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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모를 어느 밀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세련된 디자인의 방에는 한 명은 금발벽안의 외형에 그에 어울리는 화려한 복장의 소녀와 흑발에 검은 피부, 금안이 묘하게 맞물려 마치 흑표범과 같은 인상을 주는 소녀가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 현재 모인 군은 얼마입니까? 그리고 추가로 증원할 수량도 이제 밝혀 주시지요. 저희도 준비가 필요합니다."


"용병, 경보병, 포병, 공병, 기사. 그리고 서부의 해군전단과 마도병 일부를 합쳐 일단 모집한 수가 8만. 그리고 추후에 동원할 본대를 합하면 19만 8천. 소모될 물자의 4할은 계약대로 이미 준비를 마쳤습니다."


"용병, 경보병, 포병, 공병, 기사. 그리고 마도병과 이번에 시험 중인 공군까지 합쳐 일단 3만. 귀국의 본대와 합류할 아국의 본대가 따로 38만. 군대와 물자가 이동할 철도와 수로는 이미 완비했으니 군대만 차질없이 소집된다면 정벌부대 60만 8천은 예정대로 완편됩니다."


"좋군요. 그러면 대원수는 당신께서, 부원수는 예정대로 제 조카가 맡겠습니다. 이견 없으신지요?"


"없습니다, 당신도 만족하십니까?"


"저 또한 이상의 내용에 동의합니다."


"그러면 군에 대한 협의는 이 정도로 가닥을 잡고... 이제 제 부군에 대한 지분을 정합시다. 피차 미뤄봤자 양국에 악영향만 미칠 터인데."


"어머? 당신의 부군이라뇨? 여황께서는 홀몸이 아니셨습니까? 아! 저의 부군을 착각하셨나 보군요! 저런, 정사에 진력을 다하시느라 많이 쇠하셨나 봅니다."


"..."


"흐흣."


빠드득


드넓은 팔라리아 대륙 중부를 삼분하는 3국 중 영토로는 7분지 4, 인구로는 8분지 5, 경제력으로는 8할을 차지하고 있는 두 국가의 군주, 오를레앙의 밀리아나와 크산나 왕국의 파티마는 대뜸 서로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원인을 추측하자면 일반적으로는 당연 양국이 서로 밀약을 맺은 아를레시아 왕국 정벌전에 관한 제반 사항에 대해 합의를 보다 언성을 높이게 되었다고 볼 수 있었겠지만 작금의 상황은 전혀 일반적이지도, 그리고 이 두 소녀가 전혀 정상적이지도 않았기에 이러한 추정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그렇다면 더이상 말을 돌리지 않고 이 둘이 백안시로 서로를 마주하는 원인을 단 한마디로 규정하자면 '그' 이 하나의 단어로 정의할 수 있었다. 과거 이 둘을 위해 모든 것을 불사르고 매정하게도 이 둘을 떠났지만 아직도 잊지 못해 전쟁까지 벌여 되찾으려 하는 '그'.


이국적인 인종의 시장이라 불리는 대륙 동부에서나 볼 법한 외형의 남자.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지만 자신과 눈앞의 상대, 그리고 북부의 불안정한 왕위 계승권자를 옹립한 이후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3번이나 죽음으로써 홀연히 사라졌던 그.


두 군주는 서로 대치하면서도 그와의 추억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




"크흠."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


이 시점의 그녀는 황제가 아닌 유력한 계승권자 중 하나였지만 그는 처음 만난 이후 줄곧 자신인 황제로 만들어주겠다며 이렇게 불렀다.


그때는 이미 실각한 처지라 헛소리로 넘겼었지만 이제 거의 눈앞에 아른거리는 황위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녀는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있어 그따위 자리보다 중요한 것은...


"집사, 아니 정현. 하나 물어봐도 좋을까?"


"물론입니다, 폐하."


"왜 나를 이렇게까지 돕는 거야?"


-그것이 신하된 자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레이디.


-이 제국을 위해서.


-그날 우연히 봤던 당신의 메마른 눈물. 그것이 제 마음에 걸렸을 뿐입니다. O


"저희가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하십니까?"


"당연하지, 내 삼촌이 보냈던 추적대에게 목이 잘리기 직전 당신이 대신 칼을 맞아가면서도 필사적으로 도망치면서까지 나를 구해줬잖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


"사실 그때 저는 그냥 소란이 진정될 때까지 숨어있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더군요."


"...정말?"


소녀, 정당한 황위 계승권자 중 하나이지만 아직 다른 몇몇 유력 계승권자와 경합이라는 이름의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던 황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의 실망스러운 대답에 삽시간에 눈빛이 사라지며 그에게 다음 대답을 요구했다. 다행히 그도 그녀의 간절함을 눈치챘는지 뜸 들이는 바 없이 말을 이은 덕에 유혈사태가 벌어지는 일은 없었다.


"딱 그 얼굴이었지요. 지금 이 얼굴. 분명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 눈동자였는데도 제 눈에는 흘러넘치는 애수가 보였었습니다.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의 폭포라 부를 만한 무언가가요.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저는 그때 그 감정에 홀렸고, 휩쓸렸고, 압도 되어서 이제 당신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폐하."


"...그래? 당신도 참 어리석네. 나를 가지고 멋대로 그런 착각이나 해서 목숨을 내던지고 말이야."


"뭐, 저같은 멍청한 놈 하나쯤은 있어야 세상이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푸후."


사실 작은 비웃음으로 끝맺은 그때의 대화였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구애하듯 진심을 내보이던 그의 당당한 태도에 내심 얼굴을 붉히고 있었고 언제까지나 그 홍조를 유지하리라 생각했었다. 자신의 대관식이 열리던 날의 밤, 그가 스스로의 몸을 불살라 죽어버리기까지는.


이후 거의 미쳐 살며 정무에도 손을 놓고 있던 그녀는 그가 이전 아를레시아 왕국에서도 같은 모습, 같은 이름으로 같은 짓을, '다른 소녀'에게 행했었다는 사실과 분명히 자신이 그의 죽음을 확인했음에도 얼마 후 내전이 한창인 크산나 왕국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 역시나 같은 짓을, '다른 소녀'에게 반복하고 또다시 자살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 수 있었다.


그 후 세 번 배신당한 소녀는 자신만의 작은 복수를 다짐했다. 자신만의 작은 새를 평생 가둬놓고, 옭아매고, 괴롭히고, 사랑을 쏟을 깜찍한 복수극을. 그리고 자신의 것을 앗아간 창녀들에게 행할 단죄를.




****




대륙 중부에서 보기 좋게 툭 튀어나온 모양새의 꽤 거대한 알바르 반도. 그리고 그곳의 맹주인 크산나 왕국...이라지만 사실 그 칭호도 파티마의 어린 시절에는 다 옛날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마왕의 대대적인 대륙 침공. 때맞춰 일어난 신정론자들의 대규모 반란. 부패한 왕족과 귀족들. 이리저리 치이던 백성들의 봉기. 대사막에 의해 대륙과 분리되었지만 마왕이라는 이레귤러 손아귀는 그 위대한 자연의 보고를 뚫고 그 악의를 반도에까지 내밀었다.


그 탓에 여러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져버려 자신의 삼촌이 다스렸었던 크산나 왕국과 반도의 찬란했던 문명은 몰락할 위기에 처했었다. 그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기 전까지는.


수도 내성 앞까지 당도한 신정론자와 반란군의 심상치 않은 기세에 안좋은 미래를 직감하고 왕궁의 구석에서 조용히 죽음을 준비하던 그녀에게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조용히 손을 내민 그의 체온을 그녀는 조용히 상기했다.


그 이후 그녀는 마치 자신을 다 안다는 듯이 언변을 늘어놓은 그에게 몸을 맡기고 왕궁을 탈출했다. 사실 반쯤 신정론자의 자객 정도라 확신하고 몰래 비상을 준비했던 그녀였지만 놀랍게도 그는 그녀같은 여린 소녀가 무력하게 울고만 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는 바보같은 짓을 두고만 볼 수 없었다는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유를 대며 끝까지 그녀를 지키고, 성장 시켜나갔다.


기초적인 마법, 생존법, 은형술, 각종 학문과 고대 유적의 비급과 유물. 도대체 어떻게 이런 광법위한 지식과 유산을 한 개인이 모두 꿰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는 비상한 머리와 다르게 약해빠지고 볼품없는 형편으로 끝까지 그녀를 보필했다. 그녀가 어지러운 반도를 평정하고 마왕마저 토펄하며 옛 시조 이상의 위업을 달성할 때까지.


"모두 당신 덕분이에요! 이제 함께 왕국을...!"


휘이잉


그리고 대망의 대관식 당일. 한껏 상기된 마음으로 오랫동안 감춰왔던, 사실 이미 다 들켰으리라 예상은 했던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려 그의 방으로 달려간 그녀를 반긴 것은 사랑하는 이의 미소와 포옹이 아닌 창틀에 매달려 시계추처럼 좌우로 흔들리는 목 매달린 시체 한 구였다.


"..."


실의에 빠져 모든 정사를 놓고 있던 와중 갑자기 오를레앙의 여황이 건넨 단 한 편의 서신. 그것을 확인한 그녀 역시 여황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다짐을 했다.


다시 손에 넣는다면 죽음조차 자신들을 갈라놓지 못하게 하겠다고. 물론 눈앞의 창녀는 없이 오로지 그와 나 단 둘이서.




****




"후후. 너무 오랜만이라 너무 긴장했던 것 같군요. 여왕이여, 부디 무례를 양해해 주시기를."


"저야말로 실례했습니다, 여황. 부디 지금의 사소한 실수는 잊고 악적을 멸하고 무고한 분을 구하자는 사명을 이루도록 합시다."


"바라던 바입니다."


해가 저무는 가운데, 두 소녀의 순수했던 마지막 순정의 파편 또한 서로의 마음을 갉아먹느라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