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시 살인사건에 관한 면담 카르테: 환자의 발언을 중점으로 재구성됨.

 

 

 

창문에! 창문에!

 

아, 농담입니다. 놀라셨습니까?

그렇다면 사과드리지요.

 

예전부터 언젠가 정신병을 앓게 되면 해보려고 벼르고 있던 농담입니다.

러브크래프트 씨의 ‘다곤’이라는 단편에 나오는 대사입니다만, 모르십니까?

 

그렇군요. 하긴 처음 보는 분께 할 농담은 아니었지요.

 

예. 정신병 말입니다, 선생님.

하등 숨기실 것 없습니다.

 

여기는 정신병원이고, 선생님은 제 상태를 보러 오신 것이겠지요.

오늘 처음 들어온 환자를 파악해둘 필요가 있을 테니까요.

 

헤, 헤, 헤. 그렇습니다. 저는 환자지요. 정신병자입니다.

 

사실 그런 자각은 없습니다만, 전문가가 그렇다니 아마 그렇겠지요.

본래 미친 놈은 자기가 미친 줄 모른다지 않습니까?

 

그러니 저는 환자일 겁니다.

 

헌데 어떤 치료가 예정되어 있는지요?

상담치료? 약물치료?

어쩌면 전기충격을 이용할지도 모르겠군요.

 

어떤 치료든 선생님을 신뢰하고 협조하겠습니다.

아무렴 제 판단보단 의사의 판단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환자에게 치료 계획을 상세히 알려주면 되레 문제가 될 테지요.

아무렴 이곳은 정신병원이니까요.

 

헤, 헤, 헤! 저는 말씀하신 대로 정신병자입니다.

인정해요. 인정하고말고요.

 

그런데 딱 한 가지, 인정하지 못하겠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르길, 절더러 정신병자에 살인자랍니다.

 

물론 앞서 말했듯 저는 제가 환자임을 인정합니다.

 

그럼 무엇이 인정할 수 없느냐 하면 후자입니다.

저는 살인자가 아닙니다. 이건 누명이에요.

 

대중도, 경찰도, 판사도 제 말을 도통 들어주질 않덥니다.

 

어쩌면 제 병은 이 억울함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그거 말입니까? 관심이 있으신 모양이로군요.

 

예, 저는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으로 기소되었습니다.

그리고 판결받았지요.

 

그나마 정신병을 인정받아 수감이 아니라 입원조치 되었습니다마는…….

 

그럼 누가 범인이느냐고요? 그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바로 P, 그녀입니다.

 

음? 아, 그렇군요. 제 소개를 아직 하지 않았네요.

 

환자 정보를 가지고 계실 테니 안 해도 되겠다 싶었습니다만,

하긴 그래도 해두는 게 예의로군요.

 

C라고 합니다.

여기 오기 전에는 작은 음식점을 하나 했습니다.

 

피자 말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거 참, 여기서 그리 멀지도 않으니 언젠가 배달을 해드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헤, 헤, 헤! 과연 지금 쯤 제 가게였던 곳엔 뭐가 들어왔을까요.

조금 허탈해지기도 하는군요.

 

점심이요? 하긴 슬슬 배가 고플 참이긴 합니다.

 

그래요… 피자 좋지요.

나름 자부심으로 제가 만든 피자만 먹어왔지만, 이젠 가게도 피자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어디까지 이야기 했었지요?

 

아, 그렇지요. P가 범인이라고만 했었죠.

애인을 살해한 그 여자 말입니다.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죽였다고 공표된─오, 그러나 물론 누명일 뿐입니다─

이 사건의 피해자는 P의 남자친구였습니다.

 

그래요, 아시는군요. B 말입니다.

참 멋진 남자였지요. 저도 젊었을 적에는 저런 미남이었는데.

 

아직 젊다니. 헤, 헤, 헤. 그저 농담이었습니다.

애써 일일이 반응해주실 필요 따윈 하등 없습니다.

이토록 뒤룩뒤룩 찐 살을 좀 보십시오.

 

그리 말하는 것치곤 날씬해보인다?

이크, 선생님도 농담을 잘하시는군요!

 

최근 운동기구를 사긴 했지만 일주일 만에 내팽개쳤답니다.

 

손님들에겐 이번에야말로 진짜라며 짜증날 정도로 으스댔지만

저한테 어디 끈기라는 게 있어야지요!

 

뱃심이라곤 내장지방뿐일 겁니다.

 

흠, 죄송합니다. 자꾸 이야기가 새는군요.

 

그러니까… 피해자였던 B는 이런 저와 다르게 참으로 미남이었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딱 하나. 아주 사소하면서도 큰 결점이 하나 있었지요.

 

글쎄, 이 남자가 둘도 없는 바람둥이였다는 겁니다!

 

어느 날, 처음 보는 여자와 가게를 찾아오시더군요.

항상 P와 함께였는데 말이죠.

 

하지만 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원래 사랑이라는 건 깨지고 이어지고 하는 거지요.

 

P와 헤어지고 새 애인이 생겼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뭐람?

며칠 뒤에는 또 P와 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때 알았죠. B가 바람을 피고 있구나.

 

그냥 친구랑 온 걸 착각했을 리는 없습니다.

 

다른 여자와 식사를 하며 대화하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건 이미 바람입니다. 물론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말이죠.

 

처음에는 그냥 넘어가려 했습니다.

치정 싸움에 끼고 싶진 않았거든요.

 

그런데 아무래도 P에게 이야기 정도는 해야지 않나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더군요.

 

그래서 고민하다 결국 P가 혼자 가게에 왔을 때 넌지시 일러주었지요.

 

만약 제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말도 덧붙여서요.

괜히 저 때문에 일이 커지는 건 싫다고 생각했거든요.

 

처음에는 그 말을 저도 안 믿었지요.

그러니 곰곰이 생각해볼수록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지 뭡니까.

 

두 달 전 데이트 때 다른 여자들에게 여섯 번이나 시선을 돌렸던 점이라든가 말입니다.

 

하지만 이게 어디 생각만 한다고 답이 나올 문제입니까?

그러다가 결심한 겁니다.

 

딱 한 번만 확인해보자.

물론 나는 내 애인을 믿지만.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B의 휴대전화를 봤지요.

그런데… 그런데…….

 

세상에, 이게 뭐람!

연락처를 봤는데 바람둥이도 어쩜 이런 바람둥이가 있을 수 있을까요!

 

선생님, 자기 애인 전화에 알지도 못하는 여자들의 연락처가 있는 기분을 아십니까?

그것도 무려 가족을 빼고도 열두 명이나 있었답니다.

 

그건 분노보다도 경악에 가깝습니다.

물론 분노도 크지만, 그 친구는 조금 뒤늦게 찾아오지요.

 

예? 제가 그리 말했습니까?

저도 참 이런 실수를.

 

제 말은 P 그 여자였다면 분명 그랬을 거라는 소리였습니다.

 

아무렴 화장실에서 돌아오는 즉시 따져물었지요.

예, 식당에서 데이트를 하다 B가 화장실에 들른 것이었답니다.

 

여튼 대체 무슨 일이냐 물었는데 뻔히 보이는 변명만 하지 뭡니까.

그냥 오랜만에 만난 중학교 동창이니 뭐니.

 

그 소릴 듣고 있으니 그 좋아하던 우동도 목에 넘어가질 않덥니다.

 

그런 상황인데 뭐가 잘 풀리겠습니까.

P는 씩씩대며 떠났고, B는 미간을 찌푸리다 계산을 하고 돌아갔겠지요.

 

잘 안다고요?

그야… 물론 제 가게에서 있던 일이기 때문이겠지요.

 

눈앞에서 똑똑히 봤습니다.

하, 아직도 그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르는군요.

 

그 후 이야기를 듣자하니 며칠 내내 B가 연락하여 애원을 했다더군요.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덧붙인 말이 또 가관이랍니다.

그 여자들한테 더 이상 험한 짓은 하지 말아 달라더군요.

 

아아, 이 무슨 일이랍니까!

이런 상황에서조차 애인을 달래주지는 못할망정 다른 여자 생각이나 품고 있다니.

 

…그런데 전단지는 왜 보고 계십니까?

이미 주문하셨던 게 아니었는지요?

 

우동? 그야 피자 가게 전단지에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당연하지요. 그런 건 저희 집에서도 안 팔았습니다.

 

예, 아무튼 계속하자면… 그가 계속 애원하다보니 P는 한 번만 더 믿어보자고 마음먹은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B의 휴대전화에 등록되어 있던 여자들 대부분을 협박하거나 해서

그와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나니 꽤 마음이 풀리기도 했답니다.

 

비록 실수로 치부할 일은 아니었지만 정말 반성하고 있다면 딱 한 번만 용서해주자.

뭐, 그랬던 모양입니다.

 

물론 B의 집에서 또 여자가 나오는 꼴을 보기 전에는 말입니다.

 

P는 그의 집 앞에 찾아가 전화로 불러 깜짝 놀래켜줄 작정이었다고 하는데…

일이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지요.

 

이쯤 되면 운명의 장난이라 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사건과 관련된 증언을 들어보니 그건 B의 동생이었다?

선생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말씀을 똑바로 해주시지요. 그냥 동생이 아닙니다.

여동생이죠. 생물학적으로 암컷입니다.

 

선생님도 그 모습을 직접 봤더라면 분명 납득하실 겁니다.

그건 음탕한 암캐의 눈빛이었다고요.

 

헤, 헤, 헤. 아무렴 그 다음에 있을 일이야 뻔하지요.

화를 참지 못하고 일을 쳐버린 겁니다. 한심한 여자겠지요?

 

이런 결말을 맞을 줄 알았더면 애초에 B의 다른 애인 이야기를 꺼내놓지 않는 거였는데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저는 죄인이 맞습니다.

말 몇 마디로 사람 하나 죽인 흉악범이지요.

 

오, 쇠창살 안에 나를 넣어주시오!

 

그러나 또다시 단언하건대 제 죄는 오직 그뿐입니다.

 

그것이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을 일이라면 그 누구도 제게 족쇄를 채울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천상의 주 외에는요!

 

종교요? 아뇨, 없습니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님, 누구든 제 누명을 벗겨주시는 게 제 주님이겠지요.

 

제가 그걸 기대하니까 선생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게 아니겠습니까.

 

범인은 그 여자입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칼을 가져온 뒤 B를 불러낸 것도,

같이 저녁이나 먹자며 가게로 온 것도,

제가 잠시 화장실에 향한 사이 목에 한 번, 옆구리에 한 번 칼을 찔러넣은 것도…….

 

그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하나가 되고자 그의 일부를 먹기 시작한 것도 그 여자란 말입니다.

 

흉기는 여자화장실 제일 안쪽 칸 쓰레기통에 있을 겁니다.

제가 똑똑히 봤거든요.

 

아무렴 경찰이 얼간이가 아니라면야 발견했겠지만,

제가 범인이라고 오해할 정도로는 멍청하지 않습니까? 확신이 없군요.

 

그 모습을 어떻게 봤느냐고요?

그야 앞서 말했듯 저는 화장실… 음, 그러니까 말입니다.

 

아, 그렇습니다!

그 여자가 흉기를 버린 건 남자화장실이었습니다! 분명 그렇지요!


P는 증거를 숨기기 위해 반대 성별의 화장실에 칼을 버린 겁니다.

 

기억이 좀 오락가락 하는군요.

헤, 헤, 헤. 제가 확실히 환자는 맞는 모양입니다.

 

저도 어쩌다보니 헷갈렸지 뭡니까.

선생님, 발목이라고 열 번만 말해보시겠습니까?

 

네, 좋습니다. 그럼 이건 뭐지요?

 

헤, 헤, 헤! 틀렸습니다.

이건 팔목이 아니라 팔꿈치지요.

 

뭐, 이런 헷갈림은 누구나 있는 겁니다. 저도 그런 셈이었겠지요.

 

아무튼 제가 그리 똑똑히 목격을 했는데도 글쎄 경찰은 저를 잡아가덥니다.

 

사실 여기까진 이해해줄 수 있습니다.

식당에서 누가 죽으면 물론 식당 주인도 용의자일 테니까요.

 

그런데 참 가관인게 뭔지 아십니까?

재판장에서 제게 이런 판결을 내린 겁니다!

 

증거물은요? 뭔지 아시겠습니까?

 

그 여자의 지문만 묻은 칼과, 피 묻은 그 여자의 옷,

그리고 그 여자의 살해 장면이 찍힌 CCTV 영상이었습니다!

 

장담하건대 이건 제가 미쳤거나 세상이 미쳤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높은 확률로 전자겠지요.

 

헤, 헤, 헤…….

 

선생님, 제발 말해주십시오.

대체 제 병명이 무엇입니까?

 

제가 정말 미쳐서 모를 뿐, 제가 사람을 죽인 건가요?

B를 죽인 게 저였습니까?

 

오, 아니야. 아니라고. 내가 왜 B를 죽입니까.

하등 그럴 이유가 없어요.

 

나는, 나는 그저 자그만 피자가게 주인일 뿐입니다.

 

피자 드시렵니까, 선생님? 주문 받겠습니다. 주문 받겠습니다.

예, 치즈 크러스티 라지… 제가 참 좋아하던 겁니다. B가 좋아했거든요.

 

다만 핫소스를 뿌리냐 안 뿌리냐로는 차마 취향을 따라가기가 힘들더군요.

물론 선생님은 뿌리시겠지요?

 

예, 그렇습니다. 좋은 취향을 갖고 계시군요.

빨간 핫소스가 조명에 비치는 모습은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으신지요.

 

피? 아닙니다. 그런 은유가 아니었어요.

진짜 핫소스 말입니다.

 

물론 피도 가게 조명을 받으니 아주 예쁘덥니다.

 

하지만 시각보다는 촉각이 만족스럽지요.

특히나 뱃속에 칼을 집어넣고 헤치는 감촉은… 아아, 아아! 죽어라! 죽어!

 

빌어먹을 놈! 죽어 마땅한 놈 같으니라고!

나는 용서하려고 했어. 넘어가주려고 했다고! 반성만 했으면!

 

헤, 헤, 헤! 두 번은 못 참아요. 선생님, 그렇지 않습니까?

고개를 끄덕이세요. 끄덕. 끄덕. …안 하십니까?

 

장단을 영 맞추질 못하시는군요. 재미없는 노친네 같으니라고.

 

그렇지만 저는 B를 정말로 사랑했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말이지요!

 

마음만 같아서는 박제를 해서 침대에 눕혀두고 싶었지요.

단지 나만을 바라보고, 나만을 사랑하는.

 

물론 저는 그를 존중했기에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는 연인의 의무를 다하지 않다니. 이 어쩜 끔찍한 일이 다 있나!

 

사랑하는데, 나는 이렇게나 당신을 사랑하는데!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해서 차마 어쩔 수가 없……

 

…아, 피자가 왔군요. 퍽이나 배달이 빠릅니다.

 

예? 제가 방금 무슨 말을 했습니까?

죄송합니다만 기억이 애매하군요. 이것도 제 증상 중 하나인가요?

 

혹시 제가 그동안 이상한 소리는 하지 않았습니까?

 

다행입니다.

자기가 뭘 했는지 기억에 없다는 건 어째 좋은 기분이 아니군요.

 

음? 아뇨,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제 이름은 C입니다.

 

나이는 마흔 둘이고, 무엇보다도 남자입니다.

 

착각할 게 따로 있지요.

잘못 부르기엔 좀 많이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으음, 꽤 맛있는 피자로군요.

 

…그래서 말입니다만, 제 병명이 무엇입니까?




소설 쓰다가 영 막혀서 옛날에 썼던 글을 꺼내서 다듬어봄.

원래는 얀데레를 생각하고 쓴 건 아니었는데 생각해보니 충분히 얀데레 느낌 나기에 괜찮겠지 싶었음.

평소 올리던 거랑 느낌이 많이 다른데 처음 쓸 때는 인터넷 소설 형태가 아니어서 그럼.


정신병자의 면담 모노드라마라는 건 최제훈 작가의 단편 "그림자 박제"에서 영향을 받았고

"죄와 벌" 옛날 판본에 나오는 검사 나리 말투도 조금 섞여있음.


참고로 그림자 박제는 이거랑 정반대로 살인은 인정하지만 정신병을 인정하지 않는 남자의 경찰 면담 이야기.

"퀴르발 남작의 성"이라는 소설집에 나오는데, 똘끼가 넘쳐서 함부로 추천하긴 힘들지만 개인적으로는 정말 좋아하는 작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