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날에 야근이라니 너무하지 않냐."


 일요일 밤에, 그것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에 말이다. 5월달에 접어들면서 일광 시간도 점점 길어지고 기온도 30도에 육박하는데 가뭄에 단비같은 비였다. 그렇잖아도 이번 달 들어 갑자기 황사가 기승을 부려 공기도 안 좋았었는데 기분을 상쾌하게 만드는 좋은 비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집 안에서 놀때나 좋은 일이지, 주말 토 일 이틀 연속 출근하면서 오늘은 야근까지 덧붙여서 하면 기분이 아주 언짢다. 아무리 세미정장이라지만 젖으면 이만저만 골치아픈게 아니고, 움직이기도 불편한데 비까지 오면 기분이 아주 별로다.


 "선배, 10시 지났으니까 야근 아니고 특근 맞죠?"


 "아, 그러네. 근데 일단 주말출근인 점에서 특근 수당 나오긴 하니까."


 옆에서 나란히 걷는 후배와 우산 끝이 맞닿는다.


 시간도 10시가 넘었고, 비도 오는데다 집단 모임이 금지된 탓에 길거리는 한적하다. 특히나 회사가 위치한 이런 산업단지 같은 경우는 오히려 주중보다 주말이 텅 비어 있다. 인구 공동화 현상. 특히나 이쪽 업계는 더 하다.

 길거리에서 들리는 건 후배와 나의 발걸음 소리밖에 없었다. 신발 밑창이 빗물에 닿아 찰박 찰박하는 발걸음 소리. 후배는 주말출근에 야근까지 했는데 뭐가 그리 좋은지 헤실헤실 웃으면서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선배, 선배. 우리 한 잔 하고 갈래요?"


 "이 시간에? 야, 10시간 뒤면 또 출근인데 괜찮겠어?"


 "한 잔만 하고 가는 건데 뭐 어때요? 차 끌고 온 것도 아니면서."


 후배가 내 소매를 잡아끌자 내 몸이 기울었다. 분명 이 근처는 직장인을 상대로 식당이 좀 있기는 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십중팔구는 닫았다. 주말이라 주중을 겨냥하는 회사원들도 없을 테고, 시간도 늦었고, 집합금지 명령 때문에 오래 문을 열고 있기도 힘들다.

 당장 지금 나도 지하철 막차를 탈 수 있을까, 없을까 모르겠어서 택시를 부를려고 했는데. 요식업이라면 말 할 필요도 없다.


 "한 잔 하는건 좋지. 근데 문 연데 없는데 어디서 먹게?"


 "제 자취방 요 앞이잖아요. 잠깐 들어가서 한 잔 할까요?"


 후배는 몇 블록 앞을 가리켰다. 확실히. 후배가 이 근처에 산다는 건 알고 있었다. 산업단지의 회사원들을 겨냥한 원룸촌. 그 중 하나가 후배가 사는 집이다. 매번 늦잠을 잔다면서 헐레벌떡 나오는 주제에 절대 지각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걸어서 고작해야 십여 분. 왠만하면 늦을 일이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후배의 집에 멋대로 들어가서 한 잔 하는 건 윤리적으로 괜찮은가?


 "오빠, 뭘 망설여요? 다른 거 없이 한 잔만 하자니까요?"


 "나야 괜찮은데, 넌 괜찮겠어?"


 후배를 바라보며 묻자, 후배는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대답한다.


 "아니, 이번에 우리 부른 박 팀장 좀 까고 싶어서 그래요. 진짜 세상에 어떤 미친 인간이 일요일 밤 10시 넘어서까지 야근시켜요? 진짜 미친거 아니예요? 진짜 박 팀장 좀 까고 싶은데 선배도 좀 끼고 싶지 않아요?"


 "아."


 뭔 말인지 알겠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곤 후배의 뒤를 따랐다.

 야근 뒤에는 상사 까는 맛이 또 있지. 사실 그게 회사생활의 낙이고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소다. 일 끝나고 고단한 몸에 직장 동료들과 한 잔 하면서 노가리 좀 까면 그래도 내일 아침 9시 출근할 기운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후배도 늘 밝은 척 하지만 힘들었구나. 막상 이런 말을 들으니 안쓰럽게 느껴진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주말 출근에 야근까지 시키는 건 너무 했지."


 "아무리 회사가 바빠도 이건 너무 하긴 했죠. 그쵸? 응? 비도 오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후배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것을 보곤 실소했다.







-







 "오빤 무슨 술 좋아해요? 쏘주 까긴 좀 그렇고 맥주나 한 잔 할까요?"


 당장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소주 까긴 좀 그렇지. 나도 후배의 생각에 동감했다.

 자취방 앞, 24시 편의점 안에 뭘 먹을지 골똘히 고민하는 후배가 있었다.


 바지 밑단은 비가 와서 젖어 있었고, 양말도 축축하다. 당장이라도 어딘가 몸을 뉘이고 싶은 마음이다. 후배는 주류가 잔뜩 늘어서 있는 냉장고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무슨 술 좋아해요? 하이네켄? 테라? 요즘엔 테라 엄청 많이 보이던데."


 "나 그건 싫어해."


 "그럼 하이네켄으로."


 그리곤 몸을 돌려 안주거리를 살핀다. 땅콩, 마른 오징어, 황도 캔, 잡다한 물건들이 늘어서 있지만 후배가 가는 곳은 과자 코너였다.


 "안주엔 새우깡이 국룰이죠."


 "맞지."


 왠지모르지만 호프집에 가면 새우깡이 술안주로 항상 나왔었다.

 후배는 품에 새우깡 큰 봉지를 하나 안고 카운터 옆에 있는 깔라만씨를 하나 챙기더니 그대로 계산했다.


 "야, 내가 계산할게."


 후배한테 계산을 맡기는 건 선배로써의 예의가 아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선 더치페이니 뭐니 해도 사회생활에선 상급자가 돈 내는 게 당연시 되어 있다. 나이가 어릴 수록 경력이 짧고, 그럴수록 연차가 적어 받는 월급도 적다. 나이 많은 상급자는 당연히 보편적으로 많은 월급을 타고, 안 그래도 쪼달리는 후배들에게 밥까지 사라고 하는 건 너무 염치없는 짓이다.

 무엇보다 상급자들도 어릴 적엔 다 선배님들 밥 얻어 먹고 살았다.


 "아, 선배! 됐어요. 가서 문이나 좀 열어 줘요. 저 손에 든 거 많으니까."


 "아니, 진짜 내가 낸다니까?"


 "아 쫌 가요, 쫌! 이따 들어가면 내가 돈 달라고 할게. 먼저 나가 있어봐요."


 내가 내려고 했는데.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별 수 없지.


 나는 카운터 옆을 서성이던 걸 그만두고 후배가 말한 대로 편의점 문을 열고 나가 우산을 준비했다.

 막 내 우산을 펼칠 찰나, 카운터에서 계산을 마친 후배가 내가 펼친 우산 밑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헤헷, 저 자취방 얼마 안 되니깐 같이 쓰고 가요."


 "손에 든 거라도 줘. 내가 들고 갈게."


 "싫어요. 그럼 우산 제가 들어야 되잖아요? 선배가 저보다 키 더 큰데 그게 더 불편하다구요."


 쪼끄만게 어쩜 맞는 소리만 해대는지 얄미울 지경이다. 나는 과자와 맥주를 품에 안은 후배에게 우산을 씌워 주고는 그녀가 인도하는 대로 향했다.


 "금방 가요. 별로 안 멀죠?"


 "진짜 가깝네."


 후배가 안내한 곳은 안쪽으로 한 블록 정도 더 들어가서 나오는 여러 원룸 건물들 중 하나였다.

 회사에서 가깝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가까웠을 줄이야. 이런 곳에 자취방이 있었다는 것을 먼저 알았으면 나도 가까운 곳에 이사했을 텐데. 입맛을 다셨지만 어쩔 수 없다. 전세 기간은 아직도 1년 8개월 남아 있으니까.


 "선배 혹시 늦게 들어간다고 뭐라 할 사람 있어요?"


 "응? 아니? 이 나이에 누가 뭐라 그러겠어."


 갑작스럽게 물어 보는 후배의 말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







 아니 근데 이거 정말 괜찮은건가.


 깨끗하고 향기로운 후배의 방 안에서, 후배랑 단 둘이 맥주 마시면서 노가리 까는 게.

 후배는 방 한 켠에 놓인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나는 그 옆에 앉은뱅이 책상을 옆에 두고 맥주와 안주로 놓인 새우깡을 집어 먹고 있었고.


 "와, 시간 진짜 잘 가네요. 벌써 11시 30분이에요. 요즘 지하철 시간 단축됐지 않아요? 막차가 몇 시였지?"


 "이 시간에 지하철 역까지 가면 이미 늦었어. 난 갈 땐 알아서 택시 타고 갈게."


 "헐 진짜 괜찮아요? 택시비 내 드릴까요?"


 "됐어."


 나는 앞에 놓인 새우깡을 계속 집어먹었다. 안 그래도 힘들어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새우깡을 하나씩 입 안에다가 밀어넣는 작업을 하며 어쩌다 후배 집에서 이런 모임을 갖게 됐는지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래, 살짝 정신을 놓았다.


 "선배. 술 약해요? 주량 얼마 정도 돼요?"


 "주량? 니 나이 땐 소주 두 병 정도 마셨는데. 요즘은 나이먹어서 그보단 좀 줄었겠다."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앞 뒤로 흔들던 후배가 말했다.


 "그래요? 그럼 이렇게 맥주 몇 캔 마시는 정도로는 택도 없겠네요?"


 "안 취하지."


 세상에 맥주만 먹고 취하는 사람이 어딨냐.


 나는 그보다 후배를 여자로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중이었다. 아는 여자 동창이 그랬는데, 자기 집에 남자를 들여놓고 방치플 당하면 그건 또 고자새끼냐고 그렇게 한소리 들어도 할 말 없다든데. 후배가 워낙 밝고 사교성이 좋아서 가벼운 마음으로 한 잔 하자고 한 건지, 나한테 수작부릴려고 집 안으로 끌고 들어온 건지 모르겠다.


 "아깝다. 맥주로 취하면 좋았을텐데."


 "뭐가 아까워. 나 집에 가야 돼."


 "집에 안 가면 되잖아요?"


 "?"


 나는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후배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목에 이질감이 들었다. 후배를 향했던 내 시선은 내 손목으로 향했고, 내 손목에 채워진 수갑은 후배가 앉아 있는 침대 다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박 팀장님이 내일은 안 나와도 된대요. 오늘 고생했다면서."


 "야, 야. 이거 뭐야? 수갑은 왜 채우는데."


 "박 팀장님한텐 고맙죠. 오빠랑 단 둘이 있을 시간을 만들어 주기도 했고, 이렇게 저희 집까지 들어올 계기를 주기도 했고."


 나는 손목에 묶인 수갑을 당겨 봤다. 탕 탕 쇠사슬 땡겨지는 느낌이 확실하게 들었다. 나는 후배를 바라봤다. 후배는 편의점에서 가져 온 검은 비닐봉투의 안쪽을 뒤지고 있었다. 빗물이 검은 비닐봉투에 뭍어 있었다.

 후배는 검은 비닐봉투 한에서 작은 사각형의 무언가를 꺼냈다. 콘돔이었다.


 "깔라만씨만 산 줄 알았죠? 이럴 줄 알고 콘돔도 같이 샀어요. 저, 준비성 철저하거든요."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다 넘어졌다. 손목에 수갑이 묶여 움직일 수 없었다. 내 손목에 연결된 수갑, 침대 다리. 열쇠도 없을 뿐더러 침대를 지금 들어 낼 수도 없었다.

 후배가 그 침대 위에 앉아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흐흥 거리며 콧노래를 부르던 후배는 어딘가에서 꺼낸 바늘로 콘돔 박스 째로 정중앙을 뚫어버렸다.


 "내일 출근 안 해도 된다잖아요. 선배는 지금 집으로 갔고. 저는 선배 행방 몰라요. 선배는 우리 집에 들어온 적도 없으니까."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선배, 지금 이해가 안 돼요?"


 후배는 몸을 일으켜 방 한켠에 있는 야구방망이를 집어 들었다. 회사에서 가끔 후배가 야구 이야기를 하는 걸 볼 수 있었다. 과장님, 팀장님들하고 하던 야구 얘기. 후배도 아마 어느 야구단의 팬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방 한켠에 야구방망이가 서 있어도 이상하다고 생각 안했다.


 그리고 후배가 야구방망이를 내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선배 여기서 못 나간다구요."


 나는 몸을 틀었고, 야구방망이는 내 머리가 아닌 어깨에 내리찍혔다.

 빠악. 하는 소리와 함께 뼈가 부셔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극렬한 고통에 바닥을 뒹굴었고, 야구방망이를 든 후배가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