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7월의 아침.

뉴스에서 나오는 자극적인 기사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게 지내는 사람들의 일상이 지속되고 있던, 그런 어느 날.

-안녕하십니까, 인류 여러분.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돌연 어떤 '음성'이 들렸다.

-저는 마왕이라고 불리는 자입니다.

직후, 인류는 지옥에서 올라온 마魔를 마주했고,

"...엄마?"

그날, 한 소녀는 가족을 잃었다.


*

7년 전, 마왕과 함께 괴물들이 강림하며 인세에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인류의 문명이 짓밟히고, 국가가 무너지며, 어제 만났던 인간이 오늘 시체가 되어있는 시대.

허나, 신은 아직 인간을 버리지 않은 걸까.

각종 화기를 동원해야만 간신히 죽일 수 있는 괴물을 맨몸으로 쓰러뜨리는 초인들이 나타났고, 그들은 괴물들에 대항하며 생존자들을 하나로 모았다.

헌터라 불리는 초인들과, 끝없이 솟아나는 괴물들.

서로를 말살하기 위한 두 세력 간의 거대한 전쟁은 몇 년간 지속됐고, 지지부진해진 전쟁에 마왕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놈만 쓰러뜨리면 다시 세상을 되찾을 수 있다!

그 생각이 무너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 남미에서 모습을 드러낸 마왕은 자신을 잡기 위해 모인 헌터들을 보며 가볍게 손짓했고,

희망을 품고 모인 수많은 헌터들은 그대로 절망을 뿌리며 절명했다.

지금까지의 그 어떤 괴물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압도적인 힘.

그 모습을 본 모두가 더이상의 저항을 포기했다.

꺾이지 않는 것은 단 4명뿐.

인류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어떠한 목표를 위한 갈망, 죽기 싫다는 생존 욕구, 혹은 개인적인 욕망까지.

각각의 이유를 품고, 세계최강이라 불리는 4명의 헌터가 뭉쳤다.

단 하나의, 불가능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인류 최후의 칼날이 마왕의 목을 향해 돌진했다.


**


중세시대... 아니, 그보다는 판타지 영화에 더 어울릴 것 같은 다 부서진 고성.

그 중심에는 피를 토하며 쓰러진 마왕과, 그를 둘러싼 4인의 헌터들이 있었다.

"하하하!!! 훌륭하군요,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나 성장하다니, 지옥의 대공들도 여러분만큼 빠르게 성장하진 못했을 겁니다."

"닥쳐! 이 빌어먹을 자식아!"

온몸에 흘러내리는 피에도 웃으며 말하는 그를 보며 강철보다 단단한 근육으로 무장한 전사, 에드워드가 응수했다.

"신께서 너를 용서치 않으실거다, 죽음의 이후에 안식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말도록."

"하하! 니 몸을 분석해서 과학의 발전에 이바지하게 해주지!"

바티칸의 마지막 불꽃이라 불리는 그레이스는 싸늘한 말로 저주를 내뱉었고, 비윤리적 연구로 과학계에서 퇴출당했던 레이첼은 협박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그 이상 입을 열지 않는게 좋을겁니다."

그리고, 하늘을 베어냈다고 알려진 검사, 유지아의 검이 그의 목에 닿았다.

"이런, 다들 유머를 모르시는군요."

그야말로 벼랑의 끝, 삶의 최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

허나 그럼에도 그의 입에 걸린 웃음은 내려갈 줄 몰랐다.

마왕은 자신을 바라보는 4명의 인간을 보았다.

그야말로 찬란한, 종족의 틀마저 뛰어넘은 아득한 재능이다.

한명한명이 영웅이라 불리기 충분한 강함을 지녔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앞으로 200년정도겠지.'

난세의 영웅이라고 해도 결국은 인간, 저들의 육체또한 노화를 피할 수는 없었다. 수백년 즈음이면 모두 죽어 한 줌의 살점도 남지않으리라.

'그리고 그때야말로 인류는 멸망한다.'

마왕은 자신의 아바타(avatar)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 육체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힘을 담은 인형에 불과하다. 지옥에 있는 본신이 죽지 않는 이상 그는 몇번이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저 시간 문제일 뿐.

이미 인류의 기반은 파괴된지 오래. 설령 그것을 재건해낸다 해도, 영웅이 사라지고 평화라는 단물에 취한 수 백년뒤에 그들을 막을 존재는 없으리라. 

그 사실을 확신하고 있던 그였기에, 그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있습니까."

마침내 백발의 검사가, 그의 앞으로 칼을 내밀었다

유지아.

한국인 출신의 헌터이자, 단연코 4인의 결사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리더.

그의 몸에 난 상처또한 모두 그녀의 작품이었다. 아마 그녀가 없었다면 이 싸움은 성립조차 되지 않았으리라 

'앞으로 백... 아니, 수십년이면 내 본신도 따라잡았겠군.'

허나 평화를 되찾은 세계에 그런 미래는 도래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저 찬란한 재능이 조금은 아까워져, 마왕은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당신이라면 반려로 삼아도 됐을텐데, 이거 아쉽게 됐군요."

"뭐...?"






일순.

마왕인 그조차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찰나의 순간.

그녀의 검이 빛처럼 움직여, 결사대 3인의 목이 베었다.

"무슨...?"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눈앞이 흐려지며 그의 의식이 꺼졌고.

마지막으로 그에게 보였던 것은 마치 무언가를 참기 힘든 것처럼.

동료의 피를 묻힌 채, 그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유지아의 얼굴이었다.


***


뚝- 뚝-

제대로 잠그지 않은 세면대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 허나 그보다 더 진한 소리.

물보다는 조금 더 밀도가 높은 무언가가 떨어지는 듯한 그 소리에, 마왕은 눈을 떴다.

"...."

낯선 천장, 덕지덕지 쳐진 커튼으로 가려진 벽.

철컥- 철컥-

그리고 쇠사슬로 묶여있는 몸까지.

게다가 헌터들과의 싸움의 영향인지, 몸에선 조금의 마력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된거지?'

눈을 감고 기절하기 전 기억을 뒤져보자, 자신을 이렇게 만들만한 존재에 대한 가닥이 잡혔다.

'유지아? 하지만 대체 왜?'

인류의 희망이라고 불리던 그녀가 동료를 베고, 자신을 이런 곳에 납치할 이유가 뭐란말인가?

그리고 동료의 머리를 자르던 순간의 속도는... 자신과 싸울 때와는 격이 다른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힘을 숨긴건가? 나와 싸울 때조차?'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걸 느끼며 눈을 뜨자, 눈 앞에 고민하던 대상이 나타나있었다.

"일어나셨군요!"

"아씨발깜짝이야!"

심장 터지는 줄 알았네!

놀란 그를 바라보며, 유지아는 일전의 미소를 짓고있었다.

아름다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피에 물들여진 모습이 겹쳐져 섬뜩하게 느껴지는 미소.

허나 그가 가장 의문이었던 것은, 자신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였다.

"아, 배고프시겠구나! 일단 식사부터..."

나긋나긋한 말투와 부드러운 목소리는 마치 연인, 아니 그보다는 누군가를 연모하는 여자아이를 연상케 했다.

이대로 가다간 더이상의 진전이 없을거라 생각한 그는 결국 유지아의 이야기를 끊고 결국 입을 열었다.


"이봐, 이건 무슨 장난이지?"

"........네?"

"우린 이렇게까지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을텐데 말이지. 아, 혹시 나에게 원한이라도..."

"그게 무슨 말이죠?"

싸늘한 정적.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짐과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살이 베일 것만 같이 날카롭게 얼어붙는다.

"저흰 결혼한 사이잖아요? 저에게 좋아한다고, 낭만적으로 청혼하셔놓고 잊어버린건가요? 왜? 왜? 왜?"

"컥...! 무슨..."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유형화된 살기가 점점 그를 사방에서 조여왔다.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일까, 생각할 여유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육체는 생존을 향해 발버둥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호흡이 멈추고, 감각이 하나둘 사라져간다.

"끅, 그만..."

그 얇은 생명이 끊기기 직전, 주변의 분위기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렇죠, 제가 너무 급했네요."

그가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되돌리고 있을때, 그녀는 얼굴을 들이밀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마왕님은 연애부터 천천히 하고싶은 타입인가요? 그럼 저도 거기에 맞춰드릴게요♪"

조금 전의 일을 겪으며 그는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본신이, 정확히 말하자면 지옥 그 자체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마치 무언가가 존재 자체를 소멸시켜버린 것처럼, 텅빈 공허만이 느껴진다.

이런 짓을 벌일 존재가 누굴지, 이미 직감적으로 깨닫고있었다.

마왕은 눈앞의 여자를 보며 생각했다.

"앞으로는 쭉 함께, 사랑을 나눠봐요♥︎"

아무래도 자신은 어마어마한 미친년에게 잡혀버린 모양이라고.

그렇게 무력한 인간이 되어버린 그의 인생(人生)이 시작되었다.

****

해가 뜨고, 도로에 차들이 나타나며, 사람들이 각자의 목표를 위해 분주히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지극히 평범한 아침의 광경.

대부분의 사람이 그 안에서 '보통'을 살아갈 때, 그곳에조차 들어가지 못해 바닥을 구르며 발버둥치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유지아는 후자의 인간이었다.

퀴퀴한 10평 남짓의 반지하.

벽지에 핀 곰팡이의 냄새와 벌레가 기어다니는 소리로 가득찬, 이 좁은 공간 안에서 손과 뺨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짝-!

벌게지는 볼과, 어머니의 원망에 찬 욕설들.

그녀에게는 참으로 익숙한 광경이다.

"씨발... 너도 그놈이랑 똑같아... 그냥 꺼지라고!"

"...."

무엇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을까.

외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속도위반을 하며 선택한 부모의 결혼?

첫 출산으로 인한 모친의 산후우울증?

 육아의 책임을 버티지 못하고 떠난 그녀의 아버지?

혹은 그 모든 것일까.

확실한 것은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것따윈 어느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멋대로 세상에 만들어져, 태어날 때부터 평범이라는 수식어조차 가지지 못한 비루한 인생.

그녀에게 있어서 삶이란 지옥과도 같았다.

"...다녀오겠습니다."

집에서 나와도 갈 곳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방향을 정하지 않고 발을 움직일 뿐.

어디로 갈지도, 눈앞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겉돌기만하는 그녀의 인생과도 같은 발걸음이었다.

끝내 어느 다리의 위에 도착했을때, 그녀는 발을 멈추곤 아래를 내려다봤다.

"죽을까."

몇번이고, 몇번이고 내뱉은 그 말.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같은 희망은 진작에 버렸다. 

노력이란 어디까지나 올라갈 계단이 있는 자들의 특권이다. 그녀의 앞에 있는건, 계단 따위가 아닌 거대한 절벽.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조금의 희망조차 허락하지 않는 절망이었다.

늘 습관처럼 뱉던 말이었건만, 오늘따라 자신의 집처럼 눅눅한 날씨의 탓일까, 거슬리는 도로의 소음 때문일까.

그녀의 몸이 조금씩 앞으로 기울었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점점 기우는 그녀의 몸이 무게중심을 잃어버리려는 순간.

-안녕하십니까, 인류 여러분.

-저는 마왕이라고 불리는 자입니다.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목소리가 들렸고, 

그날, 그녀의 인생은 아주 큰 변화를 맞이했다.


*****

"...엄마?"

갑자기 나온 괴물을 피해 집으로 온 유지아는 끔찍한 참상을 목도했다.

서걱서걱-

작은 벌레들에게 조금씩 파먹히고 있는 그녀의 모친.

반쯤 벌레로 뒤덮힌 그 눈동자는, 마치 죽은 생선처럼 탁해져만 있었다.

그 광경을 멍하니 보다가, 그녀는 바깥으로 발을 옮겼다.


"----------!!!"

"꺄아아악!"

괴물의 울음소리가 울리고,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한명의 인간이 죽는다.

그 지옥도와 같은 광경을 보며, 유지아는,




지금껏 지은 그 어떤 웃음보다, 환한 미소를 짓고있었다.




구원이란 무엇일까?

누군가에겐 위기에 처한 자신을 구해주는 것이고, 누군가에겐 자신에게 무상의 지원을 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모두를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 구원이 될 수 있었다.

세계의 모든 인간이 단 한명도 빠짐없이 지옥의 구렁텅이에 쳐박힌 그날.

한 소녀는 부모를 잃고, 비로소 구원받았다.




"...마왕님."

유지아는 두발을 움직였다.

자신을 구원해준 존재를 찾기위해서. 그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피와 시체로 단장된 아스팔트 위를 걷는 그녀의 얼굴에는,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

옛날에 올렸던 거 재업


지금보니까 좀 오글거리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