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동안 사귀고 있는 내 여자친구 시은.


정말 예쁘고 매력적인 그녀이지만, 나에게도 고민이 있다.


내가 그녀의 남자친구가 맞나 싶을 정도로 까칠하다는 점이다.


카페에서도 무관심하게 핸드폰만 바라보거나, 내 말에 무성의로 대답하곤 한다.


게다가 손을 잡으려고 하면..


"오글거리게 갑자기 손은 왜 잡고 난리야."


아랫입술을 깨물고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투덜거릴 뿐이었다.


..사귄 지 3년이나 됐지만 아직 관계 진도에는 진전이 없다.


날 정말 사랑하긴 하는 걸까?


· · ·


그 일로 그녀와 대판 싸운 날이었다.


처음으로 휴대폰 전원을 끄고 그녀의 연락을 무시했다.


아니, 애초에 연락을 하긴 했을까?


이젠.. 나도 지친다. 


다른 사람을 만나서라도, 사랑 받고 싶었다.


늦은 밤 꺼진 휴대폰을 붙잡고, 나도 모르게 잠에 들었다.



"네가 원한다면, 내가 널 사랑해줄게."



꿈에서, 어떤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아마 시은이의 목소리였다.



아무튼 나는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꺼진 휴대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 [ 부재 중 전화 13건 ] -


놀랍게도 많은 전화가 그녀에게서 걸려왔었다.


꺼진 전화로 13통이나 전화를 건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이에서 느껴오는 이유 모를 통쾌함.


나를 붙잡는 그녀가, 가여우면서도 기분 좋게 느껴졌다.


"흥! 백날 전화해보라지. 왜, 없으니까 허전하지?"



똑똑똑 -


문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


누구지? 택배도 안 시켰는데..?



"안에 있지? 방금 소리 다 들었어!"


그녀였다.


시은이는 엔간해선 집으로 먼저 찾아오지 않는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숨을 죽이고 사람이 없는 척 연기했다.



삑 삑삑 -


아차, 전에 비밀번호 알려줬었지.



"..."


엄청나게 혼나겠지.


딱히 잘못한 것도 없었지만.. 분위기 상 무조건 혼날 상황이었다.



퍽 -


시은이는 말 없이 나를 쳐다보다가, 내게 몸을 날렸다.


맞았다.. 고 표현하기 보다는 덮쳐졌다고 표현하는 게 맞았다.



".. 시은아?"



".. 시은이 아닌데."



".. 어?"


달라진 눈빛과 말투.


그리고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애교 섞인 목소리.



"뭐라ㄱ.."


마저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가 입술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와의 첫 키스였다.


두 손으로 내 손을 맞잡고, 다리는 서로 엇나가게 꼬아 누워서 하는 키스.



툭!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밀쳐내었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게, 조금 짜증 났다.



"너.. 갑자기 이런 식으로 한다고 해도.."


헝클어진 머리와 생기 없는 눈.


그리고 한시라도 달려들 것 같은 자세로 내 말은 그냥 한 귀로 흘려듣는 그녀였다.



"너.. 누구야..?"


시은이가 아니었다.


3년 동안 그녀와 사귀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아까 말했잖아.. 시은이 아니라고."



"그, 그럼 누군데?"



"정말 기억 안나? 우리.. 꿈에서 만났잖아."



꿈..?


그러고 보니 아까..



"그럼.. 네가 시은이 몸에 들어갔다는 말이야?"



".. 응."



"거, 거짓말..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시은이가 저런 말도 안되는 장난을 치고 있는 게 더 말이 안됐다.


다른 애도 아니고.. 시은이가. 그 시은이가 저럴 리는 없었다.



"워, 원하는 게 뭐야?"



"너."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도 날 사랑하느니 어쩌니..


정말 내 바램이 인격이 되어서 그녀의 속에 빙의한 건가?



"그, 그러면 시은이에 관한 기억은.. 하나도 없어?"



".. 어. 하나도."



허탈감이 몰려왔다.


좋은 추억은 많지 않았지만, 그녀와의 3년이 송두리 채 사라졌다.


나만 기억하는 그녀와의 추억.


아무리 시은이의 몸으로 나를 좋아해준다고 해도..


시은이가 아니라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도, 돌려줘."



".. 뭐를?"



"시은이.. 돌려달라고.."



"..."



".. 안되는 거야?"



"..."



".. 안돼.. 돌려줘..! 시은이 돌려내!! 그 시은이가 아니면 날 좋아해줘도 소용 없다고..! 빨리.."



".. 바보."



어..?


그녀가 돌아왔다.


아니, 애초부터 시은이였다.


처음부터. 쭈욱.



"시, 시은아?"



그녀는 곧이어 내게 안기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흐윽.. 미.. 미안해.. 표현하는 게 힘들어서.. 너한테 표출하는 게 부끄러워서 그랬어. 헤어지자고 할까봐.. 무서워서.. 그래서.."



"시은아.."



그녀와의 일은 다행히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젠 그녀도 표현하는 데에 부끄럼 없이, 표출하고 싶은 만큼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그녀와의 내일이.. 너무나도 기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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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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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대판 싸운 날이었다.


내가 평소에 너무 무관심하고, 까칠하다며 취기를 빌려 내게 모두 사실대로 말하는 그이였다.


자신을 좋아하는 게 맞냐고, 헤어지고 싶은데 정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는 게 아니냐고 내게 재차 물었다.



하지만 반대였다.


내 취미는 카페에서, 꺼진 휴대폰을 들고 그를 관찰하는 것.


그와 오래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저지를 것 같아서 최대한 대화는 회피한다.


내 마음 속 욕망을 표출하고 싶었지만, 그이가 도망갈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나를 절제하기 위해 '무관심한 여자친구'를 연기했다.



가끔, 그가 갑자기 손을 잡는 날도 있었다.


나도 모르게 덮쳐버릴 뻔 했지만,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참아 넘겼다.


이성이 끊어지면, 나도 내가 어떤 짓을 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와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길 바랬다.



그와 싸운 당일, 그가 전화를 받지 않자 초조해졌다.


여러번이나 전화를 더 해봤지만 전화는 계속 꺼져있었다.


혹시 잠수 이별을 한 게 아닌지, 나를 끊어낸 건 아닌지 너무나도 불안해졌다.


곧바로 그의 집으로 달려갔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다리도 아파왔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의 집 앞, 막무가내로 그이가 알려준 비밀번호로 도어락을 열고 들어갔다.


그는 자고 있었다.


울었는지 눈은 빨갛게 젖어있고, 잠꼬대까지 하며 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상관 어브니까.."


"다른 사람이라도 상관 없으니까.. 사랑 받고 싶어.."


듣고 말았다.


바보같이 착했던 그는, 취하거나 잠꼬대하지 않는 이상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내.. 내가.."


"네가 원한다면.. 내가 사랑해줄게."


마치 다른 인격에 빙의된 척, 저지를 생각이었다.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가서, 그가 깰 때까지 마냥 기다렸다.


얼마 후, 부스럭 거리는 소리. 곧이어선 그의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흥! 백날 전화해보라지. 왜, 없으니까 허전하지?"


노크 하고 기다렸다.


내 마지막 절제선이자 기억을 잃은 행세를 하기 위한 연기.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숨 참는 소리.


너무 귀여워서.. 문을 열고 무작정 들어가버렸다.


그는 역시 놀라는 눈치였다.


아아.. 이제 자유롭게 그를 겁탈할 수 있다.


절제하고 참아왔던 욕망이 한번에 배출되자,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 욕구를 그에게 풀어버릴 본능만 남아, 그를 덮쳐버렸다.


몸을 만지며 그의 입술을 훔쳤다.


그 후, 입은 그의 장단을 맞춰주고, 몸은 그를 겁탈하느라 정신 없었다.


하지만.


".. 안돼.. 돌려줘..! 시은이 돌려내!! 그 시은이가 아니면 날 좋아해줘도 소용 없다고..!"


뭐라고..?


그렇다면, 아까 했던 다른 사람도 상관 없다는 말은..


빈말이었다는 뜻이었다.


아아.. 깨달았다.


지금 이성의 끈을 붙잡는다면, 


지금까지의 '시은'을 다시 연기한다면.


그를 세뇌하고 가스라이팅하며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든다면..


한 번이 아니라 영원히 그를 만질 수 있다는 것을.


그에게 안겨 다시 '시은'을 연기했다.


그는 감동한 듯 나를 안아주고, 위로해주었다.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미래는 전혀 점 집어보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