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현 황후 얀순이는 계후(繼后)다. 


얀붕 황제의 첫 황후 얀진이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고, 그 뒤를 이은 두 번째 황후가 그녀였다. 


얀진 황후가 죽고 얀순이 황후로 낙점되었을 때,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그녀는 황비 시절부터 얀붕 황제를 깊이 사모해 왔고, 그런 그의 정실로서 옆에 설 수 있다는 것에 기뻤다. 


허나 그 기쁨은 황후로서의 첫날밤을 보낸 날, 산산히 깨지고 말았다.


그녀가 입은 슈미즈는 얀진 황후가 입던 것과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얀진 황후가 좋아하던 순백색의 슈미즈의 가슴팍에는, 그녀가 자주 쓰던 나비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얀붕 황제가 그녀를 안고 절정에 달했을 때 한 말은 얀순을 절망시키기에 충분했다.


"사모하오. 짐에게는 그대 뿐이오, 얀진. 얀진......."


얀붕 황제는 자신을 껴안고 죽은 얀진 황후의 이름을 불러댔다. 그제서야 얀순은 깨달았다. 자신이 죽은 얀진 황후와 꼭 닮아 있다는 사실을.


자신이 황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얀붕 황제가 얀순에게 얀진을 투영해서 보았기 때문임을. 


그날 얀순은 결심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얀진의 망령에 씌여 있는 얀붕 황제를 자신의 손에 넣을 것을, 굳게 다짐했다.



 지고한 순정파로 유명했던 얀붕 황제는 얀진 황후의 장례식이 끝나고 새 황후 얀순을 들인 뒤에도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런 그에게 접근한 사람은, 바로 현 황후 얀순이었다.


얀순은 얀진의 티아라를 쓰고, 그녀가 즐겨입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순간 얀붕은 얀진이 살아돌아온 것으로 착각했다.  


"폐하, 신첩이 왔습니다."


그녀는 얀붕이 좋아했던, 얀진의 눈웃음을 지으며 양 팔을 벌렸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품 안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 품 안에서는 얀진이 애용했던 향수의 향이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향에 얀순이 섞어놓은 최면향이 자신의 몸에 들어가고 있음을, 얀붕은 알지 못했다. 


*


 얀순은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얀붕을 세뇌하고 있었다. 최면향으로 자신을 얀진으로 믿게 하고 그를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 계획을 실행했다.


얀순에게 완전히 빠져버린 얀붕은, 정치도 치세도 뒤로 한 채 그녀의 치마폭에 싸여 최면향에 취해 있었다.


그렇게 세뇌당한 얀붕은 얀진과 얀순을 동일시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얀순은 점점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얀진의 티아라를 벗었다. 


그 다음에는 얀진이 좋아하던 순백색 드레스를 벗고, 자신이 좋아했던 붉은 드레스를 입고 얀붕의 앞에 나타났다.


그 후로는 얀진의 청순한 화장 대신 표독스럽게 눈꼬리를 올린 진한 화장을 했다.


마지막으로는, 얀진의 백금발 염색을 풀고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드러냈다.


그 모습은 아무리 봐도 황비 얀순이었지만, 어느새 그녀에게 푹 빠져버린 황제 얀붕은 끝없이 그녀의 사랑을 갈구했다.


시 쓰기가 취미였던 그는 죽은 얀진을 그리워하는 시 쓰기를 멈추고, 자신의 곁에 있는 얀순을 찬양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옛 류트가 아무리 고아했어도, 이미 그 줄은 끊어졌도다. 청아한 새 류트를 구해 오래도록 연주하리.]


아무리 얀진과의 추억이 강렬했어도 얀순의 최면향보다 더 강할 수는 없었다. 얀붕은 얀진에게 바치려 했던 동정을 얀순에게 바치고, 그녀에게 장자마저 안겨 주었다. 


유일한 황자의 어미가 된 얀순은 얀붕을 권력을 휘둘렀고, 귀족들은 폐인이 된 황제를 대신해 황후 얀순에게 줄을 댔다.


얀순이 낳은 황자는 황태자가 되었다. 아들이 황태자가 되고 몇 년이 지나자, 황제의 의무고 일이고 전부 귀찮아진 얀붕은 몸이 좋지 않다는 명목으로 황태자에게 양위했다. 


물론, 그 결정의 배후에는 황후 얀순이 있었다. 얀순은 황제의 일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데만 집중하라고 속삭였다. 


그렇게 말하는 얀순의 어디에서도 얀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얀붕은 그제서야 자신이 얀순에게 속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귀족들은 전부 얀순과 황태자에게로 돌아섰고, 이미 세뇌당한 그는 최면향이 없어도 얀순을 내칠 수가 없었다. 


얀순이 물었다.


"그럼 폐하, 영원히 저와 함께해 주시겠나요?"


얀붕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리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황태자에게 양위하고 태황이 된 얀붕은 별궁 한 구석에 유폐되었다. 태후가 된 얀순은 밤마다 별궁에 찾아와 끊임없이 그를 탐했다.


사랑스러운 듯 입을 맞추어 온다. 입과 손으로 정성스럽게 그에게 봉사한다.


하지만 그녀의 어디에서도 얀진을 떠올릴 수는 없었다. 얀순의 몸 어디에서도 얀진의 향은 나지 않았다. 


얀진의 흔적을 찾으려 해도, 그녀의 초상화니 유품은 전부 얀순에 의해 파괴되었다.


얀순이 말하기를, 곧 전 황후의 모든 기록을 삭제한다고 한다. 이미 사라진 반역자들과 영합해 황제를 현혹했다는 죄를 씌워 기록말살형을 내린다고 했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발악하자, 얀순은 얀붕을 구속했다. 


목줄을 채우고, 수갑으로 양 손을 묶었다. 그리고 수갑과 연결된 쇠사슬을 말뚝에 휘감고 방 한 구석에 박아놓아 밖으로 나갈 수 없게 했다. 


그리고, 아무도 그 방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이제 얀붕의 방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얀순 한 명 뿐이었다.


얀붕이 할 수 있는 것은, 진심으로 얀순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얀순이 얀붕의 마음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제는 그 반대였다.


얀진을 그리워하며 쓴 시가 적힌 종이들을 전부 자신의 손으로 불살라 버리고, 구속된 손으로나마 얀순을 맞이하기 위해 머리카락과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그녀와 잠자리를 할 때마다 이렇게 속삭였다.


"사랑하오, 얀순. 그러니 제발 짐을 떠나지 마시오...... 얀순, 얀순......."


그러면 얀순은 목줄을 끌어당겨 얀붕의 얼굴을 가까이 하고 키스했다. 한참동안의 입맞춤이 이어진 뒤, 그녀가 입술을 떼고 이야기했다.


"당연하죠, 폐하. 신첩에게는 폐하 뿐이고, 폐하에게도 신첩 뿐인걸요. 사랑합니다, 얀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