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순이는 시공간을 떠도는 방랑자야. 과거에도, 미래에도 갈 수 있고 평행세계 같은 곳에도 갈 수 있지. 신분 같은 것도 알아서 조정되어서 살아가는 데는 별로 문제가 없어.



하지만 떠난 시공간에 정착할 수 있으면 방랑자라 불릴 리가 없어. 말 그대로, 어느 시공간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떠돌기만 하는 거야. 정착할 법하면 해당 시공에서 내쫓기고, 또 정착할 법하면 내쫓기고…



어린 시절부터 그걸 반복하기를 수 년, 얀순이는 결국 달관해 버렸어. 이 세계에 내가 있을 곳은 없다고, 평생 떠돌아다니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가족도, 집도, 돌아갈 곳도 없는, 그것이 자신이라는 걸 받아들인 얀순이는 갈 곳이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도 더 이상 자신이 있을 곳이 없다는 생각에 결국 그 누구에게도 감정을 주지 않으면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게 돼.



그렇게 방랑의 세월을 이어가던 중 얀순이의 감정은 점점 메말라 가지. 더 이상 정을 붙이고 감정을 쏟을 대상도 없고, 관계를 맺지 않으니 더 이상 감정을 느낄 필요가 없어지면서 감정이 메마르기 시작한 거야.



그래도 아직 완전히 메마르지 않은 감정이 있다면, '행복한 가정에 대한 동경과 질투'. 이거 하나만큼은 메마르지 않았어. 애초에 시공간을 돌면서 가장 많이 본 건 행복한 가정이야. 그리고 얀순이는 그걸 누리지 못하고 있었지. 그러니 그걸 부러워하면서 가질 수 없는 자신의 상태에 열등감을 느끼면서 질투하는 건 당연하다 볼 수 있었어.



그렇게 끝없이 방랑을 계속하던 중, 얀순이는 얀붕이를 만나게 돼. 결국 온갖 것에 지쳐서 자살하려는 찰나, 목숨을 끊으려는 얀순이를 얀붕이가 구해 주게 되지.



처음에는 얀붕이를 신경쓰지 않았어. 어차피 어떤 관계를 맺든 끊어질 뿐이라고 생각했고, 여태껏 그래왔으니까. 어떤 관계를 맺더라도 자신은 세계에서 잘려나가고, 모두 자기를 잊어버렸으니까.



하지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세 달이 지나도 얀순이는 잘려나가지 않았어. 그동안 집도 얻었고, 신분도 얻었고, 통장 같은 것도 얻었는데 이상하게 세계에서 잘려나가지 않는 걸 알게 된 얀순이는 이상함에 그동안 하고 있었던 집콕을 그만두고 밖으로 나가게 돼.



그리고, 자신이 자살을 시도하려고 했던 곳에서 우연찮게 얀붕이를 다시 만나게 되지.



그리고 얀순이는 얀붕이를 다시 만나면서 본능적으로 깨닫게 돼.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얀붕이는 얀순이가 이 세계에 남게 해 주는 쐐기가 되었다는 것을 말이야.



그 이후로 얀순이는 얀붕이와 자주 만나며, 얀붕이에 대한 여러가지 것을 알게 돼.



얀붕이의 누구에게도 상냥하지만 남이나 스스로에게 피해를 주면 용납하지 않는 성격 탓에 자주 다치지만 친구도 많다는 거라던가, 가저 환경이 그리 유복하지는 않지만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던가 등등하는 걸 말이야. 그런 과정에서 얀순이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한 이유는 없고, 얀순이 본인에게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기도 하지.



그런 말까지 들으며 어느새 얀순이는 얀붕이를 사랑하게 돼. 엄청난 방랑 끝에서 겨우 만난 남성 친구가 이리도 상냥하고 수많은 세계에서 쫓겨나며 자기 목숨까지도 끊으려고 한 자기도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는 얀붕이의 상냥함에 점점 사랑에 빠지는 거지.



그리고 그 감정을 자각한 후로 열심히 고백 멘트까지 생각하면서 얀붕이를 만나러 간 얀순이에게, 얀붕이에게 고백을 박는 얀진이가 보이는 거지.



유일한 친구이자 자신에게도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을 잃어버릴 거라며 불안에 빠진 얀순이가 고백의 결과 같은 건 듣지도 않고 얀붕이를 납치해서 감금해 버리는 게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