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희생해라."

선생님의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선생님 입에서 나올 말이 맞는 걸까? 역시 '미친개'라는 별명으로 불리울 법 했다.

"네가 안송이 싫어하고 그런 건 아는데 송이는 너 없으면 죽겠다잖아. 송이랑 사귀어라."

"선생님, 저는 절대로 싫어요."

"수행평가 점수도 잘 주고 생기부도 잘 써줄 게."

"그렇다고 해도 대체 왜 그래야 하는데요? 자기 피로 러브레터를 쓰고 제 주변사람의 소중한 물건을 망가뜨리고 협박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사랑을 강요하고 언제 어디서든 저를 감시하는데 제가 왜 걔를 받아줘야 하는데요?"

"넌 성적 하위권이고 송이는 너네 학년에서 유일하게 서울대를 갈 수 있는 우등생이잖니. 그런데 송이는 이번 시험 성적이 떨어졌어. 네가 송이 마음을 자꾸 거절한 탓이야. 송이가 서울대 못가면 네가 책임질거야?"

"아니, 그걸 왜 제가 책임져야 하는데요? 송이가 서울대를 가는 걸 왜 제가..."

"야이 새끼야! 자꾸 말대답할래?"

"이 씨..."

"뭐? 씨?"

선생님은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고 내 배를 가격했다. 그 충격으로 난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난 온몸이 굳었다.

"새끼가 하늘 같은 선생님에게 대들고 지랄이야!"

발길질이 얼굴로 향했다. 나는 방어를 하기 위해 가드를 올리고 웅크렸다. 하필이면 하이힐을 신고 있어서 더럽게 아팠다. 1분이 지나자 구타는 끝났다.

"아무튼 다음 시험 때 안송이 성적이 또 떨어지거나 그러면 넌 작살을 내주겠어. 알겠어? 빨리 가봐."

나는 배를 쥐어잡고 도망치듯이 교무실을 나왔다.

"좆같은 새끼... 저딴 것도 교사라고..."

애초에 외딴 벽지에 동 떨어진 사립고등학교에 오는 게 아니었다.

나는 이를 갈면서 벽을 더듬거리면서 교실로 돌아갔다. 아직도 숨이 안 쉬어지는 것 같았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누군가 나를 부축였다. 안송이었다.

"얀붕아! 괜찮아? 또 말도 없이 사라져서 나 몰래 어떤 년이랑 놀아나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랬는지 알아? 어? 몰골이 이게 뭐야? 누가 얀붕이를 때렸어? 어떤 년이야?"

나는 안송이를 보고 순간 부아가 치밀렀지만 이내 머리가 냉정해졌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게 안송이 때문이었지만 함부로 주먹쓰는 꼴통 교사 새끼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송이야, 미안해. 아파서 죽을 거 같아."

송이의 눈에서 생기는 이미 사라졌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미친개' 알지? 우리 수학 선생님 있잖아. 너한테 접근하면 죽여버리겠다면서 나를 두들겨 팼어."

"얀붕아..."

"숨이 안쉬어져."

"일단 보건실로 가자."

송이는 나를 데리고 보건실로 갔다. 보건실은 열려 있었지만 불은 꺼져있었고 양호선생님은 없었다. 송이는 나를 병상에 눕히고는 말했다.

"여기 꼼짝 말고 있어.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들은 내가 모조리 처리할테니까. 나 돌아올 때까지 죽으면 안돼. 알겠지?"

그리고 송이는 사라졌다. 나는 병상에 누웠다.

"깔깔깔,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들은 내가 모조리 처리하겠다고? 나 돌아올 때까지 죽으면 안된다고? 송이 새끼 진짜 미친 거 아냐? 깔깔깔!"

내 옆에서 비웃음이 들렸다. 옆을 돌아보니 윤진아가 병상에 누워있었다. 진아와 나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소꿉친구 사이였다.

"얀붕이 너도 차암 불쌍하다. 어쩌다가 저런 년이 꼬여가지곤."

"하아, 말도 마. 방금 전에 '미친개'에게 끌려가서 두들겨 맞았다니까. 송이와 사귀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단다."

"우와, 송이보다 더하네. 그런데 송이 저년은 어디 간 거야?"

"걔한테는 '미친개'가 나와 걔 사이에 접근하지 말라고 뻥쳤거든. 설마 진짜로 '미친개'에게 간 걸까?"

"에이, 설마. 천하의 안송이라고 해도 어떻게 '미친개'에게 대들어?"

"그럼, 그럼. 저 둘만 없었으면 학교생활은 좀 더 평화로웠을텐데."

"그러게 말이다. 송이 저 년은 아버지는 대체 뭐하시는 건지."

그때 학교를 울리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30초 이상 이어지더니 갑자기 뚝 끊겼다. 누군가 양호실 복도를 무언가를 질질 끌면서 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어... 설마 안송이는 아니겠지? 그럼 잘 자!"

진아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나는 오들오들 떨면서 양호실 문이 천천히 열리는 걸 지켜보았다. 송이가 나타나고 송이는 피투성이가 된 '미친개'를 던졌다.

"아, 아, 아니 대체 이건 무슨..."

"'미친개'가 우리 얀붕이를 아프게 했잖아. 그래서 살짝 손만 봐줬어."

살짝이라기엔 '미친개'는 너무나도 처참했다. 온몸에 피를 흘렸고 앞니는 나갔다. 얼굴은 푸르딩딩하고 퉁퉁 부었다.

"그리고 반지를 만들어봤어. '미친개'의 앞니로 장식했는데 어때? 어때?"

송이는 정말 해맑게 웃고 있었다. 이걸 받아주지 않으면 나도 저 '미친개'처럼 되겠지? 나는 덜덜 떨면서 말했다.

"소, 송이야, 사, 사랑해. 정말 정말 사랑해. 나랑 사귀어줄래?"

송이의 눈망울은 커졌고 즉시 나에게 달려와 나를 껴안았다.

"나도 사랑해! 우리는 영원히 함께야!"

송이는 다짜고짜 내 얼굴을 붙잡고 마구잡이로 키스했다. 괴로웠다. 송이는 나를 한참을 핥다가 말했다.

"하아, 하아, 이제 우린 곧 있으면 결혼하고 아기도 낳을 거지?"

"어, 어?"

"당연히 우린 영원히 함께잖아. 그런 의미에서 자기를 꼭 닮은 아기가 갖고 싶은데."

송이는 내 위에 올라타 옷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나는 저항하고 싶었지만 저항할 수 없었다. 송이의 눈은 매우 매우 깊고 어두웠다.

"풉."

그때, 어디선가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진아가 낸 소리가 틀림없다. 송이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볼록 튀어나온 병상 위 이불을 찾아냈다.

"여자애 냄새가 나."

송이의 눈에는 살기가 흘러넘쳤다.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대로면 진아도 무사하지 않을 것 같았다.

"송이야, 됐고 지금은 나와..."

"아니, 이 방해꾼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야."

송이는 천천히 다가가 이불을 확 재꼈다. 놀랍게도 거기엔 베게만 있었다. 진아는 어디로 간 거지?

그때, 빡! 소리와 함께 송이는 고꾸라졌다. 진아가 소화기를 들고 송이 뒤로 살금살금 접근해 뒤통수에 휘두른 것이었다. 송이는 충격에 기절했다.

"얀붕아, 빨리 도망가자!"

나는 누더기가 된 와이셔츠를 입은 채로 도망갔다. 진아의 손을 잡고 정신 없이 뛰어간 종착지는 가정실이었다. 가정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진아는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문을 열었다. 나와 진아는 가정실로 들어갔다.

진아는 가정실 사물함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멍 때리다가 말했다.

"진아야, 뭐 찾는 거야?"

"응? 아아, 반짓고리를 찾고 있어. 네 와이셔츠가 누더기인데 그 채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

진아의 말은 뭔가 미심쩍었다. 반짓고리가 뻔히 보이는데 대체 뭘하는 걸까. 가만히 진아를 살펴보니 식칼로 보이는 물체를 종이에 여러번 감싸고 있었다. 그것을 빠르게 품 속에 넣은 뒤 능청스럽게 반짓고리를 꺼냈다.

"아, 찾았다."

진아는 반짓고리를 들고 내 옆에 왔다. 진아는 무엇 때문에 식칼을 숨긴 걸까? 나는 와이셔츠를 벗어서 진아에게 줬다. 진아는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했다. 왠지 부끄러웠다.

"아, 다 됐다. 한 번 입어볼래?"

나는 와이셔츠를 입었다. 약간 어설프긴 했지만 그럭저럭 입을만했다. 진아에게 이런 솜씨가 있는지 몰랐다. 나는 진아에게 감사를 표하고 앞으로 어쩔 것인지에 대해 물었다.

"흠, 송이가 깨어나면 분명 우리를 족치려고 학교 전체를 샅샅이 뒤질 거야. 다행히 내겐 만능키가 있지만 언제까지 숨어다닐 수는 없겠지."

"만능키라니, 그런데 만능키는 어떻게 구했어?"

"내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여동생을 여동생이라고 부르지 못한다지만 그래도 꼴에 이사장 딸이잖아. 만능키 정도야."

"그래서 아까 양호실이 그냥 열려있었구나."

"그렇지. 아니면 이참에 땡땡이 칠까?"

"다시 양호실로 가는 게 좋을 거 같아."

"어째서?"

"송이가 아직까지 기절했다면 '미친개'와 송이를 병상에 눕히고 뒷정리를 하는 거야. 깨어나면 적당히 야부리를 털어서 송이를 안정시킬 수 있을 거고."

"리스크가 너무 커. 송이가 '미친개'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너도 봤잖아. 그냥 이대로 같이 도망치자."

"이대로 두면 송이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짓을 벌일지 몰라. 그래도 난 송이의 남자친구니까 어떻게든 노력해봐야지."

"남자친구라고? 억지로 고백한 거잖아!"

"그래도 내가 아니면 송이를 누가 막겠어? 송이가 나를 미친듯이 스토킹하고 내 주변인을 피곤하게 만들고 '미친개'를 곤죽으로 만들었다지만 나에게 해코지한 적은 없었잖아. 거기에 우등생이라서 무슨 짓을 저질러도 솜방망이 처벌을 받을테고. '미친개' 말이 맞아. 내가 희생하는 게 최선이야."

"우웩, 정말 없어보인다. 그렇게까지 생각한다면, 생각한다면..."

진아는 기습적으로 내 입에 입을 맞췄다. 소꿉친구의 행동은 예상 밖이었다. 진아는 울 것 같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먼저 고백할 걸. 늦겠다. 빨리 가야겠어."

나는 진아가 마음에 걸렸다. 나에게 연심을 품은 애가 순순히 나를 보낸 것도 그렇고 특히 식칼을 품고 있어서 더욱 수상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고 양호실로 달려갔다.

양호실에 도착하고 보니 아직도 송이와 '미친개'는 쓰러져있었다. 둘을 나란히 병상에 눕히고 빠르게 양호실을 청소했다. 나는 송이 앞에서 송이를 간호하는 척 했다. 잠시 후, 송이는 깨어났다.

"으으, 머리야. 얀붕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송이야, 일어났구나. 기억 잘 안 나?"

"모르겠어. 머리가 아프기만 하고. 하나도 기억이 안 나."

"그렇구나. 네가 '미친개'와 싸웠고 둘 다 쓰러졌길래 양호실로 데려왔어."

"기억이 날랑말랑. 그러면 그동안 나를 간호한거야?"

"응. 이제 우린 커플이니까."

"정말? 자기야, 사랑해. 끝나고 데이트하러 가자."

"그래, 그래. 우선 어디로 갈까?"

송이는 기쁨에 차서 그동안 굴리던 행복회로를 속사포처럼 읊었다. 그런 송이를 가만히 바라보니 생각보다 사랑스러웠다. 정신병 걸릴 것 같은 사이코 같은 모습만 보다가 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을 보니 정말로 귀여웠다. 그 동안 괜히 거절했을까 싶었다.

그러다가 5교시 예비 종이 울렸다. 송이가 움직여도 괜찮다고 하길래 나는 송이의 손을 잡고 교실로 향했다. 가는 내내 송이는 쉬지 않고 말했다.

복도에서 진아를 만났다. 진아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진아는 내 눈을 애써 피하려고 했고 나도 진아의 눈을 피하려고 애썼다. 송이는 진아와 부딪혀도 나 이외의 타인은 있을 필요가 없었는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자기를 만나려고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그 추운 날에 하룻밤을 꼬박 새우다니 내가 생각해도 미쳤지."

"저기, 송이야?"

"자기야, 왜?"

"너, 배에 그거, 피 아냐?"

"피?"

송이의 옆구리에선 검붉은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송이는 새어나오는 피와 내 눈을 번갈아보다가 쓰러졌다. 나는 빠르게 119에 신고했다. 빌어먹을, 이놈의 사립고는 산 속에 있어서 도착하려면 30분 정도 걸린단다.

그래도 구급대원 아저씨가 신속하게 응급조치법을 알려준 건 다행이었다. 양호실에 송이를 눕힌 후 응급처치를 하는 게 최선일 것이다. 그래서 송이를 들고 양호실로 달려갔다. 양호실은 잠겨있었다. 양호선생님은 진짜로 어디로 가신 거지?

"얀붕아, 거기서 뭐해?"

진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진아야, 빨리 문 열어줘. 송이가 죽어간단 말야!"

"좋네. 너도 걔 싫어했잖아. 저딴 년은 죽어도 싸."

"닥치고 응급처치 해야 하니까 문 열어."

"흥, 응급처치 해봐야 살릴 수나 있겠냐. 하필이면 복부에 난 깊은 자상인데 소방서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빨라야 30분이고."

진아는 어떻게 저렇게 자세히 아는 거지? 하지만 지금은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는 송이를 바닥에 눕혔다. 속옷으로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고 한데 뭉쳐서 옆구리에 난 상처에 조심스레 쑤셨다. 송이는 신음소리를 냈고 티셔츠는 피로 물들었다.

"기회를 그냥 차버리네. 저 년만 없으면 학교생활이 평화로울 거라고 말한 게 누구더라."

"애초에 송이가 맛이 가기 시작한 건 작년에 네가 송이를 따돌린 탓이잖아."

"송이, 송이, 그 놈의 송이, 씨발 알지도 못하면서 야부리 털고 있네."

"게다가 어쨌든 네가 송이 찔렀어.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증거 있어? 어? 증거 있냐고. 그래, 어디 둘이서 한 번 잘 해보셔. 소꿉친구보다 정신 나간 사이코 년이 더 좋다면 어쩔 수 없지."

진아는 그냥 떠났다. 나는 부글거리는 화를 억누르고 혼자 남아서 응급처치를 계속 시도했다. 다행히 구급차가 예상보다 일찍 왔고 송이는 무사히 병원에 후송되었다.

파란만장한 오늘이었지만 내일은 더욱 살벌할 거란 걸 이 때는 꿈에도 몰랐다.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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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문 너무 힘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