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이유는 잘 모르겠다

 

여느 날처럼 평범하게 공방에 틀어박혀서효력이 다한 시약들을 정리하고남은 것들을 한 번에 쓸 만큼씩 정리해서 담고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원기를 회복시키는 물약이라고 적힌폐기 직전의 물약을 마신 것이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열장은 방호 처리가 되어 있어 외부 요인으로 오염이 되는 일은 없다

 

약품을 공급받는 곳도오랜 시간 거래해 온 업체들뿐

 

언제 어디서어떻게 보냈는지까지 세세히 적힌 영수증을 매번 주고받는 터라검수 과정에서 놓칠 일은 없다.

 

그렇다면 원인은 나에게 있는 걸지도 모른다.

 

먼 조상을 포함한 내 혈통은 순수 인간이다

 

신화에 나오는 영웅이라던가이종족의 피가 섞이지도 않았다

 

그러므로혈통의 문제는 아니다

 

회복 물약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학회에 보고된 적도 없거니와있었다면 아마 지금쯤 그 장인은 어딘가의 지하감옥에서 소리소문없이 제거당했을 테니물약 자체가 가진 성질 역시 아닐 것이다.

 

아무튼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꽤 시간이 흘렀다

 

생각 없이 뒤쪽의 선반에 놓아둔 과일을 만지니물컹한 무언가가 손끝을 적셔오는 꺼림칙한 감각이 손을 감싼다

 

생각에 빠진 그 잠깐 사이에어제 사 온 과일이 썩어버린 것이다.

 

이미 이 시점에서내 정신이 느끼는 시간 감각이 어딘가 맛이 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습생일 적 읽었던불멸 이론을 다루던 논문의 한 구절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선천적인 원인이 아닌후천적 불멸의 형성으로 인한 시간 총량의 변화는뇌가 받아들이는 정보량과 처리 속도를 변화시킨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어떤 원리로든 신체의 법칙만이 변화해서조성이나 이치가 변화하지 않는 뇌는 정보량의 급격한 변화로 인한 정신적 붕괴를 피하고자 의도적으로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정보량을 조절한다.

 

그렇다면 아마 시간 감각뿐만 아니라생존과 관련된 감각 대부분이 영원의 시간을 마주하기에 최적화된 형태로 대체되었으리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정면에서 맞붙으면 절대 이길 수 없는 흡혈귀들이기습하면 너무나도 손쉬운 사냥감이 되는 것도아마 이런 것이 원인이겠지.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른 것 같다.

 

기분 좋은 햇살이 내리쬐던 창밖의 풍경은어느새 달빛만이 남게 되었으니.

 

이대로 동굴이나 버려진 고성에 틀어박히면 분명 수 세기는 어렵지 않게 지나가 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무얼 하면 좋을까.

 

출세는 큰 의미가 없다

 

내 경쟁자들은 아마 곧 죽어 없어질 테고눈 한번 깜빡이면 내가 속한 학파는 와해되어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새 마법사들이 주도하는 학파들이 주류가 되어 있을 테니.

 

교단에 가입하는 것 역시 무의미하다.

 

자기 신도가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을 바라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계에서의 세력 다툼에 있어서는신도들의 영혼이 곧 힘의 척도이므로.

 

변화하기 전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나로서는그들이 내게 괴물 사냥꾼을 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 할 정도로 무력하다.

 

악마는 영혼을 거둘 방도가 없으므로 계약을 맺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따라서 계약으로 힘을 얻을 수도 없다

 

그들의 무기 역시도 날 죽일 수 없었으니힘으로 징수하는 것 역시 불가능할 테지.

 

늙지도소멸하지도 않는 몸으로 강해지려면죽도록 노력해서정직하게 단련하거나완전한 육신을 주조해서 의식을 옮기는 그릇” 의식뿐.

 

평소에도 몸을 단련하는 것을 굉장히 게을리했던 나로서는당연하게도 후자를 선택했다.

 

나 같은 게 만날 단련해 봐야 호박에 줄 긋기일 거라는패배주의적인 사고방식도 한몫했지만.

 

아무튼이 일지는 혹여라도 내가 이 여정에서 완전히 미쳐버리거나의식을 완성한 날 사냥하는 데 성공한 운 좋은 사냥꾼들의 전리품이 될 것이다.

 

그런 날이 오게 될 것을 고대하며.

 

 

1004. 01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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