 노린 전략 병기, 마치 트로이의 목마 같은 것으로, 이걸 받으면 또 부탁을 들어줄 구실로 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평소의 나였다면 바로 치워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째선지 거절할 수 없었다. 확실히 나는 소보로빵을 좋아한다. 다만 내가 고작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사실에 나 자신도 놀랐을 뿐이다. 왜 그랬을까. 스트레스 때문인가?


싫은 티를 내면서도 빵을 먹던 나는 어떤 여자애가 한 말에 그만 목이 막혔다.


"아이구 옘병. 아주 사랑싸움을 하네."


내가 돌아보자, 그 애는 눈꼴시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순간 분함과 자괴감이 밀려왔다. 나는 먹던 빵을 버리고 돌아와서 책상에 엎드린 채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엄청나게 우울한 상태로 3교시가 지나갔다.


"야 우냐?"


수업이 끝나고 전학생이 말했다.


"말 걸지 마. 죽인다."


그는 그 뒤로 하루 종일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14.

동네 친구 중에 현우라는 애가 있다. 소위 '지인 스펙트럼'이 겹치지 않는 너와 내가 공통으로 알고 지내는 몇 안 되는 친구이기도 하다. 그 녀석과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보던 친구 사이였다. 단짝이라고는 안 하겠지만 그래도 자주 어울렸던. 어쩌면 그 녀석에 대한 특기사항 중에서 중요한 건, 너와 내가 만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거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나는 현우랑 다른 중학교로 가게 됐었다. 그리고 한동안 연락도 잘 안 했다. 그 녀석은 중학교에 가서 너와 같은 반이 되었다던가. 그러다 우리 중학교랑 그쪽 중학교랑 축구 시합을 붙은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나는 너와 만났다. 너를 그 시합으로 부른 게 현우였고. 시합이 끝나고 나는 그 녀석이랑 인사를 하면서 은근슬쩍 물어봤다.


"야, 걔 누구야? 너랑 같이 다니던 애."


"세연이? 그냥 같은 반 애야."


"둘이 사겨?"


"뭐? 너네 웃긴다. 아까 걔도 나한테 똑같은 거 물어보던데."


내가 무슨 소리냐고 묻자, 녀석은 뜸을 좀 들이다 대답했다.


"초록색 11번이 누구냐 길래 내 친구라고 했지. 너 여자친구 있냐고 물어보더라."


처음 보는 여자애와 친해질 절호의 기회라는 건 분명했다. 나는 현우에게 너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고 우리는 만났다. 한 달 뒤, 너는 내가 다니던 검도관에 갑자기 나타나서는 자기가 사범님의 조카라고 했다. 우연히 알게 된 여자애가 우연히 한사범님의 조카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운명적인 만남, 뭐 그런 걸 뒤로 하고서라도 나는 금세 너를 좋아하게 됐다. 하지만 주말마다 도장에서 얼굴을 보면서도 좋아한다는 말만은 할 수 없었다. 너의 멋진 부분들을 알아갈수록, 나도 거기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전에는 먼저 고백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예쁘고 성적도 전교 순위권에 드는 너의 곁에서 부끄럽지 않고 싶었다.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합격점에 미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역시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 아. 다시 만나면 어째서 그때 검도를 시작한 거야? 라고 물어보고 싶네. 만약 대답을 머뭇거린다면 먼저 말해버리자. 좋아한다고.


3월. 지금으로부터 반년 전. 지역에 난잡하게 분포했던 중학교에 비해서 고등학교는 갈 곳이 별로 없었던 이유로이번에도 우연의 힘을 빌렸다고 하기는 왠지 싫으니까우리는 전부 같은 학교에 모였다.


15.

점심을 먹고 돌아오니 기운이 조금 생겼다. 나는 화장실에서 입가와 손을 씻고 교실로 돌아갈 참이었다. 전엔 밥 먹고 축구를 하곤 했는데. 운동장에 나가서 나도 끼워달라고 하면 어떨까. 다들 의외라고 생각하겠지. 그때 누군가 남자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말했다.


"야, 한세연이다."


그 뒤로 따라 나온 두 명을 포함해서 모르는 애들이었다. 1학기 때 같은 반이었다는 사실만 기억났다.


"얘가 그 살인자야?"


"얘 맞음."


세 명 모두에게서 담배 냄새가 났다. 학생부장은 도대체 뭘 하는지. 사실 요즘은 옛날처럼 물리적으로 금연을 시킬 수도 없으니, 있으나 마나 한 직책이긴 하다. 나는 분위기가 좋지 않은 걸 느끼고 교실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한 놈이 내 앞을 막아섰다.


"게이야? 남자들끼리 화장실도 같이 다녀? 비켜."


"사람을 죽여놓고 뻔뻔하게 학교를 다니네. 하민이 어머니가 슬퍼하시겠다."


그 말에 이성이 날아갔다. 나는 놈의 불알을 걷어찼다. 아프긴 했는지 그놈은 신음하면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보고 있자니 기분이 더러워서 거시기를 몇 번 더 밟아줬다.


"씨발 새끼야. 너 나랑 안 친하잖아."


마무리로 멱살을 잡고 주먹을 먹여주자, 놈은 단말마 같은 억 소리를 내고 쓰러졌다. 다른 두 명은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놀랐는지, 잠깐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한 명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길거리 싸움 같은 건 해본 적 없었지만, 그냥 맞아주기엔 어설프고 느렸다. 나는 살짝 옆으로 비키면서 그놈의 명치를 무릎으로 찼다. 거기까진 좋았지만, 나는 다른 녀석에게 팔을 붙잡혔다. 힘으로 벗어나기란 불가능했다. 나는 그대로 뺨을 한 대 얻어맞았다. 위기였다.


"그만해!"


밖에서 난 소란에 화장실에서 뛰쳐나온 건 현우였다. 그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만남이었다. 그는 황당하다는 눈치였다.


"미쳤어? 이러면 정학이야."


그제야 모두 정신을 차렸다. 붙잡고 있던 손이 풀리자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연히 바닥에 누워있는 한 명에게 모든 시선이 모였다. 현우는 그 녀석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하더니 조금 안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일어나 봐. 죽은 줄 알았네."


그러나 애처롭기 그지없는 신음이 들릴 뿐이었다. 현우는 잠시 고민했다.


"안 되겠다. 너네가 얘 데리고 보건실 가라."


"알았어. 근데 뭐라고 말하지?"


"아, 그 뭐지? 너네 맨날 계단에서 하는 거 있잖아. 난간에 세게 부딪혔다고 해."


잠시 후, 화장실 앞에는 멍하게 앉아있는 나와 생각에 잠긴 현우가 있었다. 수업 종이 울린 뒤에는 정적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