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



순진한 면모도 있는 녀석들이었다.


물소는 선두가 달리는대로 따라온다던가.


매캐한 연기에 시야를 방해받은 요괴들은, 그저 우리만 쫓아왔다.



[멈춰라! 너무 깊게 들어갔다!]



부하들을 제지하는 우두머리의 지시는 현명했지만, 동시에 너무나 느린 현명함이었다.


강 어귀까지 마중나와준 아군은 꼭 같은 지적을 했다.



[옳은 판단이구나. 이제와 눈치챘으니 의미가 없겠지만.]


"남생이님!"



거북 요괴, 아니, 거북 신령이었다.


무당 여인이 기쁘게 맞았다.



[네놈... 남생이냐?]



아직 시야를 회복 못한 두령 소는 불쾌해했다.



"네놈 남색이냐라뇨. 남생이님은 그런 짓 안 해요."



무당 여인은 헛소리를 했다.



[흐읍.]


[머어엇!]


'콰직'



소머리 수하 요괴 하나가 강가의 퇴적물 일부가 되었다.


거북 신령의 육중한 앞발에 찌부러진 결과였다.


타락한 신령 황소가 연기 속에서 볼멘소리를 했다.



[잔머릴 썼구나 인간...!]


"난 약팔이요. 속은 놈이 잘못이 아니오?"



곁에서 나리가 "언제는 이야기꾼이라더니" 라며 중얼거렸다.


낙호 강의 왕은 껄껄 웃었다.



[이 또한 좋지 않느냐.

아이가 부모의 무릎을 떠나는 것도 성장이니라.]


[옳아, 그렇느냐?

그렇다면 강의 백성들이 뿔을 길러 네게 대항하는 것도 성장이겠구나.]


[부모의 무릎을 떠나는 건 성장이지만

부모에게 칼을 들이대는 건 성장이 아니니라.]


[허어! 주둥이는 길구나.

신기를 잃고 정괴로 떨어진 모지리가.]


[남생이 주둥이가 길면 얼마나 길겠느냐.

그저 소 요괴이신 네놈만은 못하겠지.]


[이놈이...!]



말싸움에 진 황소는 분노하였다.


황소는 제자리에서 이리저리 난동을 쳤다.


점차 기세가 꺾이던 연기는, 황소의 난동이 결정타가 되어 공중으로 사라졌다.


황소의 눈은 시뻘겋게 물들여져있었다.


하늘에서 잠깐 봤을 때보다 뿔이 더 길어져있었다.



[음머어어어!]



황소가 돌격해왔다.


수하인 반인반우의 요괴들도 따라서 그리하였다.



*



"자세 그만 잡고 쏘거라!"



총잡이 양반에게서 고삐를 건네받은 나리가 포수의 격발을 요구했다.


총잡이 양반은 총을 든 채 부르르 떨다가 내리기만 반복했다.



"안 되갔소.... 손이 자꼬만 떨려."


"계속 꾸물꾸물댈 셈이냐?"


"미안혀. 이라믄 안 되는디... 눈에 어른거려서 그려."



총잡이 여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나리는 더 할 말을 잃고 "그럼 말이나 다시 몰아라" 라며 고삐를 반납했다.


나는 구름을 운전하며 달려드는 잔챙이 요괴들을 막으며

틈이 나는 대로 거북과 황소, 두 신령의 대결에 힘을 보탰다.


무당 여인은 여전히 지팡이의 사용법 학습에 한창이었다.



[더! 더 뜨겁게 애태우거라.]


"여기서 더요?"



쉽지 않은 학습이었다.


내 쪽을 힐끔힐끔 보는 게, 미안한 듯하였다.


가끔씩 지팡이에서 불꽃이 튀어나가 졸병 요괴 몇몇에게 경상을 입히는 정도가, 현재 무당 여인의 전투 기여였기 때문이다.



"눈치보지 말고 지팡이 사용법부터 터득하시오.

그 지팡이가 중요하단 건 알겠으니까."



그리 일러두었다.


그보다는 신령들의 전투가 급박했다.



[얼어라!]



거북 신령이 땅을 치자 한기가 몰려왔다.


한기는 응집하여 두목 황소를 덮쳤다.


황소의 다리털 일부에 서리가 앉았다.



[음머어어!]



황소가 머리를 한번 허공에 휘두르자 서리도 한기도 싸그리 사라졌다.



[그런 잔재주는 질색 아니었느냐!]



그러고보니 메기랑 싸울 때는 잔재주 부리지 말라는 둥 떠들던 양반이 거북 신령이었다.


거북은 묵묵히 꼬리를 내렸다.


얼핏 항복의 표현처럼 보이는 그것은 황소의 반응으로 짐작컨대, 그럴 염려는 없어보였다.



[음침한 기술을....]


[변해라.]



자욱한 안개 속 햇볕에 비친 거북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림자는 거북에게서 독립해, 독자적인 형상으로 변화했다.


예리하고 거대한 창의 모양이었다.


그림자 창은, 목표를 찌르려는 여느 창처럼 날아올랐다.



[어딜!]



거북의 정성스러운 그림자 공격은, 황소 신령의 발길질 한번에 무력화되었다.


그림자 창은 황소의 발굽에 차이자마자 뿌드득 부러져버린 것이었다.


황소는 긴 뿔을 거북에게 향하게 하곤 달렸다.



"충죽지교간에,,,, 싸우고 싶지 않았건만,,,,."



지켜만 보던 따개비 노인이 참전했다.


충죽지교. 저건 안다. 어릴 적부터 사귄 친구란 뜻이었다.


노인이 박수를 치자 거북 앞에 큼직한 따개비 껍데기가 현현했다.


따개비는 황소의 뿔을 받아냈다.



[음머어어어!]



돌격이 가로막힌 황소는 땅을 향해 울부짖었다.


지반이 흔들리더니 두터운 나무줄기 따위가 튀어나왔다.


줄기는 몸을 꺾어 거북에게 달라붙어 거북을 구속했다.



"참으로,,, 살기등등하구나,,,, 친구였건만,,,,,."



거북의 몸 위에 선 따개비 노인이 불평했다.


노인이 다시 손뼉을 치자 자잘한 검이 생성되어 나무줄기를 하나씩 잘라냈다.


구속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기 전에, 황소는 수를 썼다.



[머어어어.]



돌연 하늘의 구름이 검게 바뀌었다.



'쿠르릉'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다.


막고자 자세를 잡았지만 당연하게도 낙뢰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



'콰지직'



거북과, 거북 위에서 거북을 보조하던 따개비 노인은

억 소리도 못 내고 기절하였다.


두 신령이 쓰러지자 비가 쏟아졌다.


방금, 황소가 만든 먹구름의 짓이었다.



"당한 거냐! 저대로?"



잔챙이를 처리하던 나리가 기겁했다.



"벼락을 맞으면 누구라도 진이 빠지게 마련이오."



암울한 상황이었다.



[하아, 하아....

망할 놈들, 괜한 힘을 뺐군.]



황소의 낯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신령을 상대로 몇초나 시간을 끌까 걱정하면서 타고 있던 구름 한점을 떼어냈다.



"가서 붙어라."



구름 조각을 던지니 과연, 황소에게 날아가 달라붙었다.


"늘어나라!" 하니 황소의 몸에 안착한 구름이 증식하였다.


끈끈이처럼 달라붙은 구름이 황소의 신체를 에워쌌다.



[뭐냐! 이 거추장스러운 건.]



저 구름이 황소의 움직임을 둔화시킬 터였다.



"총잡이 양반! 지금이오!"



신호를 던졌다.


그러나 기다려도 총성이 울리지 않았다.


총잡이 여인이 좋지 못한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한발만 어떻게든 쏴줄 수 없소?"


"비도 내리잖어. 무리여."



비 '가' 내려서가 아니라

비 '도' 내려서.


두려워 방아쇠를 당기기 싫은 와중 때마침 비가 내려줬단 것이다.


도대체 저 여인은 무엇이 그리 두려운가.


나리가 활을 쐈다.



[어딜!]



소가 일갈하자 그 자리에서 작은 나무가 하나 순식간에 솟아났다.


황소의 눈으로 직행하던 화살은, 방해물로서 태어난 나무에게 박혔다.



[이런 것쯤은....]



소가 몸에 붙은 구름에 입을 가져다대었다.


한입 두입 씹어먹었다.


별 도움이 안 되던 구속구는 별 활약을 못하고 사라져갔다.


나리가 한번 더 화살을 쏘았다.



[큭, 따갑지 않느냐.]



따갑단다.


아프다도 아니고 따갑다.


유효타가 없었다.


화살은 통할 길이 없었다.


도력은 구름을 모는데 대부분을 쓴지라 강력한 술법은 쓸 수 없었다.


무당 여인의 지팡이론 황소를 태울 화력은 내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총은 심지가 젖어 쏠 수 없었다.


저 덩치에 검이 먹힐 리도 만무했다.


황소가 지쳐있다는 점과 아직은 내가 던진 구름이 황소를 잘 잡아두고 있다는, 시한부적인 희망 밖에는 없었다.



"거북 신령을 믿었는데, 믿었는데...."



새삼 억울한 위기였다.



"괴물놈."



나리도 한탄 섞인 불만을 토했다.



"그, 도... 도사님."



뒤에서 무당 여인이 어깨를 툭툭 쳤다.


암담함과, 그럼에도 머리를 굴려야한다는 압박감에 젖어서 무당 여인을 보았다.



"왜 그러시오.

야한 농담이면 나중에 하시오."


"이것저것 생각해봤는데요...."



뭘 생각해. 야한 농담?


무당 여인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심장이 힘을 모으기에 이것보다 떠오르지가 않아서요오...."


"말해보시오."


"그게, 저기, 그...."



무당 여인은 우물쭈물거렸다.


비에 젖어 생기를 잃고 늘어진 머리카락 때문에, 색다른 느낌이었다.



"으으... 도, 도사님 지금 위험한 상황이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고, 단지 황소가 회복되길 기다릴 뿐이니까 그렇지 않겠소?"


"역시 그렇죠....

써야겠죠, 지팡이?"



무당 여인이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 반복하였다.


결심한 듯, 무당 여인이 내 옷자락을 약하게 쥐었다.



"가만히 계세... 계셔주세요."



무당 여인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무당 여인의 입도, 코도, 눈도 지척에서 느껴졌다.


연하고 촉촉한 무당 여인의 분홍색 눈망울이 내 눈 지척까지 다가왔다.


익숙한 살냄새가 났다.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못 해본 건데.


붉어진 걸 보니 부끄럽기는 무당 여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무당 여인을 밀어냈다.


누구 것인지 모를 실도 입술에서 떼어냈다.



"당, 당신 지금...."



'왜 나한테 한 게요.',

'지금 한 행동의 의미는 뭐요.',

'내가 아는 그런 의미요?' 등등.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수치를 딛고 다가올 용기를 낼 사람에게, 그런 잔인한 질문을 던질 뻔뻔함은 없었다.


수줍은 칭찬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혀, 혓, 혀놀림이.... 예사롭지 않구려."

 


무당 여인은 좌우를 둘러보고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댔다.


방금 나와 닿았던, 그 입술이었다.



"나리하고 포수님한텐 비밀이에요."



나는 정신이 얼얼하여 그런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



흥분한 지팡이는 시끄러웠다.



[오오! 오는구나! 반응이 온다!

이 정도면 된다, 어서 쓰거라! 이 몸을!]


"타올라라."



무당 여인이 명하자 지팡이 끝이 빛났다.


먹구름은 물러가고 비가 그쳤다.


황소의 몸에는 불이 붙었다.


가공할 만한 화력의 불이었다.



[크읏, 으윽, 아아악!

이 불, 이 불쾌한 불꽃! 지팡이 네놈이로구나!]



불쾌한 불꽃. 라임이 제법이었다.


황소가 우리 쪽을 노려보았다.


술법을 펼치려는 듯, 발을 들어올렸다가 내리치려했다.


땅에 닿기도 전에, 황소의 앞발은 형체도 없이 녹아버렸다.



'쿠웅'



앞발을 잃은 황소는 체중을 주체못하고 고꾸라졌다.



[제길, 제기일!

분명히 네놈이 신통력을 잃는 걸 봤고, 요괴에게 봉인 당하는 것도 봤거늘 어떻게 돌아온 게냐!!]


[황소 네놈이 죽을 뻔하다 부활해, 마을을 집어삼킨 것과 비슷한 이치가 아니겠느냐.]



지팡이의 답변은 만족스럽지 못했던 건지, 황소를 분노케 하였다.



[인간을 이용했단 게냐 네 이놈!]


[이용이라니! 협업이니라.]



이때쯤 황소는 뒷다리도 불에 타 완벽히 기동성을 잃었다.


황소는 이를 바득바득 갈더니 호기롭게 외쳤다.



[좋다, 이번엔 너희가 이겼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 법이니 두고 봐라!]


[10년씩 갈 일이 뭐 있겠느냐.

지금 보고, 이제 마지막으로 해야지.]



지팡이 끝이 한번 더 반짝였다.


수많은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황소 신령의 부하이던, 반인반우半人半牛의 소머리 요괴들의 발밑에서였다.


잔챙이들도 그런 식으로 숯덩이가 되었다.



[이놈이... 이놈이 내 분신들을...!]



말투엔 분노가 많이도 실려있었지만

거의 산송장이 되어버린 소 신령은 두렵지 않았다.



[10년... 10년만 지나면 너희에게 땅을 기는 고통을 맛볼 것이다.]


"그만하세요."



종이호랑이 신세가 된 소 신령에게 무당 여인이 다가갔다.


구름에서 내린 무당 여인은, 만삭에 가까운 배 때문에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렸다.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승자가? 패자에게 말이더냐?

싸움 한번 이겼다고 기고만장해져서 패자를 놀릴 셈이더냐?]


"그런 게 아니에요.

이 땅의 전前 신령으로서의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니까."



전前 신령.


대단한 아부였다.


하나 아부로만 치부하기엔 무당 여인의 눈은 비장했다.



"나리와 단둘이 있을 때 들었어요.

궁에는 여자가 된 남자가 많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짓입니까?"



조정에 ts가 돌았다고?


과연, 나리가 파견된 건 조정의 ts의 원인 규명도 겸하고 있었던 건가?


타락한 신령은 한동안 무당 여인을 째려보았다.



[하, 하하. 그렇군. 그것도 좋겠지.]



뭘 깨달은 건지, 신령은 하하 웃더니 대답했다.



[내가 한 게 아니다. 내 짓이었다면 뱃속에 아이를 품었겠지.]


"설마했건만...."



나리가 한숨을 쉬었다.


총잡이 여인은 모르는 눈치올시다.


둘이서만 알고 있었구만 이거.



"임신은 어떻게 시킨 거죠?"


[몇달 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마을 백성들에게 단체로 저주를 걸었다.]


"전 이 마을에 살지 않았는데요."


[네놈은 자질이 충만해보여서 따로 저주를 건 게고.]


"인천까지 찾아와서 말이십니까?"


[그래.]



활활 타는 것치곤 제법 대답하는 말투에 건강함이 실려있다.


신령 이름값 하는 녀석이었다.



[납득이 안 가느냐? 네놈의 자질이.]


"알고 싶었던 건 그게 아니니 괜찮습니다."



나도 구름에서 내려, 무당 여인의 곁에 섰다.


무당 여인이 슬쩍 내 손을 잡았다.


그녀가 귓가에 소곤거렸다.



"들으셨어요? 저주였다네요. 다행이에요."



저주인 게 다행이라는 무당 여인의 주장은 어쩐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또 이 여인은 야한 생각이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당연했다.



"불안했는데 저... 아직 처녀인가봐요."



으휴. 정말.


황소 신령은 귀엣말을 엿들었는지, 의미심장한 대꾸를 했다.



[그래, 다행이지. 한번 떨어진 꽃은 가지로 돌아갈 수 없으니.]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잿더미가 되어버린 신령의 몸통.


남은 것은 머리 뿐이었다.


머리만 남고도 꼬박꼬박 대답해주는 이 신통한 황소에게, 무당 여인이 고했다.



"당신, 그 분이 어디 가셨는지 아시죠?"


*


이번화로 낙호 마을편은 끝.
다음편부터 출산편 시작.

오랜만에 하는 백업이다....
이번화 원본은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