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음집

1화

본격적인 내용의 시작이라 그런지, 이번 편은 좀 기네요. 재밌게 봐주시면 좋겠어요.



16.

"괜찮아? 너 손 다쳤네."


나는 가까이 다가오는 현우를 밀어냈다. 현우는 그런 나를 안되겠다는 듯이 가까운 비품실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자기가 자주 사용하는 구급상자가 있다는 모양이다. 안 쓰이는 교실에 수납장과 잡동사니를 잔뜩 밀어 넣어서 미로 같은 공간이었다. 우리는 의자를 가져와서 앉았다. 까진 손등이 쓰려왔다. 확실히, 세 명을 상대로 덤볐는데 손을 좀 다친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었다. 현우는 손에 난 상처에 거즈를 댄 다음 붕대를 살짝 감아줬다. 완전히 지쳐버려서, 고개를 숙이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녀석에게 앞머리를 기댔다. 이마가 가슴에 닿았을 때, 셔츠에서는 진한 탈취제 향이 났다. 잠깐만에 다시 기운을 낸 내가 떨어지자, 현우는 그제야 뭔가 발견한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 얼굴 맞았어?


그때쯤 맞은 곳이 발갛게 되었었나 보다. 나는 개의치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무슨 페브리즈를 그렇게 뿌리고 다녀."


해야 할 말은 이게 아닌데. 나는 비품실을 나가기 전에 덧붙였다.


"고마워."


교실에 돌아왔을 땐 모두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아무도 묻지 않았다. 자리에 돌아오자, 옆자리의 전학생 녀석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뭔가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입을 뻐끔거리기만 하는 걸 보고 3교시의 일이 떠올랐다. 아, 말 걸면 죽인다고 했었지.


17.

아무리 긴 하루도 끝이 오기 마련. 혼자서 집에 가는 길은 조금 낯설었다. 해방감을 느꼈다기엔 오히려 발걸음이 무거웠다. 현지가 오늘 학교에 오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이 꼴을 보면 뭐라 했을지.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교문에서 불러세운 건 현우였다.


"한세연. 같이 가자."


이쪽으로 달려오는 녀석을 보니, 그새 옷을 갈아입은 게 눈에 띄었다. 딱 봐도 새 것인 체육복에는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갑자기 어디서 난 건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너, 집이 같은 방향이었어?"


"아니."


현우는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쉽게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앞서 걸으면서 기다렸다. 그러다 집에 거의 다 왔을 때쯤에는 내 쪽에서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


"아까 화장실에서 나온 애들이랑 친구야?"


"예전에는. 같이 안 다닌 지 꽤 됐어. 화장실에서 마주친 것도 우연이었어. 처음에는 자기들끼리 싸우는 줄 알았는데 깜짝 놀랐어. 여자애를 상대로 주먹다짐을 하고 있었다니. 역시 그 자리에서 손봐주는 게 맞았을까? 어떻게 생각..."


"아아, 됐어. 잊어버려."


만약 현우까지 그 자리에서 싸움에 끼어들었다면 문제가 더 커졌을 거다. 자기 나름대로 상황을 수습하려 했던 거겠지. 그 정도는 나도 이해했다. 다만 그다음에 녀석이 한 말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중학교 때 기억해? 나는 그때 너를 하민이에게 소개시켜 줬던 걸 후회하고 있어."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하민이가 나쁘다는 건 아냐. 하지만 걘 너를 좋아했으면서 아무것도 안 했어. 마치 가만히 있으면 자기 마음을 알아주길 기다리는 것처럼. 그런 사람은 널 좋아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갑작스러운 그 말에 나는 당황하면서도 화가 났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물어보았다.


"그게 너하고 무슨 상관이야?"


"하민이는 입장이든 뭐든 하나도 확실하게 해두지 않았어. 지금 와서는 말야, 그 녀석의 사고로 너는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데 정작 자기는 병원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채로 있는 거잖아."


정곡을 찔리고 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짧은 침묵 끝에 현우는 그 말을 하고야 말았다.


"무슨 상관이냐면, 널 좋아해."


타당한 지적이었다.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 한 말도 아니었다. 차라리 내가 너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 나는 너의 평범한 일상을 망가트려 놓고선 모든 게 저절로 해결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오늘처럼 위험에 빠졌을 때도 스스로를 구하지 못했다. 결국엔 너를 좋아해서 고백한 친구에게도 미안한 일이 되어버렸다. 현우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딱히 없었다.


"결국 넌 세연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은 거잖아? 나로선 말해줄 수 없어."


"무슨 말이야?"


"왜냐하면 나는 한세연이 아니니까. 나는 그 애의 몸을 멋대로 차지하고 있는 것뿐이니까. 이제 알겠냐?"


나는 대답을 듣고 벙찐 현우를 뒤로하고 다시 걸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몇 걸음 정도를 걸었을까. 참다못해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아마도 그 사고 이후로는 처음으로, 네가 아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하민! 너 맞지?"


현우는 그대로 떠나려 한 나에게 다가와 팔목을 잡아당겼다. 마침내 녀석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게 된 나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그대로 한마디를 전한다는 게, 그만 목소리가 뒤집히고 말았다.


"놔 줘. 내가 잘못했어."


그 순간, 나를 잡고 있던 손이 맥없이 풀렸다. 그 뒤로 현우는 따라오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나는 아주머니가 있는 거실을 피해서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네 방에 들어가 방문을 굳게 닫았다. 한참을 닫힌 문에 기댄 채로 울었다. 다친 손등이나 얻어맞은 얼굴보다도 마음이 미치게 아팠던 건, 밀려오는 통증이 너에게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게 했으니까. 오늘 네 몸 구석구석을 멍들게 한 것도. 스스로 흘린 눈물이 네 얼굴을 적시게 한 것도. 그런 마당에 나는 아직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18.

금요일.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또 몸을 상하게 할까 봐 무서워서, 그리고 도저히 갈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방문도 열지 않은 채로 아주머니께는 몸이 너무 안 좋다고 말했다. 아주머니가 아플 때는 공부하지 말고 쉬라고 말한 걸 보면, 너는 아플 때도 공부를 했던 모양이다. 그런 점 때문에 더더욱 나로서는 너의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 현지가 집에 찾아왔었다. 아프다는 말로 돌려보냈다.


일요일. 더는 너로서, 너의 인생을 대신해서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월요일이 오는 게 끔찍했다. 나는 말 그대로 한계에 다다랐지만, 여전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대로면 나는 망가지고 말 것 같았다. 아니, 나는 망가지고 있었다. 지금껏 경험해 본 적도 없는, 말도 안 되는 시련을 겪고 헤매는 동안 말이다.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고 나는 여전히 모든 게 해결되기를, 그리고 너의 응답을 무력하게 기다리고 있다.


수요일. 뭔가 이상하다. 일요일의 다음이 수요일이던가. 그럴 리 없다. 그러나 내가 긴 꿈을 꾼 듯한 기분 끝에 일어났을 때, 스마트폰 화면은 분명히 9월 14일 수요일을 나타내고 있었다. 나는 의심하기를 반복했다. 하늘이 월요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들어주기라도 한 건가. 방문을 열고 나와 거실에 내려가 보니, 아주머니가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나는 아침을 먹는 동안 계속 생각했다. 갑자기 생겨있는 이틀의 공백. 평소와 묘하게 다른 아주머니의 분위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틀 동안, 그녀의 기분을 좋게 만들 만한 변화가 있었던 걸까. 식사를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어제 학교에 갔었죠?"


내가 지나가듯이 던진 질문에 아주머니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잠이 아직 덜 깼구나."


확실히, 내가 잠이 덜 깼다는 게 가장 말이 되는 설명이긴 했다. 그렇게 나는 좀 전까지 했던 멍청한 생각들을 떨쳐내려 하면서 화장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세면대 가장자리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어야 할 칫솔이 양치컵에 꽂혀 있는 걸 보고 말았다. 언뜻 사소해 보이는 이 변화는 상당한 괴리감을 자아냈다. 세면대의 도구 배치는 주인의 사소한 습관이 만드는 것이라 했던가. 예를 들면 나처럼 손으로 대충 물을 떠서 입을 헹구는 사람은 양치컵이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나는 분명 그 쓸모없는 물건을 수납장에 처박아뒀었다. 요약하자면, 화장실을 나온 나의 머릿속에선 어떤 멍청한 생각이 반쯤 확신으로 바뀌어 있었다.


교복 입는 건 혼자서도 할 수 있게 됐지만, 가슴까지 오는 머리카락에 관한 건 답이 없었다. 보기에 예쁘긴 한데 말이지. 감았다가 말리는 건 어려워서 저녁에나 시도해 볼 수 있었고, 자고 일어나서 부스스해진 머리를 원래대로 돌려놓는 건 그것대로 다른 문제였다. 결국 나는 아주머니의 손에 이끌려 거울 앞에 앉았다. 한심하게도 아직도 많은 걸 다른 사람 손에 맡겨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머리가 정돈되는 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그날따라 아주머니가 말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다 됐다."


마침내 정적을 깬 그 말에 거울을 올려다봤을 땐, 온 정성을 쏟은 듯한 차분한 모양이 완성되어 있었다. 언제나처럼 옆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머리핀까지. 준비 만전이었다. 어깨 너머로는 아주머니가 잠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저기..."


조금 울고 있었다. 너를 빼닮은 얼굴이. 역시 이틀의 공백을 채웠던 건 너였구나. 모든 걸 파악한 나는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죄송해요."


"사과를 왜 하니. 넌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나는 아주머니의 그런 대답에 조금 놀랐다. 어깨로 느껴지는 따뜻함.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니 그녀가 나를 뒤에서 안아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