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수녀원은 제법 아늑해보이지만, 그 내력은 비극적이다. 


2년전 전염병이 돌았을때 수녀들이 모두 죽어나가고 다만 젊은 수녀 하나만이 남아 꿋꿋이 지켜나가고 있다. 


차라리 다른 지역의 수녀원에 투신하거나 마을 안의 교회에 자리를 잡을 수도 있을텐데.


사냥꾼인 나는 때때로 그곳에 들러 수녀님의 상태를 보고 잠시쉬거나, 편지나 물건을 전달해주곤 한다. 


처음에는 남자인 나를 불편해하는 듯도 했으나, 역시 그 분도 말할 상대 하나 없는 것은 고역인지 금방 말을 텄다.



어느날 나는 고민이 생겨서 수녀를 찾아갔다.


“수녀님, 혹시 수녀님도 고해를 들어주실 수 있나요?”


“아니요. 저는 사제가 아니라 고해성사는 할 권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상담은 뭐라도 좋아요.“


”...그러면, 비밀을 지켜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우리는 수녀원 안으로 들어갔다.


”마을에 한 처녀랑 자주 이야기하고 있어요.“


”네?! 본 적없는데...“


”예? 그야, 수녀원에만 계시니 못보셨겠죠.“


”아, 아. 그렇죠. 당연하죠. 계속해요.“


”그런데 그 여자의 부모는 이미 약혼자를 정해두었단 말이죠. 그 집안이 이름은 한미하지만 돈은 많고, 그래서 좀 있는 집안과 연을 맺으려하거든요. 그건 좋습니다. 그 여자 데리고 도망칠 정도까지는 아니거든요, 하하... 그런데 그 여자가 결혼하고 나서도 관계를 끊을지 모르겠어요. 일단 그 처녀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고요...“


수녀님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거, 상당한 죄로 이어질 듯하군요. 제가 드릴 말씀은 당장 관계를 끊으시라는 것밖엔 없어요.”


“흠, 당연하겠네요. 사실 괜히 말씀드린 것같아요.”


“어쩌실 건가요? 제가 정직하게 발설하지 않겠다 했으니 얀붕님도 정직하게 말해주십시오.“


평소답지않게 엄한 모습으로 추궁하는 그녀에게 조금 눌렸다. 감히 거짓말은 저주받을까봐서라도 할 수가 없다.


”그, 그게... 그냥, 이 상태가 이어지겠죠.“


”말도 안돼요. 그러면서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고 온거예요? 마을에 있는 교회가서 고해 안할거예요?”


“안돼요. 작은 마을 아닙니까. 신부도 믿을 수 없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해요.”


“누구나 잘못이 있는 법이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딸을 보내는 사람들은 어떻고요? 이만 됐습니다.”


나는 수녀원을 빠져나왔다.


* * *


수녀님은 나를 이제 짐승취급할까? 


글쎄, 그 사람에게 다른 교회 등에서 보내오는 서신이나 물건을 전해주는 일은 사실상 내가 맡고 있다. 나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겠지. 


사실 나는 수녀님에게도 있는대로 모두 말하진 않았다.


나는 바로 그날 저녁에도 밀회를 가졌다. 외진 풀숲에서 나는 마을 처녀와 시시덕거렸다. 사실 처녀란 표현조차 틀렸다.


“당신, 첫날밤에 어떡하지? 쑥맥 서방 기절시키고 들통나버리는거 아니야?”


“후후, 죽은 생선처럼 가만히 있을거니까 걱정마... 그 건어물 같은 남자 상대로 뽐낼 생각도 없어.“


“그럼 다행이고. 그래도 확실히 하긴 해야해? 하지도 않았는데 임신해버리면 어떡해.”


“하긴, 그렇겠네. 그러고보니 나 결혼하고 나면 당신도 조심 안해도 되겠어, 헤헤.”


“애새끼를 당신 아버지 바람대로 장군으로 키우려면 그 비실이 씨갖곤 안될걸.”


“정말이야, 아무래도 결혼식 직전엔 좀 자주 만나야겠어.”


“하, 역시 당신도 만만치 않네.”


스스로 생각해도 엄청난 이야기를 나눠서 그런가, 왠지 숲속에 누가 있는 것같다는 느낌을 자꾸 받았다. 그 시간에 그럴리가 없었지만.


* * *


다음날 나는 수녀님에게 옆 교회에서 보내준 서적을 전해주러갔다. 그런데 수녀님의 행색이 어제와는 너무나 달랐다. 눈이 붉었고, 수녀복은 흙에 구른듯 지저분했다.


“저기, 수녀님. 괜찮으세요?”


“얀붕씨... 제 말을 들어요.”


“수녀님. 어제 한 이야기는 잊어주시죠.“


”당신이 뉘우칠 때까지는, 영원히 잊지않아요.“


”잊지않으시면요? 발설하시면 당신은 수녀가 아니에요.”


“얀붕씨, 끔찍한 죄를 막는게 먼저일지도 몰라요.”


“저는 단지 그 여자와 조금 친하게 지낼 뿐이에요.”


거짓말!"


수녀님이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로 빽 내지르자, 정신이 번쩍들었다. 이 여자, 설마...


“얀붕씨, 얀붕씨, 얀붕씨.... 안 돼요, 그 여자는 악마예요. 자신의 죄를 이미 돌이킬 수 없어서 당신마저 지옥으로 끌어들이는 거예요. 저는 그 꼴을 볼 수가 없어요. 제발, 제발...“


수녀는 무릎을 꿇고 내 옷깃을 잡고 늘어졌다. 젠장, 당장 내빼야겠다.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그 여자는 이제 안 만날테니 아무한테도 말하지마요!“


”거짓말, 거짓말! 얀붕씨, 저는 어때요? 수녀를 그만둘테니 제가 당신 욕구를 풀어드릴게요. 당신이 나를 거둬주면 그건 죄가 아니에요.“


”그만둬! 당신까지 망가트릴순 없어.“


“왜 나는 안되는데? 그건 어째서야? 결혼 앞둔 처녀는 잘도 정조를 뺏어놓고 평생 남자를 모르고 산 나는 왜 싫은건데?“


나는 발광하는 그녀를 뿌리치고 서둘러 돌아왔다.


”제기랄, 꼬일대로 꼬였군...“


그날도 ‘마을 처녀’를 만나기로 했지만, 수녀가 또 나를 미행할 것같아서 약속장소에 가지않았다. 


원래 안전을 위해 둘 중 한명이 제 시간에 나오지 않으면 잠깐만 기다리고 바로 돌아가기로 약속해뒀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나중에 따로 만나서 당분간 만나지말자고 말해둬야겠다.


* * *


마을이 떠들썩했다. 부잣집 딸이 사라졌다고 난리다. 나는 바로 직감했다.


...약속장소로 갈까. 수녀원으로 갈까. 어느 쪽이든 나는 파멸의 끝을 보겠지.


약속장소로 갈 엄두는 끝내나지 않았고, 수녀원으로 갔다. 칼을 뽑아야할지도 모른다.


수녀는 태연하게 당나귀에 매인 수레에 이것저것을 담고 있었다. 성유물? 책? 


“...뭐하는 거죠?”


“여길 떠날거예요. 이젠 여기있을 수 없어요.”


”이 수레는 뭔데? 값나가는 것들을 들고 튀려고요?“


“나의 것들을 실을거예요. 새 삶을 시작하려면 필요하죠. 난 이제 수녀가 아니고, 이것들은 나 홀로 몇 년을 지켜온 내 물건이에요.”


“그녀는 어떻게 했죠?”


“아직 못 봤나요? 내가 죄악을 멈췄죠.”


“내가 당신을 체포해서 마을로 데려간다면?”


“그럼 당신도 끝이에요. 왜 나인지, 나인걸 어떻게 알았는지, 그리고 그 여자가 왜 숲에 당신이 쳐둔 덫에 걸린 다음 늑대들에게 산채로 뜯어먹혀 다리만 남았는지 설명할 수 있겠어요?“


”이, 이럴수가...“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주저앉았다. 전부 내 잘못이다. 대체 수녀는 내가 덫을 어디에 쳐두는지는 어떻게 알았을까? 언제부터 나를 그렇게 주시한걸까?


상상도 하기 싫다. 그녀가 내 죄를 막으려고 이렇게까지 했다는건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수녀는 내 머리를 천천히 감싸안아주었다.


”얀붕씨. 이제 죄짓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그걸 위해서, 저는 수녀의 본분을 버렸으니, 그건 당신이 진 빚이에요.“


수녀는 점점 강하게 내 머리를 껴안아왔다. 목덜미가 아픈가 싶더니, 정신을 잃어버렸다.


수레가 많이 덜컹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