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을 에워싼 고층빌딩 때문에 비교적 일찍 어둠이 깔린 초저녁의 지하철역 앞. 그 한구석에 자리한 대형 카페 안에서, 나는 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 도착하면 바로 나갈 수 있는 1층의 창가 자리. 블라인드가 늘어져 있어 밖에서는 안이 잘 안 보이는 그런 자리다.


폰 화면과 창밖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긴 했지만, 어느 쪽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아늑한 카페의 공기에 휩싸여 커피를 쪽쪽 빨고 있으려니 가기 싫다는 마음이 무럭무럭 커져만 갔다.


지금이라도 지하철 계단에서 한번 구를까.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좀 긁히면 좋고 어디 부러지기라도 하면 최고다. 설마 아픈 사람한테까지 뭐라고 하진 않...


"박현?"


그리운 별명이 들리는 바람에, 나는 입안에 머금고 있던 커피를 반사적으로 삼켰다.


시선을 앞으로 향하자 롱패딩 차림의 여성이 엄청 반가운 듯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양손에 든 쟁반에는 허니브레드와 커피가 담겼고 한쪽 팔에는 에코백을 건 채다.


웨이브가 들어간 머리카락에 알이 큰 안경, 그 뒤로 보이는 살짝 처진 눈.


정말 미안하게도, 모르는 얼굴이다.


동창 중에 이런 애가 있었나? 싶어 애매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려는데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기억 안 나? 한뉴!"

"...아."


한뉴. 한유정. 고3때 옆자리였던.


"이러면 기억나?"


한유정이 들고 있던 쟁반을 내가 앉은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머리를 뒤로 모아 쥐어보였다. 학창시절에 항상 묶고 다녔던 것처럼.


그렇게 하니까 그때 모습이 조금 남아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 어, 한ㄴ... 유정아."

"와, 진짜 너무하네. 아무리 오랜만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짝궁을 못 알아보냐?"

"아니 너무 확 달라져서..."

헤어스타일도 그렇고 화장도 그렇고. 무엇보다 예전에 비해서 살이...


"좀 쪘지?"


한유정이 배시시 웃으며 자연스럽게 내 앞자리에 앉았다.


"보기 좋네 뭘."


차마 아니라고는 말 못 했다.


쪘다고는 하지만 사실 정상체중을 찾아간 거라고 봐야 맞다.


고3땐 너무 말라서 저러다 바람불면 날아갈까 무서울 정도였다. 오죽하면 그 깐깐하던 급식실 아주머니가 얘만 반찬을 한주먹 더 줬을까.


"서울 좁긴 좁다. 어떻게 이런데서 다 만나네."

"그러게. 여긴 어쩐 일이야? 약속?"

"여기 이 누님 나와바리거든?"


한유정이 자주 하던 우스개를 던지며 웃었다. 예전에도 뜻밖의 장소에서 마주칠 때마다 곧잘 했던 농담이었다.


"지이인짜 오랜만이다. 그동안 뭐 했어? 많이 바빴나봐? 살도 좀 빠진 것 같고."


한유정이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툭툭 건드렸다.


"아니, 그... 공부하느라고."

"무슨 공부? 어디 유학 준비라도 했어?"

"아니 그냥, 대학와서 처음 시험치고 충격먹어서... 오바를 좀 했지 내가."

"그래 오바야 진짜."


한유정이 슬며시 날 째려보는 시늉을 했다.


"졸업하더니 갑자기 단톡방도 나가고 페북도 없애고. 연락은 하나도 안 받고. 애들이 너 죽은 거 아니냐고 난리도 아녔어."

"에이 그건 너무 갔다. 죽기는 무슨."


하하... 하고 마른 웃음을 흘린 것을 끝으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카페에서 틀어둔 노래소리만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망했다. 2년만에 만나서 나눈 대화가 이게 끝이라니...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너무 떨어졌다. 옛날엔 안 이랬는데.

난처해하는 날 배려한 건지 한유정이 이어서 말을 꺼냈다.


"근데 여기서 뭐 해? 누구 기다려?"

"어... 동생."


살짝 거북해하며 대답했지만 한유정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박현 너 동생 있었어?"

"졸업식 때 보지 않았나?"

"몰라, 기억도 안 나."

"야."

"뭐, 뭐, 뭐. 너도 나 못 알아봤잖아."

"그거랑 이거랑 같냐."


그렇게 티격태격하고 있자니 점차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2년의 시간이 쌓여있었던만큼 묻고 싶은 것도, 말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요즘 뭐하냐, 대학생활은 어떠냐, 기숙사 떨어졌다, 난 수강신청 망했다, 군대는 어쩔래 등등...


신기하게도, 학창시절 얘기는 한번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어쩌면 헤어스타일이 바뀌고 나이를 먹고 화장을 했어도 한유정은 한유정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특유의 웃음소리도, 말하다 말고 뭔가 생각났다는 듯 테이블을 작게 두들기는 것도, 기지개를 켠 뒤 한번 어깨를 으쓱해보이는 것도, 전부 고등학교 시절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야, 너도 이것 좀 처리해. 좀 많다."


한유정이 포크로 허니브레드 한쪽 귀퉁이를 찢어내서 내밀었다.


"나 좀 있다 식사 약속 있어서."

"어허, 씁. 누나가 주는 건데."

"그놈의 누나는..."


이런 부분도 고등학생 시절과 달라진 게 없었다. 다른 애들도 다 이럴까? 아니면 많이 달라졌을까?


나는 포크를 받아들어 크림이 듬뿍 묻은 빵을 입에 넣었다. 평범하게 맛있었다.


"아, 맞다. 너 번호 뭐야?"

"어?"


반사적으로 움찔하는데 한유정이 자기 폰을 내밀었다.


"막 이상한 장기매매 번호 같은 거 찍어주고 그러면 안 된다?"

"넌 날 뭘로 보고..."

"잠수탔잖아, 2년 동안이나. 전화 씹고. 문자도 다 씹고. 카톡은 알 수 없음 뜨고. 내가 하다하다 니네 집 주소로 편지까지 써서 보냈거든?"


...편지까지 보냈을 줄은 몰랐다.


"미안."

"됐네요. 전화나 거셔."


한유정이 장난스레 면박을 주며 재촉했다.


알려줘도 되나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번호를 찍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래, 이제 이 정도는 해도 되잖아?


아무렴, 2년이나 지났는걸.


테이블 위에 있던 내 폰이 부르르 떨리는 걸 확인한 뒤 한유정에게 폰을 돌려줬다.


"그거 내 번호니까 꼭 저장해. 전화도 받고. 알았지? 공부도 좋은데 연락도 좀 하고 그래."

"알았어."


한, 유, 정. 이름 세 글자를 입력하고 저장하는데 갑자기 카톡 알림이 떴다.


[나 도착]

[어디야?]


순간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 창밖을 보자 길가에 세워진 검은 SUV 한 대가 보였다. 거기에 몸을 기댄 채 서 있는 여자의 모습도.


"왜 그래?"


내 반응이 갑작스러웠는지 한유정이 놀란 눈을 하고 올려다봤다.


"유정아, 미안해, 나 지금 가봐야 되거든?"

"아, 아, 맞다, 너 동생 기다린댔지. 어서 가봐."

"어, 미안해 다음에 또 보자. 연락할게."

"너 꼭이다! 꼭 연락해!"


그 말을 뒤로 한 채 카페 문을 박차고 나왔다. 뒤늦게 컵을 반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멀지 않은 거리를 달리듯 걸어서 좁히며 차로 향했다.


차체에 등을 기대고 폰을 만지던 동생이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똑 떨어지는 C컬 단발 밑에서 차가운 눈이 빛났다.


동생은 허리의 스트랩을 가볍게 조인 롱코트 차림이었다. 밑으로 빠져나온 긴 다리를 다크진이 감싼 채였고, 발에는 평소 즐겨신는 운동화 대신 굽 낮은 앵클 부츠가 신겨져 있었다.


평소 안하던 화장을 옅게나마 한 걸 보니 엄마 생신이라고 힘을 좀 준 것 같다.


"미안해, 한별아. 밖에 춥길래 잠깐 카페에서-"

"늦었으니까 타기나 해."


동생이 운전석으로 향하며 말했다.


어조 자체는 평이했지만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 밖에 서 있었던 탓일까. 나는 얌전히 조수석에 올랐다.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본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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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의 운전은 약간 신경질적이었다. 딱히 급정지나 급가속을 한 것도 아니고 기어봉을 거칠게 다룬 것도 아니지만, 그냥 알 수 있었다.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심정으로 입술만 깨물었다. 그냥 자진신고를 할까... 아냐, 못 봤을 거야...


차가 한적한 4차선에 진입했을 때, 동생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여자 누구야? 되게 친해보이던데."

"...어?"

"시치미 뗄 생각마, 진짜. 죽는다."


봤구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아, 걔? 별로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냥... 친구."

"아무 사이도 아닌데 손도 잡고 서로 뭐 먹여주고 그러나 보네, 오빠는. 친한 사이면 떡도 치겠다?"


평온을 가장하던 동생의 목소리에 삽시간에 가시가 돋쳤다.


"며칠 됐어? 한달? 두달? 나 몰래 만나니까 막 스릴있고 그래?"

"그런 사이 아니야. 고등학교 졸업하고 2년만에 처음 만났어."


누구 덕분에 말이지.


"...하."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린 동생이 돌연 핸들을 꺾었다. 차가 방향을 홱 트는 바람에 나는 반사적으로 안전벨트를 움켜쥐었다.


차는 가까운 인도변에서 멈춰섰다. 뒤에서 오던 차가 경적을 울려 항의하며 옆을 지나갔다.


"폰 줘봐."


어리둥절한 나를 향해 동생이 손을 내밀었다.


"한별아..."

"달라고 했다."


억지에 못 이겨 내민 폰을 낚아챈 동생이 터치 한번으로 잠금을 풀었다. 내 폰에 자기 지문도 등록해뒀기 때문이다.


"한유정?"


통화기록을 확인한 동생의 목소리에 나는 그만 얼굴을 손으로 감싸버렸다.


"아까 그년 이름이야?"

"그냥 동창이라니까..."

"됐고. 지운다."

"야, 박한별!"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제발 그만 좀 해!"


요 몇개월, 아니 몇년간 참고 또 참아왔던 말들이 마구 쏟아져나왔다.


"내가 니 물건이야? 인형이야? 그만큼 했으면 됐잖아! 하라는 대로 다 했잖아! 내 인간관계 다 망가뜨려놓고, 사람 하나 병신 만들고, 대체 어디까지 해야 속이 후련한 건데!"


기세좋게 분노를 터뜨리긴 했지만,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후회가 찾아들었다.


동생은 기르던 개에게 물린 듯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눈가가 씰룩거리고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지는 게 보였다.


애써 태연한 척 동생을 마주보려 했지만 무리였다. 말없이 노려보는 동생의 눈빛은 어떤 고함이나 욕설보다도 날 얼어붙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다시 꼬리를 말고 말았다.


"...소리 질러서 미안해, 한별아. 내가, 그냥, 오늘 어떻게 됐나봐. 번호, 지울게. 차단, 차, 어, 차단...할게. 내가, 진짜 미안..."


"내가 요즘 오빠 너무 풀어줬나보다, 그치."


꼴깍.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목 울리는 소리가 천둥치는 것처럼 들렸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을까.


"오빠 내려."

"어?"


동생은 대답하는 대신 차의 시동을 꺼버렸다.


찰칵. 덜컹.


안전벨트를 풀고 운전석에서 내린 동생이 성큼성큼 걸어서 조수석 쪽으로 돌아들었다. 뭘 어찌 해볼 틈도 없이 조수석 문이 거칠게 열렸다.


"하, 한별아..."

"두 번 말 안해."

"......"


스스로의 멍청함을 저주하며 나는 차에서 내렸다. 문을 닫자마자 동생이 내 손목을 낚아채듯 움켜쥐었다. 서늘한 손이 내 손목을 으스러뜨리려는 것처럼 조여든다.


"아, 아파..."

"아프라고 잡았어."


동생은 내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또각또각 하는 부츠의 굽소리에 맞춰 애쉬 브라운으로 염색한 단발이 찰랑인다.


"어, 어디 가는데..."


나보다 키는 반뼘 정도 클 뿐인데 걸음걸이는 그 갑절은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지나치는 사람들마다 한번씩 우리를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끌려가는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습고 초라해보일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코를 꿰인 소처럼 몇십 걸음을 걸었을까. 어느 상가의 외부 화장실 앞에서 동생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제야 동생의 의도를 알아챈 내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야, 안돼."

"뭐가 안 되는데."

"너, 지금 여기서..."

"지금 여기서, 뭐."


그렇게 말하면서 동생은 불꺼진 여자화장실의 불투명유리문을 당겨 열었다. 안쪽에 센서가 달려있는지 불이 켜지면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딱 좋네. 마침 사람도 없고."

"이거 놔. 놓고 얘기해."

"빨리 와, 오빠. 나 더 화나게 하지 말고."

"한별아 제발..."


나는 급기야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제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사소한 일로 다투다가 한별이에게 맞아 팔이 부러진 날.


그날 이후로 제대로 된 반항 같은 건 감히 꿈도 꾸지 못했다.


한별이가 집안에서 날 턱짓 하나로 부려먹을 때도.


성에 눈을 뜬 한별이가 내 몸을 함부로 더듬을 때도.


부모님이 집을 비운 어느 주말 오후에 한별이에게 반강제로 처음을 줬을 때도.


여자 동기와 통화하던 도중 폰을 빼앗아든 한별이가 연락처를 모두 지우라고 강요했을 때도.


날 벽에 밀어붙이고 목에 키스마크와 잇자국을 남길 때도.


딱 한 번.


생전 듣도보도 못한 이상한 기구-아마 아네로스라고 했던가-를 내 몸에 넣으려고 했을 때.


그때는 절대 안된다며 전에 없이 격하게 반항했지만, 결국 입술이 터진 채 울면서 그 기구를 넣어야 했다. 그것도 내 손으로 직접.


그런 나를 지켜보면서 한별이는 유난히 기쁜 눈을 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한별이는 언제나 그랬다.


고압적이고, 종잡을 수가 없는, 가학적인 폭군.


"일어나."

"미안해, 한별아. 다신, 다신 안 그럴게. 거짓말해서 미안해. 화내서 미안해. 근데,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야. 나, 정말 너뿐이야. 너밖에 없어. 그러니까, 제발..."


반쯤 울먹이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한별이를 기쁘게 할 만한.


그래서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할만한.


그런 말들을.


"하..."


한별이가 못 이기겠다는듯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 그 말 진짜지."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이라도 울음이 목구멍을 비집고 나올 것만 같았다.


고개를 밑으로 푹 숙인 채 까딱이는 한별이의 신발코만 바라보고 있으려니 문득 눈물이 핑 돌며 시야가 흐려졌다.


필사적으로 참으려 했지만 서러움에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난 엄마 생신에 이런 곳에서 동생과 뭘 하는 걸까.


왜 이런 짓을 당해야 하는 걸까.


왜 우리 사이는 다른 평범한 남매 같지 않은 걸까...


차오르는 눈물이 앞을 가리는 바람에 시야에 잡히는 사물이 온통 번져보였다.


"...오빠 울어?"


한별이가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 우니까 또 마음 약해지네."


한별이가 그때까지도 움켜쥐고 있던 내 손목을 비로소 놓아주었다. 끈떨어진 인형처럼 내 팔이 밑으로 툭 떨어졌다.


"오빠 나 좀 봐봐."

내가 고개를 들지 않자 한별이가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나 좀 보라고, 이렇게."


서늘한 두 손이 내 얼굴을 붙잡아 강제로 앞을 보게 했다.


속눈썹을 셀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한별이가 내 눈을 들여다본다.


"오빠."


한별이가 내 눈가를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훔치며 말했다.


"오빠가 생각해도 오빠가 잘못한 것 같지."

"...응."

"다음부터 그러지 마."

"...알았어."

"오빠 또 그러면 나 진짜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

"......"

"대답."

"응..."


용서받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을 품은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혐오스러웠다.


수치심과 자기혐오가 뱃속을 쿡쿡 찔러왔다. 이대로 작게 쪼그라들어서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별이가 배시시 웃고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일어나. 누가 보겠다."


쭈뼛쭈뼛 따라서 일어서자 한별이가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손수건을 내밀었다.


"가서 세수 좀 하고 와. 바지도 좀 털구."

"어."


쏴아아-


꽃향기가 은은하게 풍기는 손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고 남자화장실을 나섰다.


"오빠."


화장실 앞에 설치된 돌기둥 모양 조형물에 등을 기댄 채 날 기다리던 한별이가 손을 내밀어왔다.


주머니에 넣었던 손수건을 주섬주섬 꺼내서 건네자 한별이가 피식 웃었다.


"손 잡자고 바보야."


가볍게 핀잔을 주면서도 한별이는 손수건을 받아드는 걸 잊지 않았다.


"남들이 보면 우리 커플인줄 알겠다, 그치."


손을 잡고 차로 돌아오는 길에 한별이가 내 귀에 속삭인 말이었다.


돌려줄 말을 찾지 못한 채 깍지낀 손만 작게 꼼지락거리자 한별이가 깔깔거리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