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선입견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갖는다.


나 자신에 대한 평가 이전에 외모나 출신으로 차별을 받는다면 누구든지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지만 선입견은 인류가 생존하기 위하여 본능에 새겨넣은, 이른바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지혜.


이 선입견 덕분에 인류는 색깔이 화려한 독버섯을 먹지 않게 되었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짐승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건 나쁜 선입견이 아니라 내 생존을 위한 질문이었다.


"야."


"엡?"


"너 엘프 아니지."


"...급즈기요?"


"..됐다. 밥이나 먹어라."


우물우물-


민소매를 입은 채, 근육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팔을 쭉 뻗어 고기반찬을 집는 녀석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이지, 저게 어딜 봐서 엘프란 말인가.


선머슴처럼 질끈 동여맨 금발, 드워프와 좋은 승부가 될 것 같은 근육, 그리고 젓가락으로 입에 고기를 막 쑤셔넣는 꼴까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밥그릇을 마저 비웠다.


*


활잡이 엘렌의 딸, 헬레나. 


엘프들은 모두 궁수다. 모든 생물이 태어나면서부터 숨을 쉬고,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처럼 활을 쏘는 것 역시 바람을 사랑하고 바람의 사랑을 받는 그들의 일부다.


그런 엘프들 사이에서 '활잡이'라는 별칭은 깊은 존경의 의미를 가진다.


그녀야말로 활을 쏜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는 그녀와 비교했을 때 활잡이라고 자칭할 수조차 없다는 존경.


그런 엘렌의 딸이 난데없이 검을 배우겠다며 숲을 떠났을 때, 당연히 엘프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 못했다.


활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이의 딸로 태어나놓고는 검을 배운다니! 실로 아깝다!


물론 스승의 입장에서도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팔꿈치. 어깨. 무릎. 허리."


"읏..."


"글러먹었구나. 아직도 이해를 못 했어."


"으우..."


끌끌 혀를 차자 녀석도 뺨을 부풀리며 투덜거렸다.


"애초에 이렇게 휘두르나 저렇게 휘두르나 똑같은 거 아니에요?"


"그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거다."


롱소드를 나뭇가지 휘두르듯 한 손으로 이리저리 휘두르는 녀석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녀석의 머리가 너무 높은 곳에 있는터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70cm를 겨우 넘기는 나와 달리, 제자 녀석은 190cm 정도의 멀대니까.


그렇다고 고작 제자 머리 한 대 때리겠다고 마나를 쓰며 날아오르는 꼴도 우습지 않나.


그러니 어째, 종아리 정도만 한 대 소리나게 때리는 수밖에.


찰싹-


"아얏!"


"엄살은."


"엄살 아니에요! 스승님은 자기 손맛이 얼마나 매운지 알아야 한다니까?"


"쯧, 그 덩치를 해놓고는 나뭇가지로 한 대 맞았다고 투덜대기는."


"으우..."


헬레나는 보란 듯이 복어처럼 뺨을 퉁퉁 부풀렸지만, 내가 보란듯이 종아리를 한 대 더 때리자 뺨에서 순식간에 공기가 빠져나갔다.


"아파요! 이러다가 제자 죽으면 어떡하려고!"


"아이고, 퍽이나 죽겠다. 자세나 다시 잡아라."


"이익.."


계속 툴툴거리면서도 자세를 잡는 녀석을 보자 가슴이 답답, 속이 막막해져오기 시작했다.


이 녀석을 맡은지도 어연 10년이 다 되어감에도, 검술 실력은 도통 늘지를 않았다.


체력 훈련이니, 영양분 보충이니 하며 운동은 줄창 시킨 덕에 지금처럼 근육질의 괴한이 되었지만.


정작 검술은 늘지를 않았으니. 비록 엘렌이 옛 동료라고 하더라도 학부모인 이상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쯧쯧. 또 몸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이익.."


위에서 아래로 내려베는 동작에도 쓸데없이 힘이 잔뜩 들어가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본래라면 형(形) 자체나 그 사이의 연결 과정에서 어려움을 느끼고 스스로의 자세를 고치게 된다만, 저 무지막지한 피지컬이 엘프 특유의 유연성과 합쳐진 탓일까.


시키는 대로 곧잘 따라는 한다만, 10년을 가르쳤음에도 성장한 건 몸 밖에 없으니. 


"..."


여전히 7살배기 어린이도 하지 않을 방식으로 검을 휘두르는 녀석을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겨들었다.


검에 요만큼도 재능이 없는 녀석을 이리 억지로 가르치고 있는 데에는 본인의 의지가 가장 큰 이유이긴 하다만, 내 자신의 문제도 그에 못지않게 컸다.


대인전 최강, 용사 파티의 검사. 마왕군 군단장을 모두 단신으로 쓰러뜨린 자.


그렇지만 실상은 마왕과의 결전에서 무리를 한 나머지, 마나하트에 구멍이 나버린 퇴물.


내가 단신으로 군단장을 담구는 걸 본 각 국가의 지도자들은 후계자를 원했고, 적성에도 맞지 않는 녀석을 데려다가 검을 가르치게 된 것이다.


빨리 이 녀석을 키우고 은퇴하는 게 계획이었다만.


'이래서야 언제 은퇴할 수 있을련지.'


그런 착잡한 심정을 담은 채 녀석을 바라보고 있자하니, 안 그래도 답답한 가슴이 더 답답해지고 말았다.


"어이구, 이 녀석아. 그리 휘두르면 장작도 못 패겠다."


"이익! 시끄러워요! 그리고 장작은 맨손으로도 패거든요?"


"그래, 자랑이다. 손보다 검이 날카로운데 그걸로는 왜 장작을 못 패냐?"


"이이익..!"


*


오전에는 검을 휘두르며 자세를 봐준다면, 오후에는 일대일로 대련을 하는 시간.


오늘 대련에 다른 점이 있다면.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게 아니죠?"


"아주 잘 보고 있다."


날이 바짝 선 진검으로 하는 대련이라는 것.


"...스승님, 저 죽이시려고요?"


"요새 보니 실전이 아니라서 긴장을 잔뜩 풀어놓더구나. 안 좋은 버릇도 생기고."


피지컬이 너무 좋다보니 상대 공격을 막는 게 아니라 보고 피하려고 하질 않나, 그러다가 실패해서 목검에 한 대 얻어맞으면.


"아~! 피할 수 있었는데. 조금만 더 빨랐으면 피했겠네요. 한 번 더!"


대련이 아니라 반응속도 테스트로 아는 건가, 싶을 정도로 가르칠 의욕이 떨어지는 반응을 보이질 않나.


"죽지는 않을 게다."


"...이익!"


별난 소리를 내며 검을 뽑아드는 녀석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는 그 찰나-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


"...음."


갑작스레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검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뒤를 돌아보니, 사람 크기만한 독수리가 어정쩡한 자세로 땅 위에 서있었다.


"실피드."


"유진."


여전히 떨떠름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실피드가 입을, 아니 부리를 열었다.


"헬레나한테 검을 휘두르려 하던데, 이것도 교육의 일환인가?"


"당연하지. 설마 내가 헬레나를 죽이려고 검을 뽑았겠나."


"그랬으면 내가 가만히 안 있었겠지."


"와! 실피!"


헬레나는 오랜만에 실피드를 만나서 그런가, 대련중이었다는 것도 잊은 채 목검을 내던지곤 실피드에게 달려가 와락 안겼다.


'...나도 많이 죽었군.'


마나하트에 구멍이 났다곤 해도 바람의 정령왕 정도 되는 거물이 뒤를 잡을 때까지 눈치도 못 챘다니.


두 명, 아니 새 한 마리와 엘프 한 명의 재회를 보며 괜스레 씁쓸해져오는 속마음을 숨긴 채, 헬레나에게 붙잡힌 실피드에게 말을 걸었다.


실피드가 이곳에 왔다는 건 계약자의 딸인 헬레나를 보러 온 것일 수도 있지만, 엘렌의 부탁을 듣고 왔을 가능성이 더 높았으니까.


"무슨 용무지?"


"아, 엘렌이 마을에 들리라더군. 말한 게 준비됐다고."


"...드디어."


오랜만에 들려온 희소식에 고개를 끄덕였다. 


헬레나를 맡은 이유 중 하나. 


구멍이 나버린 마나하트를 고칠 수 있는 '세계수의 이파리'.


마침내 그 약이 준비되었다는 소식이었다.


*


"흥~ 흐흥~"


"그리 신나더냐."


"헤헤, 오랜만에 집에 가니까 신나네요!"


"그래, 그래."


숲을 나왔긴 했지만, 엘프들의 숲과 멀리 떨어져서 사는 건 아닌만큼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엘프들의 숲에서 주기적으로 식량도 보내오고, 세계수의 마나가 충만한 덕에 마나를 쌓는 것도 쉬웠다.


한 마디로 엘프들이 '너는 공부만 해'라고 뒷바라지를 해주는 상황.


그렇지만 내 입장에서는 엘프의 숲에 방문하는 것이 그닥 달갑지 않았다.


"헬레나!"


"아, 베른."


찌릿-


숲의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나무에서 뛰어내린 흑발 엘프 남자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담히 받아냈지만 불쾌함은 숨길 수 없었다.


물론 엘프들 입장은 이해한다. 인간이 마을을 드나드는 것도 모자라 검을 가르친다며 마을 최고 활잡이 딸을 덥석 데려갔으니.


그렇지만.


"...훗. 소문이 사실인가 보군."


저리 비릿한 비웃음을 띈 채로, 벌레 보듯 위아래로 몸을 훑어보는 시선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 생각한다만.


"시선이 불쾌한데."


"호오. 불쾌하다고?"


내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이 척척 다가와 내 눈을 내려다보는 엘프.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 보았지만, 녀석은 여전히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는 상태였다.


"불쾌하다라. 이제 껍데기 밖에 안 남은 인간이 불쾌해봤자 무얼 할 수 있지."


"허."


껍데기 밖에 안 남았다라. 


아무래도 마나하트에 구멍이 난 게 소문이 다 퍼졌나보군. 숲 초입을 지키는 애송이 숲지기도 알고 있을 정도라면.


그렇지만 마나하트에 구멍이 뚫린 거지, 박살이 난 건 아닌데 말이지.


명명백백한 도발에 망설이지 않고 바로 검을 뽑아들었다. 


마나를 담아 그대로 검을 휘두른다. 파공성조차 내지 않고 날아간 검기가 나무 여러 그루를 통째로 잘라냈다.


우지직-


꺾이는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나무들, 그리고 새파랗게 질려버린 풋내기 숲지기.


속이 좀 쓰려오기 시작하더라도, 이 정도면 수지타산이 맞지.


흡족한 마음을 숨긴 채, 얼어붙은 애송이 녀석을 뒤로 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언행에 조심해라. 다음은 네 목이니까."


가벼운 경고를 남겨준 채로.


그리 먼저 발걸음을 옮기자, 헬레나가 잠시 뒤에야 후다닥 달려와 뒤에 달라붙었다.


말 그대로, 찰싹.


"으웃."


"스승님! 완전 멋있었어요!"


"무겁다, 이 녀석아."


"치이.. 여자한테 무겁다는 말은 욕이나 다름 없다고요."


"네가 진짜로 나보다 무거운 걸 어떡... 아프다."


나는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넣은 채 와구와구 목을 씹기 시작한 헬레나의 머리를 밀어냈다.


물론 녀석을 밀어내기에는 택도 없었다.


*


"아~ 베른? 그 검은머리 아이?"


"그래. 영 싸가지가 없더군."


호르륵-


그 뒤로는 일사천리로 마을에 들어올 수 있었다.


들어오는 길 중간 중간 나무 위에 숨어있는 엘프들과 눈이 마주치긴 했다만, 나무 잘려나가는 소리를 들었는지 황급히 눈을 피하더라.


"푸흡, 네가 이해해줘. 그 아이가 원래 헬레나를 좋아했거든."


"허."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나와 잠시 벙찔 수밖에 없었다.


엘렌은 그 모습이 우습다는 듯, 입을 가린 채 쿡쿡 웃으며 과자를 집어들었다.


그러니까 그 녀석은 나를 연적으로 봐서 그렇게 시비를 걸었다는 거지?


"웃긴 놈이군."


"원래 사랑 앞에서는 다들 우스워지는 법이니까."


과자를 와작와작 베어물며 차를 홀짝이는 엘렌. 


전형적인 금발의 엘프 미인답게 그 모습만으로도 그림이 되었지만, 용사파티에서 워낙 데인 게 많은 터라 별다른 감흥은 들지 않았다.


겉은 저래보여도 속은 500살이 넘은 능구렁이 할머니 그 자체니까.


"그래서, 우리 딸내미랑 진전은 어때?"


"일 없다."


"흐응~ 우리 딸이 그렇게 매력이 없나?"


"애초에 동료의 딸을 건드린다는 시점에서 어떤가 싶은데. 나도 이제 30대 아저씨라고."


"에이, 500살 입장에서는 30대나 20대나 거기서 거기인걸."


"...쯧."


할 말 없게 만들기는. 


괜히 혀를 차며 다시금 찻잔을 기울였다. 


"헬레나도 많이 참았어. 편지를 보내올 때마다 네 이야기가 8할은 넘을걸."


그 아이의 마음도 생각해줘. 겉으로는 저렇게 웃고 있지만, 속은 아마도 썩어들어가고 있을 걸.


엘렌은 자기 할 말만 내뱉고는 만족했다는 듯, 물건을 꺼내오겠다며 방으로 쏙 들어가고 말았다.


'제멋대로인 건 모녀가 똑같구만.'


홀로 남은 나는 차분히 생각에 잠겨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헬레나가 내게 마음을 갖고 있다는 걸 눈치챈 지는 한참 되었다.


굳이 엘프의 숲을 떠나 나를 따라오겠다고 하지를 않나, 검술에 재능은 요만큼도 없으면서 검을 계속 잡고있지를 않나.


스승님, 스승님하면서 매사 함께 하려고 하고, 늘 방긋방긋 웃어주고, 어른이 된 뒤에도 씻겨달라며 앵겨오고, 같이 자자고 침실을 찾아오기까지 하니까.


게다가 근육질이라곤 해도 엘프인만큼 길쭉하고 늘씬한데다가 엘렌의 외모를 물려받은 덕에 흠 잡을 곳 하나없는 아름다운 아이였다.


본인도 그걸 잘 알고 십분 활용하고 있었고.


그렇지만 동료의 딸이라는 점, 그리고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인 만큼 그 마음을 받아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헬레나가 결국 검사로서 성장을 한다면 나를 대신해 예비 용사파티의 일원이 되는 상황.


세계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만들 사람으로서 헬레나의 사랑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 뭔 사랑이냐.'


혼자 살다가 늙어 죽어야지. 


괜스레 씁쓸해진 입안을 차로 헹궈내듯, 찻잔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차만 연신 들이켰다.


*


"젠장, 젠장..!"


마을로 돌아온 베른은 아무도 오지 않는 마을 구석에서 홀로 욕지기를 마구 내뱉었다.


오랜만에 숲에 돌아온 헬레나와 그 옆에 서있는 가증스러운 인간.


마나하트가 박살이 났다는 소문처럼 예전과 달리 초라해진 겉모습을 보고 바로 시비를 걸었건만.


'이게 무슨 망신이야..!'


오랜만에 마을에 돌아온 헬레나 앞에서 이런 수치를 주다니.


물론 시비는 베른이 먼저 걸었지만, 그 기억은 머릿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지금 머릿속에는 그 인간이 마을을 떠나기 전에 어떻게든 헬레나를 그 인간과 떼어놓아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아, 베른. 여기에 있었구나."


"헬레나!"


그런 생각은 헬레나가 갑작스레 나타나자 더욱 커져만 갔다.


"헬레나, 마을로 돌아와. 마을에는 네가 필요해."


헬레나는 갑작스러운 베른의 말에도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자기 할 말을 했다.


"아까 스승님한테 껍데기 밖에 안 남은 인간이라고 했잖아."


"아, 그것 말이지."


베른은 갑작스러운 헬레나의 질문에 떨떠름했지만, 오히려 이게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인간이 자신이 알던 것과 달리 약해졌다는 소문을 듣는다면 헬레나가 그 남자에게 실망을 하지 않을까? 


"마왕과의 마지막 결전에서 힘을 과도하게 쓴 탓에 마나하트에 구멍이 났다고 하더군."


"헤에..."


흥미롭다는 듯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헬레나. 그 덕에 베른은 더 신이 나서 말을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았다.


마나하트에 구멍이 나면 신체 능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느니, 안 그래도 인간이니 단명할 게 뻔하다느니.


이제는 숨길 생각도 없는 명백한 적대감을 드러내며 헬레나 앞에서 그 남자를 헐뜯었다.


"아, 베른. 그쯤이면 됐어. 대답 고마워."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 헬레나,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인데 밥이라도-"


"그리고 한 가지."


헬레나는 베른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내 앞에서 다시는 스승님을 모욕하지 마."


죽여버리고 싶어지니까.


헬레나는 그 말만을 남겨둔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갔다.


마을 구석, 누구도 오지 않는 외딴 곳에 베른은 그리 홀로 남겨졌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멍청한 얼굴을 한 채로.


*


"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바로 약을 서랍장 깊숙한 곳에 집어넣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먹고 싶다만, '사소한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이상 약간의 대비는 필요했다.


아무리 튼튼한 몸뚱이라고 해도 마나하트에 난 구멍을 메꿔보는 건 나로서도 처음이란 말이지.


끼익-


"스승님, 계세요?"


"그래, 계신다. 무슨 일이냐."


"훈련도구를 하나 받아왔는데, 어떨까 싶어서요."


"훈련도구라."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되뇌었다. 


이건 무슨 심정일까. 그래, 공부가 안 된다며 고급 필기도구를 사달라하는 자식을 보는 부모님의 심정이 아닐까.


훈련도구는 이미 집에도 차고 넘쳤다. 문제는 그 훈련도구를 써도 검술 실력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는 거지.


"줘 보거라."


"네, 여기요."


겉보기에는 작은 마사지볼 같은 구를 아무렇지 않게 건네주길래 건네받았다만, 그 무게는 순간적으로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뭐냐, 이거."


떨어뜨릴 뻔한 공을 겨우 들어올리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헬레나와 눈이 딱 마주쳐버렸다.


"흐응~ 흐으으으응~"


"뭐냐, 그 비웃음은."


"딱히요. 비웃음 아닌데요?"


그리 대답한 헬레나는 공을 빼앗가듯이 받아들고는 한손으로 공을 던졌다가 받아채기 시작했다.


"스승님."


"왜."


"저한테 숨기는 거 있으시죠?"


"없다, 그런거."


"거짓말."


능글맞은 웃음을 짓던 헬레나는 공을 책상 위에 내려놓곤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곤-


"에잇."


와당탕-


그대로 나를 껴안아 바닥에 쓰러뜨렸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방어는 했지만, 190cm가 넘는 거구가 전력으로 밀어붙여오는 터라 힘이 부족해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막으려면 마나를 써야했는데, 그러면 헬레나가 다칠 게 뻔하기도 했고.


"뭐냐."


"잠시만요~"


헬레나는 아무렇지 않게 내 양손을 착착 끌어모아 한 손으로 붙잡았다. 


나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가만히 있었지만, 이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손으로 양손을 붙잡은 헬레나가 반대쪽 손으로 수상한 약병을 꺼내들고 있었으니까.


"어이."


"스승님, 마나하트에 구멍난 거 맞구나?"


"그 약 뭐냐."


"괜히 참았네. 스승님이 이렇게 약해져있을 줄이야."


알았으면 진작에 덮치는 건데.


헬레나의 입에서 나온 섬뜩한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 어이. 헬레나, 그만 두거라."


"왜? 이렇게 예쁘고 어린 엘프가 스승님 씨받이 해주겠다는데?"


"씨받이라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거냐. 아니, 아니. 그보다 나는 너랑 이럴 생각이 없어!"


"나는 있는데? 스승님도 검 가르칠 때 막무가내였잖아. 나도 그렇게 할래."


헬레나는 망설임 없이 병에 담긴 물약을 잘 흔든 뒤, 그대로 내 입에 탈탈 털어넣었다.


맛은 달콤했지만, 약효는 즉각적이었다. 


얼굴이 순식간에 홧홧하게 달아오르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빌어먹을.'


마나하트가 멀쩡했다면 이런 허접한 약에 당할 일도 없었는데.


헬레나는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가 준 약이야."


"...빌어먹을 구렁이."


어쩐지 그 날따라 집요하게 물어보더니, 뒤로는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구만.


평소에는 '둘이서 알아서 하는 거지~'라며 웃어넘기던 여자가 부추기듯이 말할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하는데.


"스승님, 내 마음 알고 있었지?"


"..모를 리가 있냐."


약이 도는 탓일까, 나도 모르게 순진한 대답을 내뱉고 말았다.


"그러면 왜 나를 그렇게 밀어낸 거야? 못되게 굴고."


"...못되게 굴 생각은 없었다. 네가 정말로 검에 요만큼도 재능이 없던 탓이지."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지네."


"내가 골백번도 더 말했을텐데."


"이렇게 면전에서 말을 들으면 누구든 기분 나빠질걸?"


이건 벌이야.


헬레나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숙여 순식간에 입술을 빼앗곤 다시 떨어졌다. 


무엇인지 모를 달콤한 향기와 부드러운 감촉이 지나간 후, 나는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황홀한 듯이, 무언가에 홀린 듯이 내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헬레나의 푸른 눈동자가 너무나 부담스러워져서.


"...헬레나. 이러면 안 돼. 후회할 거야."


"스승님은 맨날 그 소리야. 내가 스승님 사랑하면 안 돼?"


헬레나는 볼을 부풀리며 그리 말했지만, 나는 진지하게 말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헬레나는 알아야 했으니까.


"내가 너를 제자로 받아들인 건, 너를 내 대체제로 삼기 위해서였다."


용사파티의 검사로서, 언제든지 마왕을 물리치기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는 존재.


허울만 좋은 세계의 수호자라는 감투를 뒤집어쓴 채로 기약 없는 목줄을 찬 존재.


그런 자리에 너를 팔아넘기려고 했다고.


"딱히 상관 없는데. 아니, 애초에 그런 이유 때문에 나를 밀어낸 거야?"


헬레나는 그런 내 마음을 단 한 문장으로 일축해버렸다.


"애초에 지금 보니 검으로 성공하기에는 그른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검에는 별 관심이 없었어."


스승님한테 관심이 아주 많았지.


"있잖아, 스승님. 생명의 은인이 이렇게 멋있고 잘생겼는데, 반하지 말라는 게 억지잖아."


"...늘 말하지만, 나는 네가 아니었더라도 구했을 거고, 누구든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너를 구했을 거다."


"그렇지만 구한 건 스승님이잖아."


그 말에 또 할 말이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분명히 헬레나와의 인연을 거슬러 올라가본다면, 홀로 엘프의 숲을 거닐다가 마왕군 첩자에 붙잡힌 헬레나를 구한 게 첫 만남이긴 했다만.


"고작 그런 이유로 나를 좋아하는 거냐. 이렇게 덮칠 정도로."


"응, 그런데?"


"..."


또 다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꾹꾹 마음을 눌러놓고 있던 탓일까, 직구 일변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헬레나는 내가 입을 다물게 되자 그제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밝게 웃었다.


"자, 스승님. 이제 질의응답은 끝!"


이제 벗어.


그리 냉철한 말만을 남긴 채, 솜씨도 좋게 한 손으로 제 웃옷을 훌러덩 벗어던졌다.


탄탄한 복근,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한 근육, 그리고 착 달라붙는 브라 너머의 부드러운 살덩이까지.


새하얀 피부와 새카만 속옷의 대조가 이루어져 더욱 그녀를 음란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기까지 시작한 헬레나를 보며.


나는 은근슬쩍 팔을 빼보려고 했지만, 한 손으로도 내 두 손을 틀어막는 헬레나의 근력 덕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헬레나의 마수를 보며 나는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약, 미루지 말고 제때 먹을걸.'


그런 쓸데없는 넋두리나 늘어놓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