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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



 전직 귀족의 체면 같은 건 진작 내던져버리고, 바락바락 목을 울렸다.


 양팔을 뒤로 구속당한 상태로 어딘지 모를 방 안에 감금까지 당한 지금으로선.


 이렇게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기 때문이었다.



"몰락한 가문의 별 볼 일 없는 계집 따위가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감히!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인지는 몰라도 네년 뜻대로는 절대 안 될걸!"



 수차례 몸을 들이박아 봤으나, 굳게 닫힌 문은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거센 초조함이 목 안을 갉작였다.


 추방자의 신원을 숨겨주는 것이나 무거운 중죄인지,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가 모를 리는 없을 텐데.


 자칫 잘못하면, 지금껏 그녀가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탈출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뾰족한 수단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다못해 이곳이 어디인지라도 알 수 있으면, 탈출의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을 텐데.


 경추를 꿰뚫는 전극을 느꼈을 땐, 의식이 이미 아득해진 지 오래였고. 


 불현듯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이곳으로 옮겨진 뒤였다.



"제길!"



 흥분을 가라앉힌 뒤, 천천히 사고를 정리했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다 알고 왔다고.


 그 말인즉슨, 내가 그녀에게 행한 '조치'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의미했다.


 과거 마왕을 토벌해 냈다고 일컬어지는 11인의 영웅. 


 그들의 후손이 조상의 위대한 핏줄로부터 계승받은 신위급 마법을 사람들은 '영걸의 권세'라고 우러르며 칭송해 왔다.

 

 그중 우리 카를로스 가문이 계승 받은 건, 타인의 정신과 기억을 개찬할 수 있는 정신 지배 마법. 


 적합한 조건만 갖춰지면, 온갖 사악한 악행을 저지르는 건 일도 아닌, 그야말로 삼류 악역에게 걸맞은 힘.


 나는 그러한 가문의 권세를 십분 활용해, 가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을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장기 말로 이용해 왔다. 

 

 그녀 또한 그런 장기 말 중 하나였다.


 목적을 이루고 나면 헌신짝처럼 내다 버릴 한낱 소모품.


 때문에 그녀의 머릿속에서 나와 관련된 기억을 모두 개찬해 둔 것도, 그런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한 같잖은 위선에 불과했다.


 

"후우····."



 흐트러진 숨을 고르며, 한동안 의식을 다잡았다.


 아카데미에서 추방당한 그날. 폐형을 받고 마력을 몰수당한 지금의 내겐, 더 이상 누군가의 기억을 개찬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니 당장은 그녀의 기억이 얼마나 되돌아왔는지, 그간의 정황을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지, 신중하게 판가름해야 했다. 


 만일 그간의 기억이 전부 되돌아온 것이라면, 어찌할 방도가 없었지만.


 기억의 일부분만 되돌아온 것이라면, 아직 상황을 수습할 여지가 있었다.


 똑똑.


 

"들어간다."



 벌컥! 


 바로 그 순간, 짧은 노크와 함께 누군가가 방 안에 들어왔다.



"윽!?"



 털썩.


 문에 머리를 기대고 서있던 터라, 문이 열림과 동시에 바닥에 나자빠지고 말았다.

 

 팔이 묶여있지 않았으면, 간단한 낙법 정도는 취할 수 있었을 텐데.


 저항 없이 바닥에 나뒹구는 내 모습이 참으로 처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쓸데없는 소란 피우지 말고. 아가씨가 돌아오실 때까지 얌전히 있어라."


"····!"



 방 안에 들어온 건, 그녀의 호위 기사로 추정되는 건장한 사내였다.


 아카데미에선 못 보던 얼굴이었던 걸로 미루어 볼 때, 아마 내가 추방된 이후에 고용된 기사.


 그것도 상당히 높은 직분인 기사인 것으로 보였다.


  

"아가씨께선 네놈을 이 자리에서 단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할 것을 내게 명하셨다. 그러니 내가 지켜보고 있는 이상, 허튼수작 부릴 생각은 꿈에도 말도록."



 엄중한 경고와 함께 칼에 손을 올려다 놓는 품새가, 뜻을 거스르면 당장 다리라도 잘라버릴 기세였다.


 워낙 업보를 많이 쌓아온 몸이라, 남들에게 혐오 어린 시선으로 바라봐지는 건 여러모로 익숙해져 있었지만.


 저 흉흉한 눈초리 속에 번들거리는 적의는 유달리도 노골적이었다.

 


"카를로스 J 루드비히. 네놈에 대한 악명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다. 위대한 영웅 가문의 후계임에도 온갖 악행을 저질러 종국에는 제국에서 추방까지 당한 제국의 수치."



 과연 그렇게 된 거였군.


 제국 전역에 퍼진 내 악명은 이제 와선 모르는 사람 쪽이 더 드무니까.


 주인을 지키는 기사의 입장으로선, 지극히 모범적인 반응이긴 했다.



"아가씨께서 어떠한 연유로 네놈 같은 사내를 찾는 건지 모르겠지만. 명심해라. 내 검은 지금 당장이라도 네놈을 베어버릴 수 있다는걸."



 살기등등한 으름장에 잠시 언짢은 침묵을 짓씹었다.


 사람을 이런 외딴 창고에 감금해 둔 것도 모자라, 호위 기사까지 배치해 두다니.


 돈 낭비. 인력 낭비. 시간 낭비.


 동전 한 닙 허투루 쓰는 일 없던 그녀가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칼을 삼킨 사자 인장! 네놈 설마, 황금 사자 기사단 출신인가!"


"그렇다만."

 

 

 가뜩이나 암울한 상황이 더욱 암울해지는 정보였다.


 황금 사자 기사단. 


 앞뒤 꽉 막힌 인간 천지인 기사 무리 중에서도, 바늘구멍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융통성 없는 족속들. 

 

 주인에게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심장을 도려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명성은 내 악명만큼이나 자자했다.



"하! 천하의 황금 사자 기사단이 몰락한 가계의 문지기 노릇이라니. 제국의 명성도 땅에 떨어졌군!"

 

"뭐라?"

 


 비릿한 조소를 곁들여 도발하자, 녀석의 표정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놀려대는군.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보지?"


"입은 본래 말을 위해 뚫려 있는 거 아닌가? 네놈처럼 먹는 데만 쓰는 머저리들에게는 아닐 테지만!"


"호오."


  

 밑져야 본전으로 던져본 건데.


 기대했던 것 이상의 반응이 되돌아왔다.


 상대가 그 황금 사자 기사단인 이상, 어설픈 애원이나 교섭은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일으키기 십상.


 그러니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은, 주특기인 도발로 탈출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네놈에게는 적합한 교육이 필요할 것 같군."


"크윽!"



 바닥에 나뒹굴던 내 몸을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린 녀석이 별안간 살벌한 발언을 뱉었다.


 쿵!



"커헉!"


 

 이윽고, 허공에서 대롱거리던 몸이 순식간에 벽에 매다 꽂혔다.


 등의 통증도 통증이었지만, 공기가 통하는 길을 정확히 누르고 있는 팔꿈치 때문에 당장 숨 쉬는 것조차 고역이었따.



"안심해. 죽이지는 않을 테니. 뭐, 죽고 싶어질 정도로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뿌옇게 흐려지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여, 황급히 정보를 주워 담았다.


 출입문 쪽에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 보초는 이놈 하나뿐.


 그렇다는 건, 이놈만 돌파할 수 있으면, 탈출의 가망은 있었다.


 짤랑. 짤랑.


 녀석의 허리춤에서 덜렁거리는 열쇠 꾸러미가 그러한 믿음에 확신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켁! 커헉! 크륵!"


"잘나신 귀족 나으리께서도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양새는 꼴사나운 법이로군."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은 의식을 어떻게든 기워 붙이며, 열쇠 꾸러미 쪽으로 은근슬쩍 발을 뻗었다.


 저쪽이 훈련받은 정예라면, 이쪽은 온갖 고문과 고통에 길들여진 몸.


 정면 승부는 택도 없겠지만, 인내심 싸움이라면 나름 승산이 있었다.



"고트····?"



 바로 그때였다.


 여인의 간드러지는 음성이 싸한 밤바람처럼 귓가에 내려앉은 건. 



"헛. 아가씨. 돌아오셨군요."


"쿨럭! 쿨럭!"



 목을 누르고 있던 어깨가 사라진 틈을 타, 그간 못다 한 숨을 황급히 몰아쉬었다.


 아무래도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그녀가 되돌아온 모양.


 덕분에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이로 인해 탈출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추한 꼴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녀석이 주제도 모르고 입을 놀리길래, 한창 예의범절을 가르치던 중이었습니다."


"허억····. 허억····."



 고개를 바닥에 처박은 채로 연신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얼추 귀에 들어왔다.


 엄밀히 말하면 대화는 아니긴 했다.


 떠드는 건 사내뿐이고, 그녀는 사내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으니까.



"····아가씨?"



 그 삼엄한 침묵으로부터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걸까.


 별안간 사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그런 사내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시선은 차가운 바닥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내게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고트. 칼 좀 빌려주겠어요?"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당신의 칼 말이에요. 제게 좀 빌려주실 수 있나요."


"아, 앗. 네. 알겠습니다."


 

 그 의미심장한 제안에도 사내는 자신의 칼을 스스럼없이 건넸고, 그녀는 제 키만한 거대한 칼을 부드럽게 건네받았다.


 바로 그 직후.


 콰직!


 육중한 금속이 뼈와 살을 짓이기는 소음이 고막을 들쑤셨다.


 털썩!


 갑옷을 걸친 장성이 힘없이 바닥에 나뒹굴었고, 검붉은 선혈이 벽에 쫙하고 퍼졌다.


 하지만 그러한 광경은 곧이어 벌어질 참극을 알리는 경종에 불과했다.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칼집에 들어간 무거운 철검을 바닥에 무방비하게 널브러진 머리에 여러 차례 내려찍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감정이 없는 기계인형을 보고 있는 듯했다.


 절로 의식이 마비되고, 몸이 얼어붙었다.


 뇌가 눈앞에 펼쳐진 참혹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걸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그, 그만해! 에델! 그러다 진짜로 죽어!"



 황급히 몸을 날려, 그녀와 사내 사이를 가로막았다.


 사내의 생사 같은 건 솔직히 어떻게 되든 내 알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살인마가 되는 것만은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녀가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이 되는 것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나를 봐! 아무렇지도 않아! 멀쩡해! 멀쩡하다고! 정신 차려! 에델! 에델!"



 내 혼신을 담은 절규가 효과가 있던 걸까.


 그녀의 탁한 눈동자 속에 점차 빛이 되돌아오고, 육신에 깃든 살기가 점차 사그라드는 것이 느껴졌다.


 쟁그랑!



"루드···· 비히····?"

  


 이윽고, 힘없이 칼을 바닥에 떨어뜨린 그녀가 내 이름을 불렀다.


 

"괘, 괜찮아요? 루드비히? 어디···· 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


"····!"



 그 애달픈 선율로부턴, 불과 조금 전까지 사람의 머리를 짓이기던 자의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냥함이 가득 묻어나오고 있었다.



"미, 미안해요. 흐윽! 제,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또····. 흐윽! 으읏!"



 눈물을 글썽거리며, 사랑하는 이의 뺨을 자상하게 어루만지는 가녀린 여인. 


 그 발치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진 머리와 검붉은 피로 얼룩진 철검이 길가의 낙엽처럼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