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이익…!”


“놀라지 마렴, 인간의 아이야. 나는 널 잡아먹진 않을 거야.”


어린 인간 남자 아이와 뱀파이어. 


원래라면 이 남자 아이는 피도 살도 모두 뜯겨, 훌륭한 아침 식사 거리가 될 예정이었다. 


불행 중 다행일지, 남자 아이는 간신히 ‘온건한’ 여성 뱀파이어를 주인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아이는 여러 또래 아이들이 ‘주인’에게 끌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았다. 


‘맛이 좋았다’ 라던가, ‘연하고 부드러웠다’ 라는 말을 듣고는


노예를 거래하는 노예 매매소가 아니라 고기를 매매하는 도살장에 자신이 잡혀 왔다는 걸 눈치채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헌데, 웃기게도 도살장에서 애완용 가축을 데려오는 이상한 뱀파이어가 바로 여기 있었다. 


프릴 3세. 고위 뱀파이어의 피를 물려 받았으나 승계에 관심을 두지 않아 집을 나온 떠돌이. 


먹는 것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아 병에 담긴 피나 피를 곁들인 요리 정도에만 만족했지, 다른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고급’ 요리에는 별 뜻을 두지 않았다.


…인간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 고급 요리들은 하나같이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설명하기도 힘들 정도로.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인간들은 뱀파이어에게 함부로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 


‘공물’로 자신들의 대척점에 선 자들을 핍박하고 유린하여, 그들의 자손들을 바쳤다. 


인간은 그랬다. 궁지에 몰렸더라도 기꺼이 동족을 팔아먹을 정도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귀엽고 깜찍하게 생긴 남자 아이를 보기 전까지는. 


두려움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가련한 아이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앞으로 다가올 일을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은 있니?”


“…안톤… 안톤이에요.”


“안톤, 멋진 이름이구나. 누나는 프릴이라고 부르면 된단다.”


“…절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래, 어떻게 할까. 


그녀는 인간에 대해 아는게 그리 많지는 않았다. 


지금 안 것이 하나 있다면, 정말 탐스럽게 보인다는 것. 


그녀는 무심코 입맛을 다셨고…


“…히익!”


소년은 겁에 질릴 수 밖에 없었다. 


“어머나, 미안.”


그녀는 멋쩍게 웃고는, 안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사뿐히 앉았다. 


“그래, 안톤. 보다시피 나는 인간에 대해 아는게 없단다. 하지만 이제는 알 필요성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바야. 널 내 집사로 둘 거거든.”


“집…집사요?”


“그래, 내 시중을 드는.”


이왕이면 손노리개보다는 쓸모 있는 손노리개가 낫겠지, 싶었다.


그녀는 하루종일 이 겁에 질린 불쌍한 아이에게 여러 질문을 건넸다. 


먹는 것, 자는 시간, 할 줄 아는 것들.


아이는 빵이 먹고 싶다고 했다. 잠은 어두워지고 나서 조금 있다가 잔다고 했다. 


할 줄 아는건 아직 없다고 했다. 그러나, 가르쳐만 준다면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았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랑 크게 다르진 않구나.”


얼굴, 신체, 그리고 언어. 크게 차이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피부와 이빨 정도? 송곳니가 있는건 맞지만, 자신보다는 날카롭진 않았다. 


“…알아가는데는 시간이 조금 걸리겠구나. 안톤.”


내일은 인간에 대한 서적을 찾아봐야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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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그 이빨 치워.”


“…! 이런, 높으신 아가씨 아니야.”


“흐윽… 프릴 아가씨…”


어두운 골목길에서 찾아낸 안톤은, 저급 흡혈귀 두놈이 자신의 소유물에 손을 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안톤을 거둬들인지 이제 1달. 그녀는 안톤을 위한 식량과 방을 준비해 주었다. 


1주일동안 안톤의 생활 습관을 지켜 보고는 할 일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었다. 


방을 치우는 법, 설거지를 하는 법, 자신의 식사 시간과 선호하는 피. 


물론 피를 언급했을 때, 사색이 되어 안톤이 파르르 떠는 모습에 안쓰러워 머리를 연신 쓰다듬어 주기도 했지만. 


2주째에는 안톤이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엉망이었다. 덜 닦인 마룻바닥과 얼룩이 남아 있는 접시들. 


솔직히, 어린 인간의 아이가 가사 노동을 잘 해 낼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안톤은 나름 열심히 낑낑 거리면서 설거지를 하고, 작은 손으로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었지만 프릴이 만족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이 외출할때마다 작은 걸음으로 달려와 서툰 인사를 하고, 먼지를 뒤집어 쓴 채로 자신이 해낸 것을 우물쭈물하며 보여주는 것은 나름 볼 만 했다. 


그녀는 부드럽게 서툰 부분들을 지적하면서도, 서서히 나아질 것이라며 그를 쓰다듬고는 했다. 


더 이상 안톤은 떨지 않았다. 


3주째에는 그에게 바깥 세상을 가르쳤다.


인간은 가축이라는 것은 안톤 스스로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프릴은 언제까지고 이 아이를 안에만 둘 생각이 없었다. 


가끔은 바깥에 나가 밝은 세상 - 뱀파이어는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 을 인간은 보아야만 한다는 구절을 책에서 찾았다. 


그렇기에, 자신이 자는 동안 안톤은 하인의 신분으로 심부름을 하도록 하게 하고 싶었던 프릴은 마을의 지도를 보여주며 무엇이 있는지 가르쳤다. 


하지만 프릴은 귀하게 자란 자식. 그녀를 건드릴 자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별 걱정 없이 밖을 다닐 수는 있었지만…


안톤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안톤은 뒷골목으로 끌려간 것이었다. 


물론 프릴은 그의 첫 외출이기에 미행을 한 것이다만, 설마 바로 일이 터질 줄은. 


“이야, 귀하디 귀한 그 아가씨가 이런 고기를 하인으로 쓸 줄이야.”


“탐스럽기 그지 없어, 응? 발딱발딱 뛰는 이 혈관을 보라고. 정말이지…”


“내가 두번 말하게 하지는 않는게 좋을 텐데.”


그녀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가문에서 나올 때, 어머니가 챙겨주던 장검. 


그걸 오늘에서야 쓸 줄이야. 그것도 나를 위한게 아니라 내 소유물을 위해서.


생각해보니 웃긴 상황이었지만, 일단 잡념은 뒤로 무르는 그녀였다. 


“어이쿠, 어이쿠. 그래 그래 진정하라고 아가씨. 당신과 엮여봤자 좋을 일 없는 건 알아.”


“애초에 당신 것인 걸 알았다면 우리도 진작 놔 줬다고. 낄낄.”


실 없이 웃으면서 그를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푸는 불량배 흡혈귀들. 


안톤은 울면서 프릴의 품에 달려들었고, 프릴은 그런 그의 태도에 심히 당황했다. 


“어…어머. 안톤?”


“무서웠어요.. 무서웠어요 아가씨…”


가련한 아이가 이리 애교를 부리니, 프릴은 뭔가 안에서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가문의 재물도, 권력도 크게 뜻을 두지 않았던 그녀는 이제서야 소유욕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헤에, 꽤 잘 길들였잖냐. 근데 아가씨, 그 아이 표식은 없는거야?”


“표식 잘 남겨 두라고. 하마타면 우리 목이 오늘 달아날 뻔했잖아. 노예 인장이나 귀에다가 표시나 달아두라고. 쯧, 오늘은 공쳤네.”

“…표식, 어디서 달지?”


“…뭐야. 그걸 우리한테 묻는 거야? 마을 회관에서 등록하는 거였나?”


“그럴껄? 근데 등록해 본 적이 있어야지. 우리는 그냥 뒷골목 잡배라고… 뭐야. 둘 어디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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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프릴과 안톤은 마을 회관에 당도해 있었다. 


아름다운 붉은색 날개를 펼친 채로, 한쪽 날개는 안톤을 감싼 채로. 


그리고 그녀는 양산을 살포시 쓴 채로. 


“흐아아암… 낮 근무는 힘들단 말이지.”


여기 마을 회관의 낮 근무를 맡게 된 한 뱀파이어 여인이 있었다. 


이름은 닐리스, 나름 뱀파이어 치고는 귀여운 인상을 지닌 여자였지만…


지금은 연속되는 낮 근무에 완전히 진이 빠져버린 그녀였다. 


“왜 나만 낮 근무냐고오오… 피곤해 죽겠어…”


“저기,”


“에… 에! 무슨 일로 마을 회관을 찾아오셨나요?”


“이 아이, 태그를 붙여 두고 싶은데.”


“아, 잠시만요… 헤에.”


인간 남자아이. 그것도 꽤나 귀엽게 생긴. 


오늘은 적어도 낮 근무임에 감사할 일이 하나 생겼다 라며 빤히 아이를 쳐다보는 닐리스. 


그녀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면, 흔히 귀여운 강아지나 고양이를 바라보는 눈빛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물론 안톤은 방금의 일도 그렇고…


여우가 토끼를 바라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안톤의 반응을 알아 채고는, 안톤을 자신의 품에 안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프릴. 


“쉬이… 괜찮단다. 누나가 여기 있어요.”


그녀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일단 여기, 작성할 서류를 드릴게요. 제출해 주시면 10분 안에 태그 제작해서 드릴 수 있어요.”


“고마워요. 자, 안톤, 누나랑 같이 서류 작성하러 갈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는 안톤과 그녀는 곧 바쁘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름은 안톤… 나이는 음… 안톤, 나이가 어떻게 되니?”


“아마 10살일 거에요, 프릴 아가씨.”


“프릴 누나라고 해 주겠니?”


“그래도 집사인데-“


“누나. 프릴 누나.”


“…프릴 눈나.”


“허으윽.”


괴상한 소리와 함께 주저앉는 닐리스. 자신이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지만, 안톤은 꽤나 귀여웠다. 혀 짧은 소리를 내는 것도 그렇고…


프릴은 쿡쿡 웃으며, 안톤을 정성스레 쓰다듬는다. 


그런 손길이 좋은 듯, 자신의 고개를 프릴에게 서서히 들이미는 안톤…


그리고 그런 그 둘을 황홀하게 바라보는 닐리스가 있었다. 


‘어머나 어머나… 나도 안톤… 안톤이라고 했었나? 어쨌든! 저 애 쓰다듬어 주고 싶어. 귀여워 죽겠어 정말!’


“자… 이제 여기. 안톤, 여기 네 피를 살짝 묻혀야 한단다.”


“제 피를요?”


“그래. 그래야 혹시나 네가… 음, 다치거나… 나쁜 사람들이 잡아가면 그 피로 찾아야지?”


“그러면 피는 어떻게…”


“손, 이리 주렴.”


펜 끝의 뚜껑을 여니 작은 침 하나가 날카롭게 서 있었다. 프릴은 침을 놓여 있는 천으로 잘 닦아 내고는, 촛불에 대어 소독을 마쳤다. 


그리고는…


“아야.”


“우리 안톤, 잘 참는구나. 이제 여기다가 손가락을 대렴.”


피를 공란에 떨어뜨리고는, 그녀 역시 자신의 손가락을 찌른 뒤 자신의 서명을 멋들어지게 써내려갔다. 


“우와, 글씨가 정말 예뻐요.”


“마음에 드니? 후후… 다음번에 가르쳐 주도록 할게. 일단 이걸… 흐아암. 제출해야겠지?”


역시 낮에 활동하는건 많이 피곤하다며, 졸린 눈을 비비며 프릴은 서류를 닐리스에게 건넸다. 


“서류 받았습니다… 에? 프릴 님이셨나요?”


“만난 적이 있던가요?”


“네, 분명 전입 신고하실 때… 분위기가 많이 밝아지신 것 같네요?”


“칭찬으로 받아들이죠.”


닐리스가 처음 프릴을 보았을 때는, 고고하고 차가운, 그야말로 절벽 위의 꽃이라는 말이 알맞는 여자였다. 주변의 나름 지위가 있는 뱀파이어들이 그녀에게 숱하게 만남의 시작을 알리는 달콤한 말들을 꺼내어도, 그녀는 독기가 서린 말들로 쫒아내는게 다반사였다. 


그녀는 그렇게 혼자를 유지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만 같았다. 


오늘 그녀의 온화한 미소와, 인간 아이에게 보이는 미소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오늘만큼은 이 자리에 있기를 잘 했다며, 미소를 감추지 않고 자신의 새 업무를 처리했다. 


“표식에 각인이 새겨질 때 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릴 거에요. 나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저는 잠시 앉아서 기다리도록 하죠.”


“저기,”


“네?


“아이가 많이 귀엽네요. 어디서 데려 오셨는지 물어봐도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우연하게… 매매장에서 보게 되었답니다.”


“매매장이요? 저 정도면 이종족 노예 판매소에 있어도 될 법한데…”


“그렇죠? 귀여운 아이랍니다.”


둘은 넋을 놓고 안톤을 ‘감상’했다. 


은발의 머리칼에 푸른 눈동자. 


남자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여린 체형과 앵두빛 입술. 


둘의 시선을 눈치 채자, 안톤은 살짝 겁먹은 듯 몸을 움츠렸다. 


“어머나, 겁을 먹었나 봐요. 안톤을 달래러 가야겠군요.”


“이왕이면 데려와 주시겠어요? 분명 당신의… 집사라고 했나요?”


“네, 집사로 키우려고 하고 있죠?”


“가끔 업무를 처리할 텐데, 제가 눈도장을 찍어 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그래요, 그럼. 안톤? 이리 와 보겠니?”


자신의 주인의 부름에 총총걸음으로 다가와 프릴에게 폭 안기는 이 아이는…


그래. 닐리스의 혼을 쏙 빼놓았다. 


“후후... 우리 안톤…?! 직원분? 코피! 코피!”


“….! 어머! 어머!”


잠깐의 소동이 지나간 후, 닐리스는 그에게 달아 줄 표식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안톤? 나는 닐리스야. 여기서 일하는 뱀파이어란다.”


“제 이름을 어떻게 알고 계세요?”


“그야 네 주인님이 건네준 서류를 보고 알았지. 앞으로 잘 부탁해.”


“저도 잘 부탁…드릴게요!”


“하으윽..”


“어머나 어머나.”


안톤은 아직 어려서 몰랐다. 이 둘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이 둘이 자신의 인생에서 얼마나 큰 지분을 차지할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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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은 열심히 일했다. 


점점 집안일이 손에 익게 되었고, 


요리 솜씨 또한 늘어만 갔다. 


집안일을 도맡아 하다 보니, 몸은 날카로운 근육선으로 뒤덮여 갔고, 


누가 뭐래도 미남이라고, 결코 뱀파이어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외모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귀에 달린 표식만 아니었다면, 숱한 구애를 받았으리라. 


"닐리스 씨, 저는 충분히 멋진가요?"


"에?"


예상치 못한 질문이 닐리스에게 날아왔다. 뭐라고? 멋지냐고?


"음... 그러니까... 뱀파이어의 기준에서, 제 얼굴은 충분히 미형일까요?"


뭔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는 안톤을 보고는, 그녀는 싱긋 웃어 보인다. 


지금이야 미소로 끝나지, 예전 같았으면 코피를 또 왕창 쏟았겠지만. 


"그렇지, 우리 안톤, 아주 잘생겼고 말고. 넌 어렸을 때부터 누나 심장에다가 주먹을 마구 날렸어."


"진짜로요?"


"물리적으로 때렸다는 말이 아닌 건 알텐데."


"그런가요? 그렇다면... 음... 주인님의 마음에..."


"음? 뭐라고?"


"아니에요! 그냥... 오늘이 제가 온 지 8주년이 되는 해이기에. 제가 잘 자랐는지, 그걸 알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걱정하지 마렴. 너는 충분히 잘 자랐어. 아주 탐스럽게. 후후.."


빈 말이 아니다. 몇번이고 안톤은 여러 뱀파이어들의 화두에 오르고는 했다. 


저렇게 잘 생긴 아이를 주운 프릴이 부럽다며, 노예만 아니었다면 냉큼 채 갔을 것이라며. 


자신 역시, 그날 프릴에게 용기를 내어 말을 걸지 않았다면 이렇게 안톤과 친하게 대화를 할 일 도 없었을 것이리라. 


"...꿀꺽."


겁을 먹은 안톤을 본 닐리스는 그 날을 떠올렸다. 처음 안톤을 본 날을. 


그 때도 저렇게 겁을 지레 먹었었지. 


"농담 농담! 자, 어서 가렴. 프릴 씨가 기다리잖니."


"오늘 감사했습니다. 다음 번에 또 뵐게요!"


"...하아. 나도 프릴씨 처럼 애 하나를 키워 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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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안톤은 마중을 나온 프릴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장을 봐 온 것을 보여 주었다. 


"이건 소의 안심이에요. 꽤나 신선한게 들어 와서, 냉큼 사 왔어요."


"잘 했어. 소는 나도 즐기는 편이니."


"그리고 이건 곁들일 채소들이에요. 싱싱한 걸 제대로 사 왔을까요?"


"어디 보자, 응. 잘 사왔어. 잘 했어, 안톤."


칭찬을 받은 안톤은, 뭔가 기대하는 눈치로 그녀를 쳐다 보았다. 


"여전히 쓰다듬어 주는 걸 좋아하는구나. 키는 이렇게 컸는데도 말이야."


"헤헤..."


그녀가 그렇다고 쓰다듬어 주는 것을 싫어하느냐? 그건 아니었다. 


그녀는 딱히 매번 생각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런 행위 하나 하나가 그녀를 바꾸어 나갔다. 


좀 더 부드럽게, 좀 더 상냥하게. 


그녀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그녀의 차가운 마음을 녹인 건 이 아이였다. 


그녀는 어느 새 바뀐 자신에게 큰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다들 바뀌었다 하니, 그렇구나 하고 넘길 뿐이었다. 


다만 안톤에 관한 것은 달랐다. 


자신이 가르친 것을 안톤이 능숙히 해낼 때 마다, 


안톤이 자신의 칭찬을 기다릴 때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가슴을 옥죄어 오는, 뭔가 갑갑하고도 싫지는 않은 이 느낌. 


그래, 그러고 보니 닐리스가 느꼈던 기분이 - 


"저, 주인님?"


어머나, 도대체 얼마나 쓰다듬어 주고 있었지?


"죄송합니다, 슬슬 식사 때가 다가오기에..."


"아니야, 괜찮단다. 그럼 나는 네가 요리하는 것을 지켜 보마."


"오늘 업무는 마치셨는지요?"


"기념일을 챙기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단다, 안톤."


"아... 감사합니다."


홍당무같은 얼굴로 멋쩍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 서둘러 주방으로 달려가는 안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감정은 뭘까..."


아이야, 너는 이 답을 알까.


안톤은 주방에서 안심을 손질하고, 기름을 두르고 달군 팬에 하나 둘 씩 고기 덩이를 굽기 시작했다. 


무심코 안톤은 자신이 곁들일 피를 준비하지 않은 것을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프릴이 피를 필수적으로 식사에 요구하지 않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기념일, 피가 없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주인님, 피를 미쳐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괜찮아, 그렇게 즐기진 않는단다. 안톤.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단다.”


“저, 혹시,”


“왜, 안톤?"


“무례한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오늘의 피는 제 것으로 해도 괜찮을지…”


“…안톤."


"예, 주인님."


안톤은 나이를 먹고, 어느새 건장한 청년이 되었다. 


그의 외모가 훌륭하게 되었다고, 일찍이 이야기를 했었다. 


프릴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관심이 그렇게 있지는 않았다. 


허나, 안톤은 조금 특별했다. 


본디 세계에 관심을 그리 두지 않았던 그녀가 이 아이를 들이고 나서는 서서히 바뀌어 갔다. 


처음에는 안톤에게 자신을 '누나'라 부르게 하였다. 


어린 아이가 벌써부터 자신을 노예로 생각하면 너무 잔인할 것만 같아.


별 생각 없이 그렇게 했건만, 어느새 아이는 다시 자신을 주인이라 부르고 있었다. 


헌데 어째서일까? 왜 다시 누나라 부르게 하지 않았을까?


다른 뱀파이어들이 부러워하는 아이를 노예로 들였기에?


그래서, 이 아이가 내 것이라 스스로 청하는 것 같아서 만족했기에?


자신이 직접 데려와 정을 주고 키운 귀여운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나 매력적인 하나의 남자가 되다니.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도 된다고 언질을 주었건만, 


‘누나’와 같이 살고 싶다며 밤에 일어나고 아침에 잠을 잔다니. 


음식에 꽤나 공을 들일 필요는 없다고 해도, 


‘누나’가 조금 더 맛있게 먹어주길 바란다며 플레이팅을 공부하던 아이가.


어느새, 눈치 챘을때는 나를 ‘주인님’이라고,


그렇게 매혹적인 목소리로 내 귀를 간지르고,


이제는 너의 목덜미를 보면 내 심장이 빨라지고, 


내 가슴이 죄여 오는 듯한 느낌이 강렬하게 드는데.


"주인님?"


어느새 프릴은 자신도 모르게 안톤의 뒤에 있었다.


그녀는 뱀파이어, 안톤은 인간. 


종족의 차이에서 나오는 키의 차이는, 안톤이 성인이 됬음에도 불구하고 프릴이 좀 더 큰 채로 남아 있게 하였다. 


그리고 지금 프릴은 안톤의 머리 냄새를 맡으며, 그를 껴안고 있었다.


"저, 주인님, 요리 중이기에... 이렇게 가까이 붙으시면 위험합니다."


한번도 프릴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 외의 스킨쉽을 한 적이 없었다. 


호감을 가진 대상이 이렇게나 가까이 있다면, 어느 남성이고 기뻐하지 않을 리가 있을까.


그러나 신분과 종의 차이가 안톤의 마음을 복잡하게 하였다. 


그렇기에, 언제까지나 응석을 부리는 입장으로 남아 있고 싶었다. 


"아이야... 아이야..."


프릴의 목소리는 뭔가 애타면서도... 너무나도 달콤했다.


상냥한 것보다는, 유혹.


"주인님?"


안톤의 심장이 뛰었다. 


안톤은 자신이 처음에는 두려운 줄 알았다. 


그것이 아니었다. 


무언가.. 기대하는 듯한. 자신이 이런 상황을 원했다는 것만 같이 심장은 뛰었다. 


"아이야, 지금 나보고 네 피를 마시라는 말이니."


"실례되는 말이었다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아가, 내 아가. 


널 어릴 때부터 지켜 보았고, 너를 성심 성의껏 키워 왔단다.


최근, 너를 볼 때 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 심장을 누가 꽉 잡고, 놓지 않는 듯한.


저려 오는 이 감정이 아프면서도, 싫지는 않더구나. 


나는 네가 장성한 모습을 보며, 내가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 생각했단다.


헌데 오늘 네가 하는 말을 들었다. 


너의 피를 내가 취해도 된다는 그 허락을. 


네 말을 들었을 때, 드디어 알겠더구나. 


내가 느끼는 감정이 뿌듯함이 아니라는 것을. 


네가 그런 말을 하면


내가 참을 수가 없구나. 


오늘의 나를 부디 용서해 다오. 


오늘이 가더라도 나를 미워하지 말아 다오. 


내가 너의 주인이라는 것을 그리 신경쓰고 살지는 않았다만은, 


오늘만큼은 우리 사이에 맺어진 관계의 힘을 빌려야겠구나.


내 너를 오늘 취하겠다. 네가 나의 것이라는 것을 친히 새겨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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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 고오급 사료만 조용히 집어 먹다가 나도 받은 만큼 주고 싶다는 마음에 이렇게 글 하나 올려 본다.

쓰고 보니 기네. 이 부분은 사과해야 할 것 같다. 머릿속으로 상상한것도 너무 많고, 안쓰자니 아깝고 해서 적어 보니 이만큼 나와버렸다.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