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villain)은 본디 평범한 농민을 뜻하는 용어였다고 한다.


 빌랭(Villein)이라고 불리던 그들은 땅을 담보로 영주 밑에서 밭일을 도맡는 일종의 농노였는데.


 태생부터가 자유민의 밑 신분이었던지라, 빌랭들은 영주의 허가 없이는 주어진 땅을 벗어나는 것조차도 불가능했다고 한다.


 때문에 추레한 생활을 못 견딘 일부 빌랭들이 시골을 지나가는 여행객이나 도시민을 상대로 이따금 강도질이나 겁간을 일삼곤 했는데. 


 그러한 악행들이 켜켜이 쌓여 빌랭들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걷잘 수 없이 악화되어만 갔고, 그 의미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질된 것이라고 한다.


 처음 그 사실을 책에서 읽었을 때, 피식하고서 웃음이 새어 나왔던 걸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빌런.


 현대인들이 두려워하고 때론 선망하기도 하는 그 거창한 명칭이, 사실 그 시절 어디에나 흔히 널린 농민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니.


 그렇다면, 인적이 드문 한적한 시골 마을은 빌런이 탄생하기에 최적의 장소라는 걸 텐데.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후우····."



 피로한 숨을 내쉬며, 허름한 의자 위에 무거운 몸을 앉혔다.


 성치 못한 몸을 3일 밤낮 쉬지 않고 혹사한 탓일까.


 긴장이 풀리자, 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래도 이 정도면 당분간은 땅바닥에서 입 돌아갈 일은 없겠네····."



 이렇다 할 연고 하나 없는 몸으로는 당장 누울 집을 마련하는 것도 상당한 고역이었다.


 예전이라면 시종들이 해줬을 궂은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하고 있으니.


 내가 그간 얼마나 귀하게 자라왔는지가 또 한 번 뼈에 사무치게 실감했다. 


 어쩌면 낙차 때문인지도 몰랐다.


 나라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귀족 가문의 후계가 하루아침 사이 무일푼 알거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니까.


 별 차이를 못 느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긴 했다.



"1년인가····."



 그래, 벌써 1년의 세월이 흘렀다.


 언젠가 우연히 보게 됐던 소설 원작 애니메이션의 삼류 악역 가문. 


 카를로스 가문의 차남으로 전생한 내가 모든 걸 잃고 아카데미에서 추방당하게 된 지가.


 돌이켜 생각하면, 참으로 숨 가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본래 이 작품의 악역이었던 형이 병에 걸려 요절해 버린 이후, 어영부영 그 역할을 대신 떠맡아 반평생을 삼류 악역으로 살아왔다.

 

 한 줌의 후회도 없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일 테지만, 적어도 미련은 없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그게 하필 나였던 것이었을 뿐이었으니까.


 그 과정에 잇따르는 감정은 아직 시간에 여과되지 않은 부속물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눈을 감을 때마다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이 그날의 기억이었다.


 내가 그녀들에게 저지른 일. 그녀들이 내게 저지른 일.


 그 모든 기억들이 안검 안쪽에 짙게 눌어붙어,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



 끼익.


 선득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몸이 편해진 탓일까. 아무래도 잡생각이 들고 만다.


 노동에 지친 몸은 절실히 휴식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머리가 시끄러운 것보단 몸이 아픈 것 나았기에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때마침 일거리도 하나 남아있는 참이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이 근방에 알림용 덫을 설치해 놓는 작업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인적 드문 숲의 작은 별채에 덫까지 설치해 놓는 건 다소 유난일지도 모르나, 아카데미에서 추방당한 이후, 제국 시민으로서의 자격까지 모두 박탈당한 나로선, 작은 위험 하나하나도 쉽사리 간과할 수 없었다.


 내 신변은 이 나라의 그 어떤 법으로도 보호 받을 수 없다.


 설령 살인을 당한다해도, 납치를 당해 평생 노예로 부려 먹힌다 해도, 그 어떤 불만도 제기할 수 없는 존재가 지금의 내 위치였다.


 더군다나, 삼류 귀족이었던 시절, 워낙 원한 살 만한 일을 많이 해왔던 터라, 이런 최소한의 안전장치 없이는 도무지 마음 놓고 잠에 들 수 없었다.



"자, 그럼····."



 딸그락! 딸그락! 딸그락! 딸그락!


 바로 그 순간, 문 바깥 쪽. 사방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가 내 의식을 쭈뼛 곤두세웠다.



"이, 이건····!?"

 


 덫이 작동한 소리.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설치해 둔 덫 전부가 작동한 소리였다. 


 이 근방에 덫을 건드릴만한 짐승이 없다는 건, 사전에 확인을 끝마쳐둔 지 오래였다.


 더군다나 이곳은 사람의 왕래가 극히 드문 시골 마을의 외곽 자리.


 이 두 가지 사실이 명시하는 사실은 명확했다.


 추격자다. 그것도 그 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크윽!"



 부리나케 자리를 박차, 황급히 짐을 꾸렸다.


 추격자가 누구인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


 그런 자질구레한 의문들은 잠시 접어둔 채, 탈출 루트를 짜는 것이 온 신경을 할애했다.

 

 하지만 그런 번잡한 사고는 내가 문고리를 붙잡은 그 순간, 고장난 시계처럼 정지해 버렸다.



"루드비히····."



 낡은 목재 문 너머로 간드러진 내 이름. 나를 부르는 목소리.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도 못 미칠듯한 그 부름은 역설적이게도 거대했다.


 

"이, 이 안에 있는 거 다 알고 왔습니다····. 이 문 열어주세요····."



 베일에 싸여있던 추격자의 정체가 완벽히 구명되는 순간이었다.


 잊을 수 없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청명한 목소리를. 위풍당당한 면모를. 고귀한 기품을. 숨이 턱 막힐 듯한 아름다움을.


 고작 1년 남짓한 시간 따위로 잊을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문···· 열어···· 주세요····."



 이런 낡아빠진 문 따위 얼마든지 부수고 들어올 수 있을 텐데.


 그럼에도 내게 유예를 쥐여준 건, 자비일까. 동정일까.


 뭐가 됐든, 이 문을 열기 전까진 알 수 없는 감정이라는 사실만이 명확했다.




◈◈◈




"아니, 이게 누구신가. 고매하신 라이트로드가의 영애님 아니야! 귀하신 분이 이런 누추한 곳까지 대체 어쩐 일로?"



 동요를 감추며, 황급히 배역에 몰입했다.


 무려 1년 만에 하는 연기라 걱정이 앞섰는데. 


 반평생을 걸친 연기 인생이 헛되지 않았는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혀가 잘 굴러갔다.


 

"저렇게 수행인들까지 잔뜩 대동하고서 말이야. 설마, 내 몰골을 다함께 비웃으러 오셨나? 못 본 사이에 많이 영악해지셨는걸?"



 내게 이런 페이소스가 있는 줄, 나조차도 알지 못했다.


 얼굴만 팔리지 않았더라면, 어디 극단에 입단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 서론은 이만하면 됐고. 이제 슬슬 이유를 들어봐도 될 것 같은데? 두 번 다시 꼴도 보기 싫다던 더러운 낯짝을 제 발로 보러오신 이유를 말이야."


"····."



 말에 감정을 한가득 실어 비아냥거리자, 그녀가 분하다는 듯 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기억과는 확연히 남다른 그녀의 차림새 때문일까.


 그런 분통 어린 모습마저도 한 폭의 그림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라이트로드 에델바이스.


 선조의 도박 빚으로 파산해 버린 자신의 가문을 본인 대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작중 내내 피땀 흘려 고군분투하는 이름뿐인 귀족 영애.


 모름지기 귀족이라면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한다며, 길바닥의 잡초를 뜯어 먹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별종 중의 별종으로, 팬덤에서는 흙수저 영애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등장인물이었다.


 덕분에 판에 박힌 삼류 악역을 연기하던 나와는 여러모로 부딪힐 일이 많았고, 그로 인한 악연도 상당히 뿌리 깊은 편이었다.



"옷을 보아하니, 오늘은 좀 괜찮은 쓰레기통을 찾은 모양이네. 잘 어울려. 돼지 목에 어울리는 진주도 있는 법이로군."


"····."



 연이은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뭔가가 이상했다.


 원래부터 이런 원색적인 비난이 먹히는 상대가 아니긴 했으나, 이렇게나 신경 머리를 박박 긁어대면, 가벼운 잽 하나 정돈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애초에 그렇게나 말이 많던 그녀가 내 비난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지 그래? 아니면, 이제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보게 된 귀족 영애께서는 나 같은 불가촉천민이랑은 말 한마디도 섞기 싫다. 뭐 그 말인가? 참 박정하군. 내게도 이야기를 들을 권리 정도는 있다고 보는데? 지금 네년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운 재산은 전부! 원래 우리 가문의 것이었으니까!"


"····!"



 끈질긴 시도 끝에 드디어 입질이 왔다.


 아무래도 가문을 걸고 늘어진 생트집이 제대로 먹혀든 모양이었다.


 몰수당한 우리 가문의 재산이 그녀의 가문을 일으키는 데 사용된 건에 대해선, 사실 한치의 불만도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전부 나의 자업자득이었고, 애초에 일이 그렇게 굴러가도록 내가 꾸민 것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니 어지간해선 그녀 앞에서 가문에 대한 걸 입에 담지 않으려 했는데, 이 불편한 담화를 빨리 끝내기 위해선 이 정도 강수는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녀가 사용인들을 집 문 바깥에 대기시켜 놓아서 다행이었다.


 만약 이 저속한 힐난이 다름 사람 귀에 들어갔다간, 그 즉시 못매를 맞아도 이상하지 않았을 테니.


 쾅!


 바로 그때, 여태껏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그녀가 테이블을 쾅 하고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굳세게 말아쥔 가녀린 주먹은 뼈에 사무치는 감정으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역린을 제대로 건드려버린 모양이었다.


 드디어 이 불편한 만남이 끝났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또다시 그녀를 상처입히고 말았다는 사실이 마음이 심란했다.



"이게 다···· 뭐에요····."


"····뭐?"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생뚱맞은 발언에 별안간 어벙한 낱말이 새어 나왔다. 

 

 이윽고, 그녀의 부릅 치켜떠진 눈이 허름하기 짝이 없는 방안 곳곳을 이 잡듯 훑다가, 다시금 나를 향했다.



"이게 다 뭐냐고요····."



 그 분통 어린 목소리는 명백하게 나를 책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 마디에 맺힌 처량한 울분은, 그녀의 저의를 온전히 짐작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



 긴장감을 억누르며, 어렵사리 말을 쥐어짜 냈다.


 저벅.


 무심코 뒷걸음질을 친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의식 밑바닥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르며, 서서히 나를 좀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작 이 모양 이 꼴이 되기 위해서···· 그런 웃기지도 않은 행세를 해왔던 건가요····? 고작 이 모양 이 꼴이 되기 위해서! 그동안 저를···· 모두를 속여왔던 거냐고요····?"


"····!"



 폐부를 꿰뚫는 발언에 이렇다 할 반박은커녕, 입조차 뻥끗할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했다.


 다가오는 발걸음이. 날 서린 눈동자가 뿜어내는 위압감이. 내 두 다리를 그 자리에 못 박아두고 있었다.



"다···· 다 알고 왔어요····."



 의혹이 확신으로. 우려가 현실로. 희미했던 불안감이 거센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당신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해왔는지. 우리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정신을 차렸을 땐, 격원하던 나무 벽이 등에 고스란히 맞닿아 있었다.


 서늘한 침묵 속, 희미한 침음성만이 나부끼는 가운데.


 단 하나의 명백한 사실만이 뇌리에 부상했다.



"당신 이대로는 못 보내····. 팔다리를 꽁꽁 묶어 놔서라도····. 목에 목줄을 채워서라도····. 내 곁에 둘 거야. 더 이상 내 곁에서 단 한 발자국도 못 벗어나게 할 거야····!"


"····."


"당신은 내게 그만한 짓을 했으니까! 당신은 그런 꼴을 당해도 싼 천하의 악인이니까! 그러니까····."


"····."


"내가 생각한 행복한 이상을 당신에게 평생 강요할 거야. 당신이···· 당신이 내게 그래왔던 것처럼····. 그로 인해 모두가 불행해진다고 해도, 더 이상 난 상관하지 않을 거야."



 벗어날 수 없다.


 설령, 붙들린 이 팔을 톱으로 잘라내 버린다 할지라도.


 한 치의 빛도 닿지 않는 무저갱의 어둠 속에 이 몸을 욱여넣는다 할지라도.



"당신과 함께 불행해질 수 있다면, 그건 내게 있어 행복이니까····."



 그녀가 내 몸에 얽힌 죄의 사슬을 놓아주지 않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