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 순서: 물림 > 물림 - 2 > 발 없이 도망친 자의 수기 > 날개가 꺾인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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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바보라도 두 번을 속일 수는 없다.


더는 방법이 없다.


"네가 어떻게 날 배신할 수가 있어?"

싸늘한 지하에 분노 섞인 고성이 울려퍼진다.


"난 널 위해서 뭐든지 다 해 줬는데!"

증오가 서린 눈빛이 내게 꽂힌다.


"그런데 날 속이고, 날 버리고, 나를... "

퍼져나오는 감정이 주위를 일그러뜨린다.



...


그녀가 나를 두드려팬 지 몇 십분이 지났을까, 나는 스스로의 패배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곳을 어떻게 찾아냈는 지는 모르지만 이미 퀸은 체크메이트를 완료한 상태였고, 도망칠 길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바닥에 누워서 날아오는 주먹을 담담히 받아내는 것 뿐이다.

어느 새 그녀는 나를 때리다가 지쳤는지 내 위에 엎드려서는 그대로 잠들었다.

그녀가 깨어난 뒤에는, 다시 그 곳으로 끌려가는 건가?

또다시 그 끔찍한 날들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꺾이는 것 같았다.

그 참혹한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싶었기에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뒤 찾아오는 어둠이 더 안심되는 것은 어째서일까...




내 예상과 달리, 다음 날에도 어디론가 끌려가지는 않았다.

그녀는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대신에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지하실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녀가 옆에 있는 한, 이 곳은 내가 알던 아늑한 은신처가 아니었다.

날 지키기 위한 성은 나를 가두는 새장이 되었고

그 어느 곳으로도 쳐들어올 수 없다 생각했던 요새는, 나갈 수 없는 감옥이 되어 있었다.


방공호를 팔 생각으로 했던 일이 제 무덤을 판 꼴이 되어 버렸다.


나름 열심히 만들었던 급조 의족은 내가 보는 앞에서 부숴지고, 으깨지고, 불태워졌다.

그녀가 그 때 불태웠던 것은 비단 다리뿐만이 아닌, 탈출의 희망 그 자체였다.

그녀가 부숴버렸던 문은 더 튼튼하고, 잠금장치가 덕지덕지 달린 문으로 교체되었다.

팔은 잘리지 않았지만 수갑과 목줄을 차고 있어야만 했다.

나에 대한 그녀의 신뢰도가 바닥을 쳤다는 것의 방증이 아닐까.


그 증거 중 하나로, 내가 뛰쳐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나를 살갑게 대해줬지만

지금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다소 차갑다.

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아직도 노기가 식지 않은 걸까?

"아직도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짜증이 나." 

보라. 나를 보는 표정에 날이 서 있다. 필시 저 눈 속에는 분노가 요동치고 있으리라.

"후... 그래도 지금 이 집은 꽤 마음에 드네. 이제 다른 사람들의 눈을 신경쓰지 않고 너와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심호흡을 하길래 어느 정도 진정됐나 싶었는데, 갑자기 내게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이렇게 네가 비명을 질러봤자 밖에 들리지도 않을 테고!"

때리는 쪽도, 맞는 쪽도 숨이 거칠어진다.

발길질이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맞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저 아플 뿐이다.

"그 날 네가 뛰쳐나갔던 게 이런 완벽한 신혼집을 찾기 위했던 것이라면, 조금이지만 널 용서해주고픈 마음이 드는걸?" 

...사람을 복날 개 패듯이 실컷 까 놓고서 하는 말이, 뭐? 용서? 

지랄한다.

네년이 날 용서할 지언정 나는 널 용서 못한다.

 

그래, 너.

평온했던 내 인생을 망쳐놓은 너.

갑자기 나타나서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간 너.

...


그야말로 한 순간에 내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장본인과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응어리진 설움이 터져나왔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대체 왜... 어째서......"

"내가 왜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이렇게 시달려야 하냐고!!"


눈물이 터져나왔다.

"씨발, 너 도대체 누구야, 뭐 하는 년이야......"

몇 마디를 울부짖었더니, 더 이상은 눈물에 막혀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뭐?"

반대편에서는 분노가 터져나왔다.

마침내 이성의 끈이 끊어지기라도 했는지, 그녀가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너는 내게 아무런 관심이 없구나?"

"생각 같아서는 찢어 죽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할 정도로 너를 사랑하는데..."

"케헥...크흑, 끅......"

"..."

몇십 초 남짓 동안 목을 조르길래 날 정말로 죽이려는 건가 싶었지만,

이내 목을 조르던 손을 놓으며 나를 거칠게 바닥으로 밀어 넘어뜨렸다.

"그래, 내가 누구인 지 모른다고?"

"그렇다면 알려줄게. 그 몸에"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시간 따위 아무래도 상관 없었기 때문에 굳이 날짜를 셀 필요 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 날 이후로 그녀는 더이상 잇자국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예 지울 수 없게 그녀의 이름을 내 몸에 새겼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기억해두렴.

내 이름을.

네 주인님의 이름을.


그 입으로 직접 말해보렴.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얀순."


-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