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멸망했다. 이유는 모른다.

 

 "그"는 생존자 집단의 최후의 생존자이자,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인간이었다. 대학생이던 그는 살아남은 이들과 생존을 도모하며 뭉쳤지만, 거듭되는 불화와 악재가 겹쳐 결국 집단은 내분에 휩싸였고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후 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결국 죽어버렸다.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와 폐허. 살아가기 위해 살아가던 그에게는 점차 삶의 의욕은 꺾여나갔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이틀 치의 식량과 물, 그리고 피로와 허기에 찌든 몸뚱어리와 꺾여버린 삶의 의지뿐. 슬슬,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었다.

 

 죽은 시체 근처에는 까마귀가 맴돈다. 그의 주변에는 이미 까마귀 몇 마리가 낮게 날며 모여들었다. 까마귀도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가 이미 살 이유가 없는 사실상의 시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뻗어버린 그는 차라리 죽자 싶은 생각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다시 한번 힘겹게 눈을 떴다.

 

 "... 살아있는 인간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목소리, 목소리였다. 그는 반사적으로 깨어나 사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디 환각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그리고.... 이렇게 쌩쌩한 인간일지도 몰랐네.“

 

 새하얀 장발에, 머리를 묶은 붉은 리본의 소녀. 그는 손을 뻗어 소녀의 머리칼을 쓸었다. 감촉이다. 꿈도, 환각도 아닌 너무나도 완벽한 감촉.그는 마침내 이 넓디넓은 세상 속에서, 인간을 발견해냈다.

 

 그는 기쁜 마음에, 소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런 소녀는 소녀는 대답도, 미동도 없는 채로 그의 품에 안겨있을 뿐이었다.

 

 

 "내 이름은... 오미크론. 사실 이름 같은 건 없고 코드네임으로만 불렸어.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말동무라도 생겨서 좋네.“

 

 오미크론, 그리스 문자의 15번째 알파벳이다. 그녀의 삶은 어느 한 실험실에서 시작되었다. 사람을 불사의 존재로 만든다는 '악마의 보석'을 연구하기 위한 수많은 표본 중 하나였던 그녀는, 실험실에서 의도적으로 감정을 결여시킨 채 태어나 자랐다.


 세상이 멸망하던 날, 오미크론은 살아남았다. 오른 눈에 박힌 보석 덕에 모두에게 찾아온 종말은 그녀를 벗어났다. 다만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도, 혼자가 되었다는 쓸쓸함도, 그 어떤 감정 또한 오미크론에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이 허름한 극장을 찾은 오미크론은 세계의 종말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미크론? 개인적으로 작명이 마음에 안 드는데. 어쩌면... 샤를로트라는 이름, 어때?“

 

 그는 제대로 된 이름도 없이 연구소 내 코드네임으로만 불렸던 오미크론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샤를로트‘는 그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소설의 여주인공이자, 동시에 이 영화관의 이름이기도 했다.

 

 "의미 없는 짓이야. 네가 나에게 무슨 이름을 붙이든, 나는 그것에 대해 좋다고도, 싫다고도 반응해 줄 수 없으니까.“

 

 물론 아예 의미 없는 짓은 아니었다. 그는 샤를로트에게 이름에 대한 평가를 바란 것이 아니었고, 그 이후에도 샤를로트는 그가 지어준 이름을 자신의 "이름"이라 인식하고 있었으니.

 

 

 타닥거리는 모닥불 소리가 텅 빈 극장을 울렸다. 그는 깡통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야, 이거 귀한 거다? 이 근처 통조림 죄다 씨가 말랐어. 내가 저기 멀리까지 나가서 구해온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샤를로트에게 통조림을 건넸다. 샤를로트는 대답 대신 특유의 무표정으로 캔을 멀뚱멀뚱 쳐다만 보았다.

 

 어차피 몇천 년을 굶어도 죽지도 않는데, 무언가를 섭취하는 것은 의미 없는 짓이었다. 그는 그냥 먹어도 되는 걸 굳이 샤를로트에게도 권했다. 물자 낭비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알아, 나도. 근데 너 나 있을 때라도 좀 사람같이 살아야 하지 않겠냐? 최소한 배고프다는 생각은 들 거 아냐...“

 

 샤를로트는, 마지못해 통조림 소고기를 한입 베어 물었다. 따듯하게 데워진 기름과 부드러운 살코기가 입 안에서 느껴졌다.통조림 캔 주제에 이외로 맛은 있었다. 그래봐야 그녀에게는 그저 고기일 뿐이었지만.

 

 "의미 없는 배려야. 이런 짓으로 네가 얻어낼 수 있는 이득이 뭐지? 차라리 내게는 의미 없는 네 호의를 너를 위해 쓴다면, 생존에 더 유리할 텐데."

 

 샤를로트의 차가운 대답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허, 쌀쌀 맞기는... 이 말은 네 나름대로의 걱정해 주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그의 말에도, 샤를로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와~내 인생 살다 살다 너만큼 재미없는 여자는 처음 본다. 대답 좀 해라 대답 좀. 말동무 필요하다며?“

 

 대체 무엇을 바란 것일까.

 

 ”나는 말동무가 필요해서 네 곁에 있는 거야. 네 개소리에 일일이 반응해 주기 위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의 진심을 개소리로 반응하다니, 그는 살짝 화가 나더라도 이내 진정하고는 다시금 그녀에게 말을 걸곤 했다. 적어도 허공에 뱉은 말을 개소리라고 평하면서도, 또 그걸 들어줄 누군가가 있는 게 어디인가.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콘크리트 더미들 사이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명을 만들어내며 연거푸 울리던 총성이 끝을 맺자, 그는 쥐고 있던 사냥용 소총을 내렸다.

 

 바닥에 쓰러진 것은 멧돼지 두 마리, 한 마리는 목에 총알이 박히며 즉사했고, 또 다른 한 마리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잡아 왔네? 저번에는 먹지도 못할 벌집으로 만들어서 가져왔더니, 조금은 늘었네.“

 

 극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샤를로트가, 그의 사냥의 결과물을 보며 말을 꺼냈다.

 

 "야, 총알 일곱 발만 제거하면 먹을 수 있었잖아. 너 맨날 느끼는 건데 악평이 너무 심해.“

 

 그는 서운하다는 듯 반응했지만, 샤를로트가 그걸 신경 써줄 의무는 없었다.

 

 "아홉 발이었어. 요리하는 동안에 총알이 더 나왔잖아.“

 

 팩트, 그는 다급히 말을 돌렸다.

 

 "야, 그 얘기 그만하고... 그 뭐냐, 우리 여기 극장에서 만난 게 좀 되지 않았냐?“

 

 그가 말을 돌리자, 샤를로트는 그가 전환한 화제에 대한 대답을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못해도 십 년 가까이는 됐어“

 

 그는 샤를로트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그도 아직 20대였다. 나이를 먹어감을 체감하면서도 동시에 그때와는 다를 게 없는, 앞으로도 다르지 않을 샤를로트의 모습을 바라보며 무언가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끼고는 했다.

 

 사실, 그도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맨 처음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코드네임인 오미크론으로 소개하던 그 소녀는 이제 나름 그의 말을 비꼬거나 재미를 느낀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야, 근데 만약에 네가 지금 감정이라는 걸 가질 수 있다면... 너는 그렇게 할 거야?“

 

 멧돼지를 조금씩 해체하던 그가, 샤를로트에게 물었다.

 

 "글쎄,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겠지.“

 

 긍정. 이내 그는 샤를로트의 대답에 대한 생각을 넌지시 던졌다.

 

 ”근데... 너 죽지도 못하잖아. 너 감정을 가진 상태에서 이 우주가 끝장나기 전까지 홀로 버틸 수 있겠냐?”

 

 5억 년 버튼이라는 것이 있다, 버튼을 누르면 1000만 원을 받는 대신에 5억 년간 아무것도 없는 공허 속에서 버텨야만 한다. 물론 5억 년간 고통받은 기억은 5억 년이 끝날 시 사라지지만 샤를로트에게는? 5억 년은 현실이다. 어쩌면 5억 년 그 이상을 버텨야 할지 모른다.

 

 만약 샤를로트에게 감정이 끝내 만들어지지 못한다면, 그녀는 슬픔도, 기쁨도, 분노도, 지루함도 느낄 수 없다. 우주가 끝장나는 그 시점까지 버틸 수 있었다.

 

 “감정이라는 걸 살면서 가져본 적이 없다 보니, 잘 모르겠네.”

 

 그는 샤를로테에게 감정적인 반응을 원했지만, 동시에 그게 그녀에게는 족쇄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감정이 없는 삶이 그녀에게 있어 진정으로 좋은 삶인지는 차차 따져보고.

 

 “샤를로트, 내가 언젠가 죽어도, 너 슬퍼하진 마라.”

 

 묵묵히, 툭 던지듯 건넨 말에 샤를로트는 순간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삶에서 처음으로 맞아보는... 해방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에게도 한때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명문대에 입학해 학생회장직을 맡있던 그 시절, 캠퍼스 라이프를 즐기며 사랑과 미래를 찾아 살아가던 그때의 젊음은, 어느새 그와는 점차 멀어져 갔다.

 

 어느새 40을 넘겨, 도저히 청년이라 보기 힘든 그였다. 그의 곁에 항상 머무는 샤를로트를 볼 때마다, 그는 자신이 점차 늙어간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우주의 종말까지 영원토록 불멸의 존재로 남아있을 터였다. 

 

 그런 그에게는 자신이 늙어간다는 당연한 사실 보다, 결국 혼자가 되어버릴 샤를로트가 더욱더 안타까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시간은 그저 흐를 뿐이었다.

 

 "통조림에, 들짐승 고기에... 샤를로트, 너 솔직히 안 질리냐 이것들?“

 

 샤를로트는 그에 질문에, 어이없다는 듯 화답했다.

 

 "요리사가 바뀐다면 안 질릴 것 같은데?"

 

 몇 년을 같이 살다 보니, 이제는 비꼬는 것도 한다. 이걸 성장으로 봐야 할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요리 네가 해.”

 

 그의 대답에, 샤를로트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난 벌써부터 말동무를 잃고 혼자서 살고 싶지는 않아.“

 

 요리도구로 암살을 하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독을 타겠다는 것인가.

 

 ”됐고, 너 먹고 싶은 거 있어? 내가 한번 해 볼게.“

 

 그는 최근 콘크리트 더미 위에서 요리 책을 한 권 주웠다. 어느 유명한 영국 셰프의 요리법이었다. 샤를로트는 딱히 가리는 음식도, 그렇다고 해서 원하는 음식도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그는 이번에는 제대로 된 요리라는 것을 해주고 싶었다.

 

 "... 피자.“

 

 의외로 빠르게 나온 대답. 어째서 피자인지는 그도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메뉴는 접수했다. 그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극장 밖으로 뛰쳐나왔다.

 

 며칠이 지난 후, 그는 다시금 극장으로 돌아왔다. 개고생이 눈에 훤히 보일 만큼 그 꼴은 만신창이었지만, 동시에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샤를로트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그가 안전하게 돌아온 것이 나름 안심되었다.

 

 그는 밀을 씻고, 갈고, 체에 쳐 밀가루를 만들어냈다. 그다음 사방을 뒤져 겨우 얻어낸 우유를 레몬즙과 함께 불에 끓였다. 이전에는 마트에 가서 사기만 했던 것들을 이제는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내가 피자 하나 가지고,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그럼에도 해야만 했다. 그는 직접 제분한 밀가루를 과일과 설탕을 이용해 만들어낸 효모와 섞어 도우를 만들고, 직접 딴 토마토를 으깨어 퓌레를 만들었다. 그리고 샤를로트는 이 모든 과정을 마치 흥미로운 과학실험을 보는 듯 지켜보았다.

 

 그에게는 이제 마지막 공정이 남았다. 숙성을 끝낸 반죽을 얇게 펴고, 그 위로 퓌레를 펴 발랐다. 그다음 치즈와, 바질 잎을 찾지 못해 따온 나뭇잎을 올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개고생에 고생을 쌓아올려 만들어낸 올리브유 한 바퀴를 두른 다음 마지막으로 아포칼립스 상황에서도 운 좋게 남아있던 화덕에 넣어 불을 지폈다.

 

 "만약 내가 이걸 팔았다면, 안 팔렸을 거야. 인간 하나를 갈아 넣어서 만들어서 미친 듯이 비쌌을 테니까.“

 

 그의 몸을 갈아 넣어서 만들어낸 피자가, 마침내 오븐에서 나왔다. 샤를로트는, 노릇하게 구워진 피자에 눈을 떼지를 못했다.

 

 ”피자 먹고 싶다고 했지?“

 

 그는, 엉성하지만 최선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피자 한 조각을 건네며 미소 지었다.

 

 

 지혜와 지식은 같지 않다. 하지만 둘 다 있다면 삶을 헤쳐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에서는 같다.

 

 늙어간다는 건, 지식과 지혜를 얻는다는 것과 같았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방법과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익숙해져가면,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와 반대로 신체적인 스펙은 점차 떨어져간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참 바쁘게도 사네... 이번에는 또 뭐야?"

 

 샤를로트는 일주일 전부터 부지런히 뛰어다니던 그를 향해 의문과 호기심이 섞인 질문을 던졌다. 무뚝뚝한 그녀의 말투는 참으로 고치기 어려웠다.

 

 그가 이 낡고 버려진 극장을 전부 고치는 것보다 더더욱.

 

 "영화를 보자고...?"

 

 그가 샤를로트를 처음 만난 곳이자, 지금까지도 같이 수십 년을 보내온 장소. 바로 이 극장이었다. 한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간을 보내던 이 극장에는 상영 시각에 맞춰 사람들과 스크린이 시시각각 바뀌어갔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지혜와, 지식의 힘으로 자신만큼이나 늙어버린 이 극장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작업은 길고, 더뎠지만, 동시에 확실했다. 그는 찢어지지 않은 스크린으로 갈아끼우고, 먼지 쌓인 스피커를 수리하고, 마지막으로 핵심인 영사기를 손보았다. 마침내 영사기에 비친 새하얀 빛을 보자, 샤를로트에게 영화를 보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영화 필름을 하나 구했어. 내 기준에서도 조금 오래되기는 해도 명작이라고 평가받지."

 

 샤를로트는, 그가 갑자기 영화를 보겠다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영화 없이도 같이 수십 년을 살았는데, 뜬금없이? 뭐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의문은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 영화 한편을 보겠다고... 이 극장을 고치는 거야?"

 

 샤를로트의 질문에, 그는 먼지 쌓인 영사기를 작동시키며 답했다.

 

 "아니, 너와 영화 한편을 보고 싶어서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화의 제목이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적절한 선택인 것이, 이 세상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바람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졌다.

 

 먼지 쌓인 스크린에서는, 고전 영화의 장면들이 비쳐갔다. 여주인공이 나오고, 남주인공이 나왔다. 전쟁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다. 그렇게 영화가 중반을 지나칠 때 즈음, 샤를로트는 그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있잖아... 모든 게 다 '바람처럼 사라진' 이 세상에, 희망이라는 게 있다고 봐?“

 

 상당히 뜬금없으면서도, 동시에 묵직한 의미를 담고 있는 한마디. 그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스크린을 바라보며 흐르는 영화의 한 장면들을 마음속에 담을 뿐이었다.

 

 클라이맥스가 다가오고... 남주인공은 여주인공을 떠났다. 여주인공의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을 맺었다. 그는 한동안 하염없이, 그저 올라가는 엔딩 크레디트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는 샤를로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길고, 기나긴 여정의 끝이었다. 그는 마침내 쓰러졌다.

 

 아직까지 그의 기력이 남아있을 때, 그는 샤를로트에게 기나긴 여행을 제안했다. 목적지는 알 수 없었다. 샤를로트는 그를 말릴 수 없었다. 그를 말리지 않는다면, 그가 그 자리에서 금방이라도 목숨이 끊어질 것 같이 긴박했기 때문이다.

 

 여정의 한 가운데에서, 그 둘은 행복했다. 슬프기도 했고, 때로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 화를 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이제 휘몰아치는 모래폭풍 속에서 그의 마지막을 준비했다.

 

 희미한 정신 줄 속 힘겹게 붙잡은 샤를로트의 손은, 너무나도 따스했다. 그는 그녀의 실루엣을 가린 폭풍 속에서도,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결국, 그 자신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다.

 

 "샤를... 로트...“

 

 영화가 시작하면 불이 꺼진다. 반대로 영화가 끝난다면, 다시금 불이 켜진다. 영화가 시작되듯 점차 꺼져가는 온몸의 감각들과는 반대로, 그의 정신은 점차 밝아져갔다. 엔딩 크레디트가 얼마 남지 않았다.

 

 "대답이... 너무, 늦어버려서...“

 

 대답, 샤를로트가 영화를 보던 와중 그에게 툭 던졌던 그 질문.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이 세상에, 희망이라는 것은 존재할까? 그는 영화에 너무 집중해버린 나머지, 샤를로트에게 해줄 대답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리고 영화가 이미 다 끝나버린 지금에야, 겨우 한마디 내뱉을 수 있을 뿐이었다.

 

 ”희망...? 네가 있잖니, 샤를로트...“

 

 온 우주가 끝장나버릴 때까지, 영원토록 남아있을 그녀, 샤를로트는 그에게 있어서 희망이었다. 그녀를 만났기에 그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녀가 말동무를 원했기에 그는 그녀의 곁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녀를 사랑할 수 있었기에 그는 행복할 수 있었으며,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샆었기에, 그는 살아갈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 샤를로트는 희망이었다. 그리고 샤를로트가 남아있을 것이기에, 이 세상에는 희망이 남아있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랬다.

 

 ”내 희망이 되어주어서, 정말 고맙다. 샤를로트."

 

 불어오던 바람이 멎어들자, 모든 것이 사라져있었다. 어떤 남자도, 그 곁에서 눈물 흘리던 어느 소녀도.

 

 

 “뭘 그렇게 쓰고 있냐? 소설? 강의 시간에 딴짓하는 거 보니까 장학금과는 영영 배드 엔딩이겠네."

 

 귀에 익은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낄낄거리며 웃는 과 동기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는 강의 안 듣고 C, 그쪽은 출석 또박또박 해놓고서는 F. 선택지도 없는 미연시를 하고 계시네. 안 질려?“

 

 도발에 가까운 내 대답에, 그는 허허 웃으며 답했다. 예나 지금이나 희한하게 긍정적인 양반이다.

 

 "나한테는 2회차가 있잖아? 재수강이라고, 이번에 루트 잘 타면 굿 엔딩이야.“

 

 재수강은 무슨, 그냥 강에 빠져버렸으면 한다. 그는 내 어이없다는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다시금 낄낄대더니, 이내 마음 속을 관통하는 한마디를 툭, 하고 던졌다.

 

 "야, 할 일도 없겠다, 우리 영화나 한편 보러 갈래?“

 

 영화... 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영화를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와 영화를 보는 것이 너무나도 오랜만인 느낌이었다. 유난히 반짝이는 내 오른쪽 눈동자에, 그의 미소 짓는 표정이 비쳤다.

 

 "무슨 강아지 산책 가자고 하는것도 아니고, 얘는 영화만 나오면 난리네? 암튼, 가자 샤를로트. 이번에 옛날 영화 재개봉한다더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라는 영화인데...”



해석은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