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카세~ 논문 자료 준비 끝났어요~"

"야,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이얀순은 천재로 유명한 정신학계의 박사다.

2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논문 몇 개로 관련 계열의 의사들에게 혁신을 일으켰다는 소리를 듣는다.

인간의 감정을 조종하는 게 가능한 사람이 아니냐는 이야기까지도 돈다.

그런 그녀에 반해 그녀를 보조하는 일로 적당히 먹고사는 김얀붕은 정말 평범하다.

그냥 회사다니는 남들보다 약간 적게 벌고, 그들보다 적게 일한다.

"아, 그건 아직 실험해볼거 남았어."

"그럼 이건 어디 둘까요?"

"그 파일들 옆에 약병 있지?"

"어... 찾았다."

"그거 마셔."

"네?"

"그거 자양강장제야, 논문이랑 상관없이 뒀어 그냥."

"이런거 안챙겨주시던 분이 웬일이지."

얀붕이는 일단 약병을 따서 내용물을 들이켰다.

"박00과 0000C를 섞은 맛..."

"뭐라고?"

"아닙니다!"

"일단 그 파일 여기 주고 쉬어, 이제 내가 다 해야 돼."

얀붕이는 평소 실험이란 걸 전혀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며 '오늘은 조금 열심이시네' 정도의 생각을 하다 방에 들어갔다.

그녀는 소위 말하는 괴짜였다.

집이 있는 건물의 다른 한 층을 업무, 실험, 숙소 세 곳으로 나누어 사용하고 숙소에 얀붕이를 살게 했다.

'자주 쓰는 물건은 손에 닿는 곳에 두는 거라고 했었지.'

그녀가 몸을 밀착시키고 비슷한 눈높이에서 눈을 맞출 때는 진심으로 두근거렸다.

그러나, 박사와 조수이기 이전에 중,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라는 관계가 있었기에 그런 감정은 잦아들었다.

"음, 잘 쉬고 있냐?"

"3분 전에 쉬라 해놓고 갑자기 와요? 실험한다면서."

"그렇지... 실험..."

무어라 중얼거리는 말들 중에 얀븅이가 이해한 것은 없었다.

"내가, 왜 심리학 쪽으로 왔는지 이야기했나?"

"흠... 들어본 적 없는데요?"

"그럼 나는 심심하니까 그 얘기를 해주지, 거부권은 없다."

얀붕이는 싫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사실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해주는 이야기들은 전체적으로 흥미로웠으니까.

"나는... 어릴 때는 그냥 눈치가 좀 많이 빨랐어. 알고 보니 남의 감정을 눈치채는 데 재능이 있었던 거지."

속에 스트레스를 쌓아두면 누구도 몰랐던 얀붕이의 그런 감정을 알아챈 것도 얀순이였기에 얀붕이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근데, 내가 좋아하는 애가 생기니까 감정을 읽기보다도 내 감정에 집중하게 되더라."

"그게 무서워서, 더 잘 읽고 잘 이해하면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이렇게 온거지."

"그 사랑을 한게 언제인데요?"

"짝사랑이었어, 중학교때부터 만난 후배. 이제는 박사 조수로 일하는 녀석."

나와 같은 운명에 처한 동지가 있다니, 라고 말하려던 얀붕이가 다시 생각해보니 그 스스로가 꽤 편히 산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치가 지지리도 없는 애야."

"자... 잠시만요."

얀붕이는 가슴을 움켜쥐고는 이야기를 끊었다.

"걱정 마, 그냥... 몸부터 흥분하게 될 뿐이야."

"네? 으윽..."

"정말, 눈치가 하나도 없어."

그리 말하는 얀순이의 시선은, 얀붕이의 감정을 읽으며 대화하는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제, 내 감정도 드러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남의 감정만 읽고 산 시간이 너무 길어서 말야."

눈의 생기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짙은 어둠이 대신했다.

"몸정이 오면 마음정도 따라온다는 이야기를, 실험해볼까?"

그러나 눈동자가 향하는 곳은 명확했다.

"무슨 말을 해도, 멈춰주지는 않으니까♡"

얀순이는 그대로 얀붕이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