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이상하게 조별과제가 많았던 학기.


나와 얀순이는 도망가버린 조원들 덕분에 둘이서 해가 질때까지 학교에서 잔업을 해야했다.

그래서 일까, 날도 우중충하고 일도 잘 풀리지 않자 얀순이가 작업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그녀는 양팔을 자신의 턱에 괴어 해바라기 자세를 취하고는 내게 물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얀붕아, 내가 무서운 이야기 하나 해줄까?"


미처 다 하지 못한 과제가 눈에 걸렸지만, 여기서 거절하면 그녀의 성격상 몇일은 뾰루퉁 볼을 부푸린 채로 삐질것을 알기에 적당히 그녀의 흥에 맞춰주었다.


"무서운 이야기? 뭔데 그래?"


역시나 원하는 대답이 들려오자 그녀는 배시시 웃고는 운을 땠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만약 가상세계라고 생각하면 어떨 거 같아?"


"뭐?"


무서운 이야기라길래 비오는 날에 맞춰 귀신 이야기나 할 줄 알았는데, 주제를 틀어버리다니.

예상치 못한 말이 나오자 제대로 대응을 못한채, 의문을 내뱉었다.


"우리가 진짜 삶을 살아가는게 아니라 그저 시뮬레이션 속을 살아가는 거지."


아무래도 그녀는 대화를 계속할 생각인가 보다.

그보다 못한 과제나 같이 해주지.

내가 말을 안한채 듣고만 있음에도 그녀는 딱히 큰 신경을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떤 미친 과학자가 우리가 현실을 산다고 생각하게 계속 자극을 주는거야."


우르르릉- 쾅-!

번개, 나이스 타이밍.


"어때, 무섭지 않아? 우리의 삶이 사실은 전부 거짓일 수 있다는거야."


"그럼 이런 과제 폭탄 같은 자극 말고 좀 짜릿한 자극이나 주지. 아~ 하기 싫다."


"흐흐- 내 무서운 이야기는 끝! 이제 얀붕이 차례야!"


"이거.. 계속하는 거야?"


"모처럼 둘이서만 남았으니까"


언제 챙겨온건지 기다란 초에 불을 붙이고는 강의실 불까지 꺼버린 얀순이.

아주 놀 생각이 뇌를 꽉 채운거 같다.


"내 무서운 이야기는.."


"이야기는?"


"우리가 오늘 내로 이 과제를 끝내지 못하면 내일 분명 안좋은 일이 생길거라는거지."


"피히-. 뭐야 그게."


다시 강의실 불을 키고는 초를 치워버렸다.

얀순이의 원망 섞인 목소리가 들렸지만, 일이 먼저다.


"어차피 다 할 수 있을텐데.. 맨날 조급해 하기나 하고."


"뭐든지 먼저 끝나는게 좋은거야."


"벌써 그 얘기는 10번도 넘게 들었네요~"


책상에 엎어져 한 손을 올려 손을 이리 저리 돌리는 얀순이.

아직도 해실거리는 얀순이의 머리에 꿀밤을 한 대 먹인뒤 계속 일이나 하라고 말하고 잠시 바람을 쐬러 갔다.


아마도 그녀 또한 지루해서 잠시 분위기를 전환하려 한 거겠지.


학과 건물 앞에 가만히 서서 담배를 태우며 하늘을 바라봤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온건 진짜 오랜만이네.


생각해보면 그녀와 나는 참 신기한 사이인것 같다.

집도 가까워,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단 한번도 다른 반이 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조별과제가 걸려도 항상 같은 팀.


'우리가 사는 세계가 만약 가상세계라고 생각하면 어떨 거 같아?'


"큭.. 말도 안되는 소릴."


순간 얀순이의 말이 생각나 고개를 젓고는 다 핀 담배를 바닥에 내려놓고 밟아 불을 껐다.

해야할 일이 많기에, 자판기에서 적당히 음료 두 캔을 뽑고 강의실로 돌아가기로 했다.


우르르르- 쾅-!


번개 소리에 놀라 캔을 떨어트리지만 않았다면.

떨어진 캔은 계속해서 굴러가 학교 부지 내에 있는 버스 정류장까지 내려가버렸다.


"하..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굳이 이 비를 뚫고 주워야하나 싶었지만, 기껏 도망간 조원들 대신 남아준 얀순이를 생각해서 샀던 나름 값이 나간 음료였기에 비를 맞으며 정류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몸이.. 젖지 않아."


분명 중반까지는 온 몸이 젖을 정도로 비를 맞았다.

하지만, 갑자기 어느순간부터 몸이 젖지 않았다.


고개를 올려다봐도 분명 하늘에선 물줄기가 내려오고 있었다.

굵은 빗물, 우렁찬 천둥소리, 비 오는 날 특유의 습한 공기...


'우리가 사는 세계가 만약 가상세계라고 생각하면 어떨 거 같아?'


얀순이의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괜히 직전에 그런 얘기를 들어서, 이건 나쁜 꿈일 뿐이야. 

그치?


"얀붕아! 어디있어?"


멀리서 그녀의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그녀와 내가 눈이 마주친 순간.

비가 다시 내 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


"얀붕아! 비 맞으면서 뭐하는거야! 이게 내가 좀 농땡이 피웠다고 시위하는거야?"


"어? 어.."


"어디 아픈건 아니지?"


내 손을 잡고 버스 정류장 밑에서 비를 피하며 그녀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손을 내 이마에 대었다 때며 열은 없다 중얼거리는 그녀.


'우리가 사는 세계가 만약 가상세계라고 생각하면 어떨 거 같아?'


틀렸다.

자꾸 그녀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착각일 수도 있다.

비를 맞고 있었음에도 잠깐 스트레스로 정신이 나갔던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그래도..


"저기, 얀순아.."


"응? 왜?"


해맑게 나를 보며 고개를 기웃거리는 그녀.

나는 이변을 눈치챌 수 있었다.

깨달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사랑스러운 동작을 취한 그녀의 뒤로.

아니, 내가 오늘 남기로 생각한 이후부터.


단.

한 사람도.

대학에서 보질 못했다.


마치, 잘 짜여진 시뮬레이션 처럼 나와 그녀만 남아서..


"말을 했으면 끝까지 해야지! 오늘 왜 그래? 아! 흐흐.. 혹시 내 이야기가 그렇게 무서웠어?"


"아, 아니.. 딱히"


어쩐지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이 사실을 숨겼다.

어쩌면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기에 나한테 물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모종의 실험을 당하고 있어서 계속해서 함께였을 수도.

그녀도 불안감에 내게 상담을 한 것일 수도.

말을 돌려서까지 나를 배려해서...


"바보야! 그런게 있을리 없잖아. 진짜, 얀붕이도 순진하다니깐. 아니, 내 말이여서 믿어준건가? 막 이래~"


그녀는 오바하고 있다.

과장된 동작과 큰 시그널 속 그녀의 본심이 조금 엿보인 듯 했다.

그녀를 오랫동안 본 나는 알 수 있었다.


"가상세계라니, 그런게 있을리 없어."


단정지어 말하는 그녀.

역시, 그녀도 무언가를 알고 있다.

그녀의 단호한 말에 오히려 의심이 늘어났다.


말해야하나? 그녀가 흑막일 경우는?

그렇다면 왜?

내 태도가 변하지 않자, 말을 바꾸는 얀순이.


"얀붕아, 머뭇거리는거 보면 뭔가 아는거지? 사실, 나도.."


"얀순아?"


내가 머뭇거리자 그녀의 표정이 변했다.

꼭 쌓아두었던 마음의 벽을 분출하듯, 눈물을 흘리며 내게 말하는 그녀.

작은 두 손은 주먹을 쥔 채 가슴에 모아 억장을 털어내는 모습.


"뭔가, 뭔가 이상했어. 우리는 항상 함께 해왔고.. 그야 이상하잖아? 모든 조원들이 10번도 넘는 조별과제에서 도망가서 항상 너랑 나 둘이서만 하는거."


계속해서 이상한 정황들을 얘기하는 그녀.


"초중고 전부 같은 반이라는게 말이 돼? 심지어 고등학교는 작년까지 여학교였다가 우리때 바꾼거잖아!"


"얀순아, 실은 나도.."


"역시! 너도 뭔가를 느꼈구나."


그녀의 진심이 담긴 어투와 표정에 그녀 또한 불안감을 느껴 내게 장난 형식으로 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째서 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이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거야!


얀순이가 이렇게 불안에 떨 동안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한심했다.

몸을 떠는 그녀의 양 어깨를 잡고 내 마을을 고백했다.

비가 묻어서일까, 젖은 그녀의 어깨가 유난히 초라해 보였다.


"방금 비 내릴때 일정 지점부터 비가 나를 통과한거 같았어. 진짜 이게 시뮬레이션이라면..."


"비를 언제부터 맞았어?"


"그야 너와 내가 마주친... 어?"


"얀붕아."


분위기가 다시 변했다.

싸늘하게 죽어버린 얀순이의 눈동자.

-- 뭔가.. 잘못되고 있었다.


"시뮬레이션이라면, 왜 이런 상황까지 왔는데 내게 고백을 해주지 않는거야?"


그녀와 나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시뮬레이션을 인지하고 해결 방안을 찾는 나.

시뮬레이션을 인지하고 해결 방안을 없애는 너.


아니야, 네가 날 속일 이유가..


"벌써 4번째 반복한거야. 이번엔 조금 힌트도 줘봤어."


"왜, 왜 이런 짓을..."


"혹시 인지하면 나를 너와 동류라 생각하고 매달릴 줄 알았는데, 도망갈 생각이나 하고 말이야. 반성 반성. 다음부턴 그냥 조용히 함구해야겠다."


얀순이가 더 이상 소꿉친구로 보이지 않았다.

입꼬리를 크게 찢은채로 깔깔거리는 그녀.

두 다리를 앞 뒤로 흔들며 개운한 듯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저, 저리가. 날 내보내줘!!"


"내보내? 네게 있어서 원래 세계는 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 나는 계속 소꿉친구인 그녀와...


"본 세계의 너는 정신이 망가져버렸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시뮬레이션 속에 가둔거야."


"그럼 날 지키려고..?"


"응. 지켜야지. 걸레년들로부터. 너도 참, 연인을 죽였다고 그렇게 정신을 놔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


내게 점점 다가오는 얀순이.

어느새 비는 그쳤고 해가 떠 있었다.


"음~~~!! 얀붕이가 날 위해 사준 음료수! 이건 평생 소장해야겠다."


"그만해.."


"그만? 뭐를? 어차피 무한으로 반복될건데, 난 포기하지 않을거야."


그녀에게서 몸을 돌려 달아난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살이 까졌지만,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으아아아-!!"


"얀붕아, 다음 회차에선 남매로 해볼까? 그동안 너에게 꼬리쳤던 걸레년들의 일생을 내가 차지하고 있는건데. 소꿉친구도 실패면.. 다음엔 여동생이 좋겠다!! 그녀 앞에서 네 손가락을 잘랐을때 울음소리가 참 듣기 좋았는데. '오빠!! 오빠를 놔줘!!' 라니, 참 애달픈 사랑이었어."


괴물이다.

저건, 괴물이야.


달려가는 내 앞이 사라졌다.

이어서 도로도, 건물도.

하나씩 사라져갔다.


마침내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사라지자, 내 몸도 조금씩 지워졌다.


"사랑해 얀붕아. 영원히 반복되는 이 세계에서 사랑을 나누자."



"아니, 이제는 오빠라고 불러야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