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샹들리에, 우아한 음악, 연회장 한가운데서 춤을 추는 남녀들.

 

시발, 이게 얼마나 보고 싶었던 풍경인지.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풍경은 얀데레 ‘여성향’ 미연시 게임의 엔딩 장면이다. 망할 동생년의 꼬드김에 넘어가 강제로 플레이 한 ‘여성향’ 게임. 근데 시발 이게 뭐람. 이 게임의 남주인공들은 죄다 정상이 아니였다. 선택지 하나 잘못 고르는 순간 눈에 하이라이트가 사라지는 것이 존나게 섬뜩하더라. 그거 보고 좋아하던 동생년은 진짜 미친년인줄 알았다.

 

어쨌든 동생년과 강제로 엔딩까지 본 게임의 세상에 들어왔을 때는 또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이 게임, 겉보기에는 단순한 연애 시뮬레이션으로 보이지만 사실 사람들이 전기파리채에 걸린 모기마냥 엄청나게 죽어나가는 게임이거든.

 

스토리 진행 중에 악의 축인 옆 제국과 전쟁을 하게 되는데 게임 내용이야 여주인공의 연애를 다루다 보니 그리 부각은 되지 않지만 어디어디서 크게 피해를 입었다는 언급은 꾸준하게 나온다. 근데 나 같은 양민은 그냥 방법도 없이 죽을게 뻔한 지라 필사적으로 살 방법을 찾았다.

 

이것 저것 방법을 찾다 보니 나온 결론은 철저하게 여주인공, 예리카에게 빌붙는다는 거였다. 작중에서 여주인공은 평민 출신이지만 특별우대생으로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고 여러 사건을 거치며 성녀로 인정받아 전쟁을 끝내게 된다. 얀데레인 남주인공들이 걱정 되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죽으나 전쟁에게 개처럼 죽으나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해 일단 저질렀다.

 

아카데미에서 여주인공을 발견하는 것은 쉬웠다. 그녀는 평민출신이라 귀족투성이의 아카데미에서는 눈에 띄는 존재였고 백안시 당하는 상황에서 다가가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나는 평민과 어울리는 별종 취급 당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들이 날 살려 줄 것도 아니고.

 

그 다음 과정은 순조로웠다. 남주인공들의 얀데레화에서 뒤지기는 싫었으므로 그들과 엮이는 이벤트는 모조리 박살냈다. 그런데 좀 무서운건 이 자식들 예리카랑 만난건 손에 꼽히는데도 눈에 보이는 기색이 심상치 않더라. 

 

어쨌든 오구오구 해주면서 예리카의 멘탈케어도 해 주고 한 달 동안 둘이서 고립도 되어 보고 성녀 각성 이벤트도 떠먹여 주면서 드디어 엔딩까지 올 수 있었다.

 

백금발의 머리카락에 하늘색 눈동자. 연회장에서의 그녀의 모습은 전에 없이 아름다웠다. 누군가를 찾는 듯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어디서 불나방 세 마리가 날아왔다.

 

한 마리. 원작 남주 1. 에릭 아델 에드윈.

이 왕국의 왕세자. 평상시에는 백마탄 왕자 그 자체인데 여주인공이 다른 곳에 눈을 돌리려는 기색만 보이면 바로 돌변해서 감금해 버리는 놈.

 

“여기 계셨군요.”

 

“아… 안녕하셨어요, 왕세자 전하.”

 

“오늘도 아름다우시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와 한 곡 어울려 주실 수 있으신가요?”

 

“죄송해요 전하. 지금은 잠깐 쉬고 싶어요.”

 

두 마리. 원작 남주 2. 칼릭스 듀크 파렐.

여성향 매체에 흔히 나오는 북부공작 포지션. 동생년이 좋아하던 싸이코패스. 

 

“거기서 혼자 뭐 하는 거지?”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어요.”

 

“그럼 같이 나갔다 오지 않겠나?”


“바깥이 쌀쌀해서 힘들 것 같네요.”

 

세 마리. 원작 남주 3. 가브리엘 지오반니.

마탑주의 후계자. 스토커.

 

“성녀님! 성녀님! 찾고 있었어요!”

 

“가브리엘?”

 

“저기 맛있는거 많아요! 같이 가서 먹어요!”

 

“미안. 지금은 먹고싶지 않아.”

 

남주인공들이 한마디 할 때 마다 예리카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지고 있다. 저게 다른 사람은 잘 못 알아보는데 나한테는 보이더라고. 원작과는 달리 예리카와 남주인공들 사이에 이벤트가 없다 보니 딱히 진해질 계기도 없었고. 아, 눈 마주쳤다.

 

“아, 이안!”

 

“오, 성녀님 아니십니까.”

 

“이안까지 그렇게 부르는 거야?”

 

토라진 표정의 그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해줬다.

 

“예리카.”


“….응”

 

그제야 마음에 들었다는 듯이 미소 짓는 그녀는 역시 이 세계의 여주인공답다고 느꼈다.

 

“그래서 여기서 혼자서 무슨 생각하고 있었던거야?”

 

“그냥 이것저것? 이때까지 있었던 일이라던가.”

 

“있었던 일? 어떤거?”

 

“뭐 산에서 고립 됐었던 일이라던지 같이 아티팩트 구하러 간 일이라던지.”

 

“그러네. 생각해 보면 많은 일이 있었어.”

 

후훗, 하고 그녀가 웃는다.

 

“이안.”

 

“응?”

 

“이안은 말이야…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어쩐지 긴장한 기색으로 물어본다.

 

“글쎄… 영지야 형님이 물려받으니 형님 밑에서 일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괜찮은 여자 만나서 결혼하고 사는 거지 뭐.”

 

“….결혼?”

 

예리카가 나를 바라본다. 뭐지? 뭔가… 눈에서 광채가 사라진 느낌인데.

 

“나도 결혼은 해야 하니까. 형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대를 잇는 건 내 일이고.”

 

“그렇구나… 그럼 이안이 결혼하고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난 그냥 착한 사람이면 별 불만 없는데.”

 

무언가 불만스러운 얼굴. 괜히 골려주고 싶어서 이번엔 내가 물어봤다.

 

“그럼 넌 어떤데?”

 

“어… 어?”

 

“넌 어떠냐고. 역시 방금 세 명 중 한명?”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야,야! 소리 지르지 마!”

 

방금 소리로 여기 저기서 쳐다보는게 느껴진다. 예리카도 시선을 느꼈는지 흥분을 가라앉혔다.

 

“아무튼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럼 나중에 봐.”

 

그렇게 예리카가 떠나자 시선이 흩어졌다. 안도의 한숨을 쉰 후 뒤를 돌아보자 원작 남주인공 3인이 눈에 하이라이트가 사라진 채 쳐다보고 있었다. 

 

 

…….. 시발?

 

 

 

 

 

그 이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존나게 무사히 연회가 끝난 후. 집에 돌아가기 위해 마차로 향하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이안 경! 이안 막시로프 경 맞으시죠?”

 

“네, 제가 이안입니다만 누구시죠?”

 

날 불러 세운 것은 밤하늘 같은 검은 단발에 선홍빛 눈동자를 가진 얼음을 연상케 하는 소녀였다.

 

“후우… 드디어 찾았네요. 제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기나 해요?”

 

“아니, 누구신데 저를 찾으신 겁니까?”

 

“저는 엘렌. 엘렌 듀크 팔렌이에요.”

 

“네? 그렇다는 건…”

 

“맞아요. 전 팔렌 공작인 칼릭스 듀크 파렐의 여동생이에요.”

 

그 말을 듣고 다시 한번 살펴보니 원작 남주인공 2. 칼릭스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

 

“공작가의 영애되시는 분께서 왜 저를 찾으신 겁니까?”

 

“후우…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요.”

 

엘렌은 크게 숨을 들이키더니 결연히 소리쳤다.

 

“저를 여기서 납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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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본 연중된 타입문넷 소설 생각나서 비슷하게 써 봄. 제목이 조연 뭐였는데 찾아도 게시물이 안나옴.

플롯은 일단 짜 놓긴 했는데 글 쓰는 속도가 빠른 편이 아니라서 다음편이 언제 나올지는 장담 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