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을 들어주는 은여우 님께서 (8)

 

 

 

 

그 뒤의 이야기는 책에 적혀있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어째서 죽어야 했는지.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기다렸는지.

 

우리가 그 날 했던 약속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

 

 

 

 

 

 

 

 

기억이 애매했다. 내가 여태껏 뭘 하고 있었는지 떠올리는 게 힘들었다.

 

분명히 나는- 잠깐 마을로 내려왔었다. 그 뒤엔……누군가를 만난 것까진 기억났다.

 

“일어났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덩치가 산만한 남자가 앞에 서 있었다.

 

남자는 죄인처럼 헤진 삼베옷을 입고, 양반탈을 쓰고 있었다. 

 

“당신은……?”


“내 이름은 견이다. 그리고 이쪽은…….”


“예옥이라고 합니다.”


이번엔 여자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위부터 아래까지 새까만 옷이었다. 꼭 무슨 저승차사가 입은 옷처럼 보였다.

 

“왜 나를……?”


“당신은 미끼입니다. 그 여우를 상대하려면 가능한 모든 수를 써야 할 테니까요.”


이 녀석들, 누님을 노리고 있다.

 

“누님은 평범한 인간이 이길 수 있는-”


“저희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니 걱정마시길. 그보다도 자기 걱정을 먼저 하는 게 좋겠군요.”

 

“뭐?”


예옥이 내 뒤로 걸어왔다. 그리고 내 턱을 잡았다.

 

“그만둬,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누님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저희는 그러길 바라고 있습니다. 은여우를 쓰러트리려면 금강산에서 나오게 할 방법이

 

필요하거든요. 당신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군요.”

 

으드득-

 

처음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직후 몰려오는 격통이- 내 다리가 부러졌다는 걸 알려줬다.

 

“아아아아아악!!”


“우선 다리, 그 다음엔 팔. 마지막으로 오른쪽 눈까지. 죽이진 마세요, 견.”


“알겠습니다.”


“그, 그만해. 그만둬!!”


그들은 그 말대로 했다.

 

처음엔 다리를 부러트렸고, 그 다음 팔을 박살냈다. 도중에 한 번 기절했지만 물을 부어

 

깨어나게 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눈알을 뽑혔다. 

 

죽을지도 모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압도적인 공포에 난 그저 떨 수밖에 없었다.

 

“왜!? 왜 누님을 노리는 거야!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왜? 이상한 질문이군요. 당신과 그 여우가 사람을 죽인 일을 기억하지 못하시는지요?”


숙부를 죽인 걸 말하는 건가? 왜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거지?

 

“저희의 임무는 인간을 해치는 영체를 구제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영체들이 

 

사람을 해치면, 저희는 구축합니다. 여기서 악역은 저희가 아니라- 당신과 그 여우입니다.”

 

“너희 전부 죽을 거야……!”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해야 할 일은 마땅히 하는 게 올바른 도리 아니겠습니까?”


견이 나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방에서 빠져나와 날 바닥에 집어던졌다.

 

“비명을 질러라. 도움을 요청해. 여우를 끌어들여라.”


“싫어……!”


견이 내 다리를 내리찍었다. 나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참았다.

 

“끄흑, 끄으윽……!?”


“네가 안 하겠다면 내가 하지. 은여우! 듣고 있다면 나와라! 네 남자는 여기에 있다!”


조용했다. 누님은 오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누님이 흙먼지 속에서 걸어 나왔다.

 

“누님! 돌아가! 이건 함정이야!!”


“곡이를…….”


“저게 그 은여우인가. 오랜만에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상대로구나.”


견이 발을 굴리자, 느닷없이 땅에서 커다란 쇠방망이가 솟아올랐다.

 

“곡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팔다리를 부러트리고 눈알을 뽑았지.”


“왜?”


“왜냐하면 전부 네 탓이기 때문이다. 너의 존재 그 자체가 틀렸기 때문이지.”


누님이 걸음을 멈췄다.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누님이 분노하는 모습을, 그토록 무시무시한 표정은 처음 보았다.

 

“너희 전부 죽어버려!!”


“너의 말은 힘을 잃었다. 어서 와라, 너의 무덤에.”


투명한 막이 하늘을 감쌌다. 누님이 연거푸 죽으라고 말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떻게……!?”


“결계다. 이 안에선 모든 종류의 요술을 쓸 수 없지……그리고!”


퍼억, 퍽-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들이 누님의 몸을 꿰뚫었다.

 

“누님!”


“이, 이 화살은……?!”

 

“널 잡기 위해 꽤 많은 준비를 했지. 도망칠 곳은 없다, 은여우.”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모를 병사들이 누님을 포위했다.

 

너무 많아서 숫자를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족히 500명은 될 것 같았다.

 

“죽여라!”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누님의 몸을 창으로 꿰뚫었다.

 

“흥, 싱겁군. 고작 이 정도였나?”


“……나는…….”


누님이 말했다.

 

“곡이를 다치게 하는 것을,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걸……저주하겠어.”


“온다.”


“너희 전부!! 저주한다!!”

 

피가 튀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토막이 나 죽었다.

 

“아아아아아아아!!”


“계속 공격해!”


병사들이 물러서지 않고 누님을 찔렀다. 그러나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었다.

 

“힘을 억제 당하는데도 이 정도라. 호오, 과연 재미있는 놈이로구나!”


“견, 인형병이 벌써 절반 가까이 죽었습니다. 슬슬 가세요.”


“얼쑤!”


견이 하늘 높이 튀어 올랐다. 

 

콰아앙-!

 

그가 땅에 착지하며 방망이로 땅을 갈랐다.

 

“자, 약골들은 그만 괴롭히고 덤벼라!”


“크아아아아악!!”


누님이 미친 짐승처럼 날뛰었다. 손을 휘두를 때마다 수십의 몸뚱어리가 튀어 올랐다.

 

견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누님의 손톱과 부딪히는 순간 불꽃이 튀었다.

 

“도깨비인 나와 맞먹는 힘이라……!”

 

“곡이, 곡아, 곡이를 돌려줘. 곡이를 돌려줘!!”


“이미 늦었다. 너도, 저 남자도 여기서 죽는다.”

“닥쳐!!”


누님이 몰아붙였다. 그 거대한 견이 견디지 못하고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 때, 누님의 손톱이 견의 몸통을 꿰뚫었다.

 

“흐읍!”


“!?”


그러나 견은 오히려 그걸 기다렸다는 듯, 힘을 주어 손을 빼지 못하게 했다.

 

“받아라!!”


콰아아앙-!!

 

발이 땅에 파묻혔다. 그녀가 양팔로 방망이를 막아냈지만,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곡이를……나는, 곡이를…….”

 

쩌저적-

 

방망이에 금이 갔다.

 

“곡이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겠어!!”


“방망이가!”


쩌엉-! 

 

방망이가 깨지는 동시에, 누님이 견에게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었다.

 

“크아악!”

 

이어서 발차기 연타- 돌려차기, 내려찍기를 연속으로 날려 견을 박살냈다.

 

“크헉, 끄으윽……!”

 

“이제부턴 제가 하죠. 견, 수고했어요.”


어디선가 예옥이 나타나 말했다.

 

“예옥님, 저는 아직 싸울 수 있습니다.”


“그렇겠죠. 하지만 굳이 힘든 길을 선택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갑자기 내 몸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팔다리가 부러져 움직일 수 없을 터인데- 어째서인지 움직였다.

 

“어? 어어어?”


“저는 인형술사입니다. 인간이나 영체를 멋대로 부릴 수 있는 힘을 지녔죠.”


“곡이를 놔줘!!”


누님이 예옥에게 달려들었지만, 내 몸이 멋대로 움직여 그 앞을 막아섰다.

 

“크윽!?”


“저항하면 죽이겠습니다. 견!”


“들었지? 은여우, 넌 여기 온 순간부터 이미 진 거나 다름없었단 말이다.”


“너희 전부-”


퍼억, 으지지직-

 

무자비. 그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폭력이었다.

 

누님은 저항하지 못했다. 나 때문에, 저토록 끔찍한 모습이 된 것이다.

 

“그거 아십니까? 은여우의 기원 말입니다.”


“뭐……?”


“먼 옛날, 상나라 시절에 은여우와 비슷한 영체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

 

소원을 들어주는 은빛의 여우. 행복을 가져다주는 강력한 영체…….”

 

예옥이 말하는 동안, 나는 누님을 보았다.

 

피투성이, 상처투성이가 되어가지만 나 때문에 저항도 못하고 얻어맞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은여우는 어떤 식으로든 인간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소원을 들어주고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착각하게 만들뿐, 결과적으론 은여우를 만난 인간을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게 누님을 미워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죽어가던 나를 살려준 것은, 이런 나를 사랑해준 건 누님뿐이었다.

 

“소원을 비세요. 은여우에게, 죽어달라고. 이제 그만 사라져달라고.”

 

“…….”


“그 소원을 빌지 않는 한, 은여우는 죽지 않습니다. 대신 끝없이 고통 받게 만들 순 있죠.”


“곡아!!”


누님이 내 이름을 외쳤다. 

 

“지금 구해줄게! 기다려, 돌아가자. 같이 돌아가자. 네가 필요해. 다시, 다시 한 번만……!”

 

“선택하세요. 계속 고통 받게 둘 겁니까, 아니면 고통에서 풀어줄 겁니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대로 가면 누님은 계속 저렇게 고통 받을 테고, 내겐 어찌할 방법이 없다.

 

누님을 죽일 수 있는 건 나뿐이다.

 

그래.

 

오직 ‘나’뿐인 것이다.

 

“누님, 내 소원을 들어줘.”


“곡아!!”


“지금까지, 나 같은 놈을 사랑해줘 고마워.”


지난 5년 동안, 나는 행복했다.

 

이 녀석들이 뭐라고 말하든 나는 분명- 진짜 삶을 살았다.

 

웃고, 화내고, 울고- 사랑했다.

 

“나를 죽여줘.”


“!”


내가 죽으면, 누님을 죽일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싫어, 싫어……싫어! 안 돼! 곡아, 나는 너를-”


“다시 만나러 갈게. 반드시, 누님을 찾아낼게. 어떤 모습이 되더라도- 난 찾을 거야.”


내세가 있다면, 다음 기회가 있다면.

 

그 때는 누님에게 몇 번이든 말해주고 싶다.

 

“사랑해.”


손톱이 내 가슴을 꿰뚫었다.

 

누님은 내 소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소원을 들어주는 은여우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자, 어떠냐.

 

한 방……먹었지?


“설마 스스로 죽음을 택하다니……!”


“아, 아아아, 곡아……곡아, 곡아……왜? 왜 그런 거야……왜 그런 소원을 빈 거야……!?”


누님이 우는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마저도 아름답다고 생각해버리다니, 바보 같았다.

 

전하고 싶었다. 말해주고 싶었다.

 

한 번만 더,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다시 만나러 와……나, 기다릴게. 언제까지든 기다리고 있을게…….”


이후의 일은 알지 못한다.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죽어버렸으므로.

 

 

 

 

 

 

 

 

 

*****

 

 

 

 

 

 

 

 

“너는 그렇게 죽어버렸어.”


누님, 아니 호은이가 내 등 뒤에서 말했다.

 

나는 책을 덮었다. 그 날, 신 씨에게 책을 받아 읽자마자 나는 기억을 되찾았다.

 

“그 뒤엔 어떻게 된 거야?”


“싸웠어. 필사적으로, 널 죽인 그 녀석들하고. 산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질 때까지.”


그렇지만 결국, 그녀는 패배했다. 그리고 봉인 당했다.

 

“내가 돌아올 거란 보장 따윈 없었잖아.”

 

“없었어. 그래도 기다렸어.”


“왜?”


“널 믿었으니까.”

 

400년. 나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만큼 긴 시간이었다.

 

그녀는 그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언제 돌아올지 모를, 아니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나를 기다렸다. 

 

호은이가 나를 뒤에서 껴안았다.

 

“또 그 녀석들이 우리를 노리고 있어.”


“…….”

“이번엔 빼앗기지 않을 거야. 너를, 너만큼은- 빼앗기지 않겠어.”


“어떻게?”


“이렇게.”

 

진동이 느껴졌다. 지진? 아니, 그런 게 아니었다.

 

“줄곧 생각했어. 어떻게 해야 널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지.”


“호은아……?”


“이제야 결론을 내렸어. 그래, 다른 것들이 있으니까 널 빼앗기는 거야. 이번엔, 이번만큼은,

 

다시는, 절대로, 널 빼앗기지 않겠어. 너는 나의 것이니까. 나는 널 사랑하니까.”

 

세계가 바뀐다. 바깥의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 무엇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할 ‘세계’를 만들면 돼.”


“무슨 짓을-”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있는 세계를!”


오직 행복만이 존재하는 세계.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리는 그곳에 있었다.

 

 

 

 

 

 

 

 

 

 

 

 

 

 

주인공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세계 자체를 바꿔버리는 먼치킨 얀데레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순애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2편 안에 완결낼 듯 ㅇ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