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가난했다.


그냥 가난한 정도가 아니라, 찢어질 정도로.

얼굴도 모르는 부모님은 아기였던 나를 할머니한테 떠맡기듯 남기고 도망갔고 여전히 소식 한 채 없었다.


마음씨 좋으신 할머니는 열심히 일하셨지만 노쇠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만 쓰러지셨다.


생활비, 월세, 부모라고 부르기도 싫은 놈들이 남긴 빚더미, 그리고 무지막지한 병원비까지.


결국 내가 돈을 벌어야했다.

일반적인 직업으론 택도 없으니 적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돈을 땡길 수 있는 직업이 필요했다.


하지만 막 고등학교에 올라가는 학생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정말 싫었지만, 마지막 남은 선택지는 반반한 얼굴을 놀려먹는 것 하나밖에 없었다.




* * *




"얀붕아. 왜 그렇게 피곤해 보여? 어제 밤 샜어?"

"아니. 그냥 잠이 안 와서..."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솔직한 대답을 내뱉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더구나 유일하게나마 있는 친구인 얀순이 앞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솔직히 말해. 밤 늦게까지 게임하고 잔 거지?."

"아니라고. 내 신세에 게임은 무슨..."


아.

굳이 입 밖으로 꺼내기 싫었는데.


황급히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책상에 엎드리니 얀순이도 나를 따라 고개를 뉘였다.

당황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왜 그래? 너 무슨 일 있어?"


날카롭게 치켜뜨던 눈동자에 거짓말처럼 걱정이 가득 들어찼다. 부드러운 목소리는 밤일로 지친 심신을 위로해 주는 듯 했지만 내겐 거북하기만 할 뿐이었다.


"... 말이 헛나왔네. 별 거 아니니까 신경쓰지마."

"별 거 아니라고?"

"응."


"......"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 괜스레 불안한 마음이 들어 얀순이 쪽을 힐긋거렸지만 머리카락에 가려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알았어."


한참 후에 들려온 한 마디.

갑작스레 차가워진 음성에 흠칫했지만 이내 관심을 껐다. 조금이라도 더 자둬야 밤에 일을 나갈 수 있으니까.


'차라리 공부를 하라면 하겠는데...'


그러나 공부는 최소한의 생활 여건이 갖추어진 학생들에게나 허락된다. 나같은 최하급 거지에게는 하루하루 벌어먹기도 벅찰 뿐이다.


그저 이 지옥같은 순간이 조금이라도 빨리 지나가도록 기도하는 것이 내게 허락된 유일한 희망이었다.


"반장 인사!"

"수고하셨습니다!"


정신없이 자느라 수업은 모조리 흘려들으며 하루를 보냈다. 그제서야 피로가 가신 몸뚱이를 비척비척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얀붕아."


그때였다.


"혹시 힘든 일 있으면 말해주면 안될까?"

"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해줄 테니까, 말만 해줘."


"부탁할게."


뭐든 해준다라.

마음은 정말 고마웠지만, 속에서부터 헛웃음이 터져나오는 건 정말 참기 힘들었다. 

과연 얀순이 니가 내 상황을 알아도 도우려고 할까?


"정말 괜찮다니까. 이만 가볼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가까스로 잡아끈다. 당연히 나도 사람인지라 도움을 요청하고픈 마음은 굴뚝같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아무리 금수저라도 일개 학생에게 선뜻 거액을 빌려달라 할 수 있을까? 

당장 이번달만 해도 필요한 돈이 몇 억이 넘는데?


다른 건 몰라도 희귀병에 걸리신 할머니의 병원비는 밤낮을 뼈빠지게 일해도 구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다음 달 부터는 학교도 자퇴할 생각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젋고 잘생겼을 때, 최대한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 


- 고생 끝에 낙이 오리라. 


이따위 진부한 낙관론 하나라도 부여잡아야 겨우 정신줄을 붙잡고 아양을 떨 수 있었다. 지금 당장 눈앞의 역겨운 여자들로부터.


"너 정말 20살 맞니? 흐음, 얼굴은 아직 학생티가 나는 것 같은데."

"됐어요 언니, 요즘 연예계에도 이 정도 얼굴 드문데. 횡재한거죠."


30대 후반, 40줄에 다와가는 은퇴한 여배우들. 


이곳의 손님 대부분은 더 이상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없어 음습한 욕망이라도 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오는 악질들이었다.


'그러니 어리고 잘생긴 남자만 고집하는 거겠지.'


아무리 미성년자라도 상관없이 따먹고 싶어하는 쌍년들이라 해도, 지금은 내 손님들이다. 돈 없는 거지에게 있어 손님은 왕이 아니라 황제로 모셔야 하는 법이었다.


 "에이, 아니에요. 누나들이 훨씬 더 젊어 보이시는데. 그리고 저 20살 맞아요. 민증도 있는데."


업소에서 만들어준 가짜민증이지만.


"그래? 아쉽네. 일단 한잔 받아."

"풉, 아쉽다니. 언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기왕이면 학생이 더 꼴리지 않니?"


시발. 더러운 년들.

표정이 망가지면 안된다. 웃자, 웃어야 한다. 그래야 팁이라도 많이 받을 수 있을테니까. 하지만 술은 한 번도 마셔본 적 없는-


"야. 내 말 안들려? 술 받으라고."

"아, 죄송합니다. 제가..."


순간, 여배우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녀는 잔뜩 짜증난듯 술병을 유리 테이블 위로 내팽겨쳤다.


- 쨍강!


"내 말이 말같지 않아? 내가 따라주는 술 받아 마시라고, 이 창남새끼야."

"아......"


술, 한 방울도 마셔본 적 없는데.

할머니가 나 키우실 때 커서라도 술 마시지 마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는데. 안그러면 알콜중독자였던 니 애비처럼 된다고.

공부는 못해도 되니까 착하게 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셨는데.


"이런 씨발. 야 여기 매니저 불러와! 내 말 안들려? 얼굴 좀 반반하다고 술 한잔을 안 받으려 해!"


그러나 돈 한 푼이 절실한 내가 가지기엔 너무 건방진 꿈이었던 모양이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막내가 무슨 실수라도?"


표독스러운 호통에 매니저가 황급히 달려왔다. 안절부절 못하는 꼴을 보아하니 여기 VIP쯤 되는 모양이다.

...좆같다, 정말.


"정 매니저. 애새끼 교육 똑바로 안해? 왜 이렇게 싸가지가 없어?"

"다,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첫 출근이라 그런가봅니다."

"...첫 출근이라고?"

"예. 그, 그렇습니다."

"그래?"


여배우의 더없이 사납던 눈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온다. 첫 출근이라는 한 마디에 음흉하고 질척거리는 눈빛이 내 전신을 훑었다.

기분이 쓰레기같이 더러웠다.


"배우님께서 한 번만 봐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래도 이 나이에 이 정도 되는 애 없다는거 아시잖습니까."


매니저가 은근슬쩍 두 손을 어깨위로 올리며 압박한다. 내가 미성년자임을 알고 있음에도 부추기듯 무게를 실어 꾸욱 눌렀다.


"너도 티비에서 많이 본 분이시잖아? 긴장풀고 잘 해드려."


정 매니저가 두 손을 싹싹 비비면서 퇴장하고, 여배우가 다시 한 번 술병을 집었다. 


매니저가 알게 된 이상 또다시 VIP의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도 거절하면 힘들게 구한 일자리를 잃게 될 거란 확신이 들었다.


결국 나는 손을 뻗어 공손히 술잔을 들어올렸다.


"첫 출근이라니 한 번 봐주는 거야. 쭉 들이켜."

"...감사합니다, 콜록 콜록!"

"어머?"


독하다. 독해도 너무 독하다.

평소에 질색하는 담배 연기보다도 더욱 지독한 향이었다.


"술도 못마셔? 얼굴 반반하니 이미 개걸레 된 선수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더러운 창남 새끼들이 따라주는 술은 먹기 싫었는데, 잘 됐네. 너 그 술잔 한 번 비울 때마다 100만원씩 줄게."

"배, 백 만원요?"

"어때, 괜찮지?"


여배우의 입가에 더러운 욕망이 담긴 웃음이 피어올랐지만 애써 무시하고 술을 들이켰다.

시야가 휘청거리며 배 위에서 무거운 체중이 느껴질때쯤,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업소에 나간지 한달 째.

언제나처럼 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등교하자마자 얀순이와 마주쳤다.


'젠장.'


그날 이후 그 여배우는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와 날 지명했다. 그리고 내가 정신을 잃을때까지 술을 마시게 시켰다.  

그래서 술 냄새 날까 봐 일부러 일찍 온 거였는데.


'얀순이에게 만큼은 이런 모습 보여주기 싫었는데.'


엉망이 된 내 행색을 본 얀순이의 두 눈이 커지더니, 이내 무표정하게 변했다.


"...너 뭐야?"

"뭐, 뭐가."

"김얀붕. 너 요새 뭐하고 다니는 거야?"


얼음장보다도 차가운 목소리.

평소 내가 알고 있던 얀순이가 아니었다.


언제나 부드럽게 웃어주던 만능 엄친아가 아닌 잔뜩 열 받은 맹수를 마주한 것 마냥 공포가 밀려왔다.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


쾅!


얀순이의 발길질에 얻어차인 책상 다리가 정반대로 휘어졌다. 상상 이상의 괴력에 어안이 벙벙하기도 잠시, 얀순이가 대뜸 내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 요즘 거울도 안 보고 살지?"


'거, 거울?'


영문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니 그녀는 싸늘하게 코웃음치며 내 목과 입술을 번갈아 가리켰다.


"립스틱."


...립스틱? 아, 설마 그 여자가-


"다시 한 번 물어볼게 얀붕아."


"너 씨발 요새 뭐하고 싸돌아다니는 거야?"


하나밖에 없는 친구라 생각했던 얀순이가 분노에 휘감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본다. 


마지막 남은 동아줄마저 끊어져버리는 감각에 억지로 막아 놓았던 댐이 터져나왔다.


"너... 울어?" 


힘들다. 진심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잠 한숨 제대로 못 자가며 온갖 갑질과 짜증을 받아주고, 독한 술까지 쉬지 않고 마셔야 했다.


하지만 가장 괴로운 사실은 성인도 채 되지 못한 내 자신이 창남 취급받는 상황보다도. 아직 벌어야 할 돈이 까마득하게 남았다는 것이었다.


"나보고 어쩌라고..."


"부모 하나 없는 고아에,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까지 병에 걸려 쓰러지신 마당에! 나보고 더 이상 뭐 어쩌라고! 매일 밤마다 술집에 나가 비위 맞춰주면서 돈을 벌어도 매달 빚은 늘어가는데!"


"얀붕아, 너!"


내 진실을 알게 된 얀순이의 얼굴을 차마 바라볼 자신은 없었다. 나는 급하게 몸을 돌려 달리고 또 달렸다. 

교실 문을 넘어, 교문 밖으로.




* * *


 


"또 올게, 귀염둥이? 그땐 서비스 좀 더 진하게 해 줘야 한다?"


양주 냄새가 잔뜩 풍기는 입술이 목 부근에 와닿는다. 언제나 소름돋는 감촉이지만 이제는 마음놓고 웃을 수 있었다.

정신이 이상해져 버리기라도 한 건지 제대로 된 웃음은 나오지 않지만.


그저 어떡해서든 입꼬리만 위로 끌어올리는, 기괴한 표정만이 나올 뿐이었다.


눈물은 어느새 말라버린 건지 더이상 나오지도 않는다. 

얀순이에게 모든 것을 털어넣고 도망친 이후 비참한 내 자신에 질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지옥같은 현실은 그대로였고 난 순응하기로 했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랬어야만 했는데......


"허억! 왜, 왜 이러십니까?"

"뭐야, 제일 그룹이 왜 여기에...!"


'제일 그룹? 우리나라 최고 재벌인 그 제일 그룹?'


"야, 얀붕 군이요? 이, 이쪽입니다 아가씨!"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어색한 고요가 찾아온다.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함처럼.


또각. 또각.


점점 크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멈춰서고, 문이 열린다.

그리고 그 앞에는.


내 인생에서 더 이상 보이면 안될 여자가 서 있었다.


"야, 얀순... 읍!"


몇 달만에 재회한 얀순이는 많이 달라져있었다. 한층 더 커진 키와 발육된 육체, 그리고 사방에 둘러싼 경호원.

게다가 내 옆에 앉아있는 여배우보다도 질척이는 욕망이 담긴 어두운 눈동자까지.


"허... 허억...!"


본능적인 공포가 다시 한번 몸을 휘감는다. 그러나 저번보다 더욱 끈적이고 깊은 욕망이 뻗친 손길이 내 등과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오랜만이야 얀붕아. 저번에 하다못한 이야기는 네 옆에 앉아있는 시발련부터 토막치고 하자."


"물론 우리집 지하창고에서."



 

* * *




"아- 너무 좋아..."


어지럽다. 술 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더욱 독한 술이 목구멍을 비집고 들어온다.

침대에 팔다리가 묶인 내 위에 앉아있는 얀순이가 또다른 술병을 들어올린다.


"제, 제발 그만..."


짝!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간다. 채찍으로 얻어맞는 듯한 고통이 뺨을 엄습했다.


짜악!


고통이 완전히 가시기도 전에 또다시 손바닥이 날라온다. 더욱 빠른 빈도로.


짝!

짜악!

짝!


"미안해, 말 안해서 미안해 얀순아... 난 그저..."

"왜 숨겼어.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그깟 돈이라니, 재벌인 너한테는 몰라도 나한테는!


짜아악!


"얀붕아, 아파?"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만 내 턱을 붙잡고있는 그녀는 허락해주지 않았다.


"고작 이걸로 아프다고? 난 너 때문에 내 경쟁자 년놈들 모조리 죽이고 회장 자리까지 올랐는데. 넌 그새 다른 년이랑 붙어먹어?"


짜악!


"얀붕아. 너한테 매달려있는 빚더미들 내가 모조리 샀어."

"뭐...?"

"뭐긴, 이 창남새끼야."


"넌 이제 영원히 내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