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래도 나는 어떤 미연시 게임에 빙의한 모양이다.
그것도 히로인이 단 한 명뿐인, 자칭 순애 미연시에.
보통 이런 장르에 빙의하면 주인공의 몸에 들어가기 마련 아닌가.
잘생기고 다정한, 여자라면 반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얀붕이로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가혹했다.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 그의 소꿉친구인 얀돌이가 되어 있었다.
주인공의 제일 친한 친구?
그래, 여기까진 좋다 이거야.
문제는 히로인이 주인공에게 접근할 때마다 꼭 이런 식으로 초를 친다는 거다.
“야, 얀순이랑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마.”
“왜? 그냥 착한 애 같던데.”
“들리는 소문도 이상하고, 가끔 널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더라.”
그 대가는 참혹했다.
얀돌이는 히로인에게 제일 먼저 썰려 퇴장하는 불운의 조연이었다.
과학실에 내 목이 전시된 모습을 떠올리자 괜히 소름이 돋았다.
하필 빙의해도 이런 폐급 사망 플래그 캐릭터라니.
나는 이 미친 세계의 진실을 깨닫자마자 살길을 찾았다.
첫 번째 계획.
주인공이고 히로인이고 다 내버려 둔 채 혼자 도망치기.
물론 시작부터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학교를 벗어나 무작정 아무 버스나 잡아탔을 때였다.
쿵.
어느 순간, 차창 밖으로 보이지 않는 벽에 코를 박고 말았다.
그렇다.
등장인물은 학교를 중심으로 한 무대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시스템인 것이다.
물리적인 도망이 불가능하다면, 두 번째 계획.
그들과 철저히 엮이지 않기.
안타깝게도 이것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야! 오늘 학교 끝나고 농구 할 거지? 내가 코트 자리 잡아놓는다?”
이 망할 주인공은 붙임성이 지나치게 좋았다.
내가 일부러 틱틱거리고 피해 다녀도, 녀석은 대형견마냥 꼬리를 흔들며 따라왔다.
급기야 노골적으로 자리를 피하자 내 어깨를 붙잡고 울상을 지었다.
“내가 뭐 실수한 거 있어? 있으면 말해줘. 내가 미안하다, 응?”
네가 내 옆에서 알짱거리면 그 미친 여자 눈에 내가 띌 수밖에 없다고!
결국 나는 최후의 수단을 꺼내 들었다.
바로 얀순이에게 호감작을 하는 것.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얀순이 루트를 타겠다는 소리가 아니니까.
애초에 주인공이 버젓이 있는데, 엑스트라인 나와 이어질 리가 없었다.
내 목표는 철저히 유능한 징검다리였다.
음침하게 얀붕이의 뒤를 캐고 다닐 얀순이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 알짜배기 정보만 떠먹여 주는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무난하게 이어지면 내 역할은 끝.
그 뒤로 얀붕이의 사지가 잘려 나가든, 목줄을 차고 지하실에서 평생 사육당하던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조금, 아주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내 목숨이 당장 날아가게 생겼는데.
속으로 짧은 묵념을 올린 뒤, 복도 기둥에 숨어 얀붕이를 훔쳐보고 있는 얀순이에게 다가가 넌지시 속삭였다.
“얀붕이는 점심 먹고 나면 항상 딸기 우유를 마셔.”
“히냣?!”
히로인치고는 우스꽝스러럽고 바람 빠지는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거리를 벌리더니, 재빨리 교복 주머니 속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보나 마나 그 안에는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이 들어 있겠지.
“너, 너 뭐야! 뭐 하는 녀석인데 갑자기 뒤에서...!”
“진정해. 나는 네가 얀붕이와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니까.”
나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의 제스처를 취했다.
“네 완벽한 아군이니까 그... 주머니에서 손 좀 빼지?”
“아군? 수작 부리지 마. 역시 지금 여기서 죽여버려야...”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 봐! Y목장 딸기 우유. 얀붕이가 제일 좋아하는 브랜드야.”
얀순이는 반신반의하는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곧 매점으로 달려가 우유를 샀고, 쭈뼛거리며 얀붕이에게 다가갔다.
우유를 받아 들고 웃는 얀붕이의 미소는 내가 봐도 파괴력이 굉장했다.
잠시 후, 얀순이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헐떡이며 내게 돌아왔다.
“어때, 이제 나를 좀 믿겠어?”
“응... 믿을게.”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한다.”
“저기 얀붕이한테 꼬리 치는 년들 뭐냐? 그냥 확 다 찔러버릴까.”
“아니, 제발! 상식적으로 칼 들고 설치는 여자를 좋아할 남자는 없다고!”
“아, 진짜 번거롭네...”
“그나저나 넌 얀붕이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냐?”
“어?”
“아니, 걔가 잘생기고 착하긴 한데 그 정도로 맹목적인 이유가 있나 싶어서.”
“나는... 얀붕이를 좋아해야 하니까.”
“무슨 소리야, 그게.”
“나는 얀붕이를 사랑해야만 해. 그러니까 좋은 거야.”
이건 또 무슨 미친 논리람.
나는 그저 얀데레의 헛소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날 이후의 시간은 정말 쏜살같이 흘러갔다.
어느 주말, 번화가의 쇼핑 거리.
“얀붕이는 너무 딱 붙는 청바지보다는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좋아해.”
“그, 그래? 그럼 이거 바로 사야겠다.”
“너무 진한 향수는 머리 아파하니까 은은한 시트러스 계열로 가자.”
“시트러스? 이런 타입은 써본 적이 없는데.”
“솔직히 나도 짙은 향이 취향이긴 하지만... 그냥 얀붕이한테 맞추자.”
“...알았어.”
또 다른 날, 대형 마트 식료품 코너.
“얀붕이는 노른자를 싫어해. 근데 계란말이는 먹으니까 도시락 쌀 때 참고해라.”
“마트에서 장 보는 것까지 도와주고, 정말 고마워.”
“다 내가 살자고... 아니, 원해서 하는 건데 뭐.”
“저기, 얀돌이 너는 먹고 싶은 음식 없어? 네 것도 같이 해줄게.”
“얀붕이 도시락이나 신경 써. 이대로만 하면 완벽한 현모양처 어필이다.”
그리고 또다시 돌아온 주말, 백화점 수영복 매장.
“저기, 이 수영복은 어떻게 생각해?”
“음... 얀붕이는 프릴이 달린 귀여운 스타일을 선호하더라고.”
“아, 그러셔.”
“이 하얀색은 어때?”
“걔 취향은 알겠어. 그런데...”
“그런데?”
“너는? 얀돌이 너는... 어떤 디자인이 좋아?”
“나? 난 굳이 따지자면 귀여운 것보단 섹시한 쪽이지.”
“여자애한테 이런 걸 입히고 싶은 거야? 진짜 변태.”
“아니, 네가 먼저 물어봤잖아! 그리고 누가 너더러 입어 달래?”
“흥, 됐어.”
“야, 야! 왜 그걸 계산하는 건데?”
“얀돌아, 우리 나중에 이 영화 보러 가자.”
“이거 완전 멜로 영화잖아? 얀붕이랑 보러 가야 하는 거 아니야?”
“그, 그러니까... 일단 너랑 먼저 보고 나서! 좋은지 안 좋은지 판단하려고!”
“뭐라는 거야, 진짜.”
어찌 됐든, 나의 눈물겨운 헌신 덕분에 상황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얀순이는 더 이상 얀붕이의 뒤를 캐고 다니지 않았다.
여전히 내게 얀붕이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다며 불러내긴 했지만, 정작 그걸 써먹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게다가 질문의 방향도 묘하게 엇나가 있었다.
“얀돌아, 넌 어떤 스타일이 좋아? 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자친구는 어떤 모습이야? 얀돌아, 얀돌아, 얀돌아...”
그러고는 내 이름만 앵무새처럼 무수히 불러나갔다.
넋이 나간 듯 하염없이 허공을 응시하는 일도 잦아졌다.
이게 과연 좋은 징조일까?
드디어 얀순이도 평범한 여자아이로 돌아간 걸까?
멍하니 하늘만 보는 표정은 분명 사랑에 빠진 얼굴 같긴 한데.
나는 얀순이에게 다가가 넌지시 물었다.
“얀붕이하고는 진도 좀 빼고 있냐?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는 거지?”
“몰라.”
“모른다니... 너 얀붕이가 그렇게 좋다고 스토킹까지 했었잖아.”
“모른다고.”
“뭐야, 그게.”
들뜬 기분이 확 날아가 버렸다.
얘네 싸우기라도 한 건가?
“아오, 답답해. 그냥 네가 확 먼저 고백해버려.”
“상관하지 마. 안 그래도 머리 아파 죽겠으니까.”
도대체 이런 일방통행 미연시에서 머리 아플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솔직히 나도 슬슬 조바심이 나던 참이었다.
어느새 이 세계에 적응해서 이렇게 청춘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다.
하루빨리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곧바로 행동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김얀순, 너한테 할 말 있으니까 오늘 학교 마치고 반에 남아.”
내 갑작스러운 통보에 그녀의 어깨가 움찔 튀어 올랐다.
얀순이는 두 손으로 뺨을 감싸더니 모기만 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하, 할 말...? 단둘이...? 으응, 꼭 기다릴게!”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얌전하게 끄덕였다.
나는 그 길로 얀붕이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중요하게 할 말 있으니까 반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남녀를 한 공간에 억지로 가둬놓으면 뭐라도 결판이 나겠지.
완벽한 계산이었다.
마침내 학교가 끝나고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복도 모퉁이에 숨어 두 주인공이 차례로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았다.
오후 다섯 시.
창밖으로 노을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붉어진 그녀의 얼굴은 단지 노을이 내려앉은 탓이었을까?
나는 잠시 시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빠져 피식 웃었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결과를 기다렸다.
“...네가 여기...”
“얀돌이... 너는 왜...”
안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내용까지 또렷하게 들리진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말소리가 훅 높아지는가 싶더니.
쾅, 우당탕.
책상 넘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저 녀석들, 고백하자마자 교실에서 뭘 하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빠르잖아!
몇 분 지나지 않아 모든 소리가 뚝 끊겼다.
나는 헛기침을 큼큼 뱉으며 보란 듯이 앞문을 열어젖혔다.
“야, 너희는 나한테 진짜 고마워해야...”
드르륵.
“...어?”
서쪽으로 난 교실이었기 때문에 핏빛 같은 석양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블라인드를 뚫고 들어온 빛을 받아 줄무늬가 된 얀순이가 창틀에 걸터앉아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 손에 식칼을 쥔 채.
그리고 바닥에는...
“얀붕아?”
목이 있어야 할 자리에 시뻘건 단면만 남은 몸뚱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 밑으로는 쏟아진 핏물이 웅덩이를 이루다 못해 교실 바닥의 결을 따라 질척하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이 검붉은 얼룩도 단지 노을이 내려앉은 탓일까?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내게 얀순이가 먼저 말을 건넸다.
“뭔가 했더니 이런 깜찍한 이벤트를 준비한 거였어? 난 또 착각했잖아.”
“너, 너... 네가... 혹시 네가 그런 거야...?”
목소리가 요들처럼 덜덜 떨려 나왔다.
“응!”
얀순이는 후련해 보이는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너무 시끄러웠어.”
“뭐...?”
“머릿속이 계속 윙윙거리고 속삭이면서 사랑해라, 얀붕이를 사랑해야 한다... 으으, 누가 최면이라도 거는 것처럼.”
그건 분명 세계의 강제력이 그녀에게 작용한 게 아닐까.
“너랑 같이 있을 때면 그 목소리가 훨씬 크게 울리는 거 있지? 밤에 잠도 못 자고 정말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
얀순이는 칼 끝에 묻은 피를 치마에 슥슥 닦아내며 재잘거렸다.
“그래, 내가 저 새끼를 좋아했던 것도 다 좆같은 최면 때문이었다고.”
“그래서... 그래서 얀붕이를 죽인 거라고...?”
“조용해. 죽이고 나니까 환청이 안 들려. 너무 상쾌해.”
나는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
얀순이는 평범하게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세계의 강제력과 자신의 감정 사이에서 속이 곪아 문드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얀순이가 창틀에서 뛰어내려 내 쪽으로 사뿐사뿐 걸어왔다.
“이제 우리를 방해할 건 아무것도 없어.”
한 걸음.
“사랑해, 얀돌아.”
두 걸음.
“처음부터 내가 사랑한 건... 바로 너였어.”
본능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등 뒤로 딱딱한 문이 닿았다.
그러자 얀순이의 미소가 한순간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왜 자꾸 멀어져?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입안의 침이 바싹 말라 아무런 대답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나는 손을 뒤로 더듬어 문고리를 쥐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덜컹.
“...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드럽게 열렸던 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덜컹, 덜컹, 덜컹.
미친 듯이 손잡이를 흔들고 문을 밀어보았지만, 굳게 잠긴 듯 미동조차 없었다.
X발.
이 세계가, 이제는 나에게까지 강제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사이 얀순이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스멀스멀 조여오는 날것의 비린내.
그리고 그 위로 덧씌워진 톡 쏘는 관능적인 향기.
속이 매스꺼웠다.
그녀는 내 뺨을 더없이 다정하게 감싸 쥐며 속삭였다.
“사랑해, 얀돌아. 정말 사랑해.”
환희에 찬 눈동자에 겁에 질린 내 얼굴이 오롯이 맺혔다.
“그러니까 우리 같이 행복해지자, 영원히.”
나른하게 감기는 눈꺼풀.
벌어진 입술.
“베에...”
타액을 잔뜩 머금은 혀가 삐죽 밀려 나온다.
그녀가 까치발을 든다.
기울어지는 무게.
피에 젖어 눅눅해진 교복.
뜨겁고 말캉한 체온이 닿을 듯 말 듯 밀착해 온다.
“나는...”
>>> 그녀를 받아들인다
>>> 뿌리치고 도망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