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순이는 지쳐있었다


어릴적부터 기대를 등에 업고 자라왔다. 그녀의 양친은 이른바 극성부모라는 부류로 자신들의 이상적인 자식모습을 얀순이에게 강요했다.


그녀는 거부할 수 없었다. 부모의 요구로부터 도망치기에는 뒷일이 무서웠다. 조금이라도 부모가 제시하는 길에 어긋나기라도 한 날에는 어김없이 매타작이 날아왔다. 얀순이는 태어나서 자유로움이란걸 느껴본 적이 없다. 모든 것이 잘 꾸며진 거짓, 내가 누구인지 가치관이 채 형성되기도 전에 자신이 아닌 자신을 꾸준히 연기해왔다. 그녀가 쓴 가면은 이제 하나로서 몸의 일부가 됐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모두가 좋아했다. 착한 아이라는 칭찬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머리가 좋아 영재가 아니냐는 아부는 이제 익숙해졌다. 모든 것이 입 발린 소리. 얀순이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다. 그 부모를 보자. 입이 귀에 걸려있다. 딸은 그저 스스로의 과시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혐오감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알지 못한다. 애초에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른다. 이게 아니라고 느끼면서도 주어진 모습을 연기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오래 전에 망가졌다.


얀붕이에 대한 첫인상은 불쾌한 것이었다.

첫 눈에 반했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그녀에게 있어 얀붕이는 질투의 대상이었다.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남자. 타인의 시선을 전혀 신경쓰지 않아 바보라고 놀림받으면서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는 신기한 사람. 부모가 깔아준 레일을 따라서, 사랑받기 위해 철저하게 연기하는 나와 달리 내키는대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다.


치사했다.

나도 저렇게 되고싶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싶어. 근데 나는 뭘 바라는걸까? 어떻게 되길 원하는거야? 얀붕이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돼. 그게 무척 부러운 일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얀붕이처럼 될 수 없다. 사지에 묶인 실들이 떨어지지 않아. 평생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거야. 그래서 얀붕이를 용서할 수 없어. 이제서야 겨우 잊기 시작했던 후회를 다시금 되살린 그가 밉살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떨어뜨리자. 언제나 나를 향해 아첨해왔던 시시한 사람들처럼 만들어버리자. 아, 그래 얀붕이도 결국 별 볼일 없는 남자였구나. 그걸 느끼게될 때 그녀의 복잡한 감정도 사그라들겠지


그의 내세울 것 없는 외모를 칭찬했다. 한심한 수준의 성적을 격려했다. 유치한 취미에 공감해줬다. 모든 것이 얀순이와 비교하면 하찮은 수준, 그 것을 깨닫고 그녀를 우러러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너 힘들지 않아?'


'어...?'


무슨 말이야?

왜 그런 소리를 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부러워해줘. 너처럼 되고싶다고 질투해줘. 너보다 모든 것이 우월한 나를 칭찬해줘. 그건 내가 듣고싶은 말이ㅡ


'착한 사람으로 있는건 힘들지. 나같은 놈한테 억지로 맞춰줄 필요 없어. 다른 사람들한테도 마찬가지야. 조금은 편하게 굴어봐. 너 엄청 지쳐보이거든'


아아,

그래. 그건 그녀가 가장 듣고싶은 말이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는데, 그가 잡아줬다. 이해해줬다. 이제서야 알 수 있다. 왜 멋대로 살아가는 그가 미움받지 않는지. 얀붕이는 자기 스스로에게 자유로울 뿐이라고. 타인에 대해서는 세심한 배려로 해를 끼치지 않고 있다. 얀순이는 자신도, 타인도 잘 꾸며진 연극에 끌어들일 뿐이었는데.


그 날부터 얀순이는 바뀌었다.

얀붕이의 대화를 통해 이상적인 여성상을 유도하여 그의 취향으로 맞춰갔다. 이전과 같은 혐오감은 없다. 오히려 매일이 즐거웠다. 자신의 변화를 어필할 때마다 보여주는 얀붕이의 반응이 사랑스러웠다. 누군가를 위한 삶이라는건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나 행복한건 분명 얀붕이 때문이다.


그래서 얀붕이가 고백받았을 때는 두려웠다.

그 것을 허락했다고 알았을 때는 억장이 무너졌다. 그러나 확신은 있었다. 얀붕이는 그 여자를 좋아하는게 아냐. 사랑하는건 자신이라고. 


그가 어렴풋이 호의를 가졌으면서도 일정한 선을 유지한다는 것은 알고있다. 그 이유도 짐작이 간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녀의 재능을, 얀붕이는 두려워한 것이라고. 그렇다면 호소하자. 난 그가 없으면 안돼. 지금의 나를 만든건 얀붕이야. 솔직한 마음을 그대로 터뜨리자. 타인의 감정을 민감하게 읽어내는 사람이다. 자신의 행동이 얀순이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인정하게 만들면 그는 벗어날 수 없다.


염원하던 첫키스

사랑하는 남자와 입을 맞추며 문 뒷편을 노려본다.

차가운 시선이 향한 것은 충격에 떨고 있는 불쌍한 여성의 얼굴. 그가 직접 이별을 고할 필요는 없어. 마음 약한 얀붕이를 흔들리게 하지 않을거야. 너가 알아서 떨어져줘. 그 감정만을 눈동자에 담아 보낸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꺄르르 웃는다. 화면에 비치는 것은 오늘 연인이 된 평범한 남성의 얼굴. 그녀는 한참을 바라보더니 그의 사진을 향해 가볍게 입을 맞춘다.


'난 얀붕이 없인 살아갈 수 없어. 그러니까 얀붕이도 나 없이는 못 살게 만들거야. 전부, 내가 해줄거야. 그러니까...'


그녀는 사랑스러운 표정을 바꿔 정신 없이 무언가를 적기 시작한다. 더 이상 착한 아이의 모습이 아니다. 그 얼굴은 그토록 미워하는 부모와 닮아있었다. 방향성은 다르겠지만, 얀붕이는 그녀가 만들어가는 인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