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고 흘렀다.


지휘관의 활약으로 40%에 달하는 지휘부를 손실한 그리폰은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상부의 비난과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병력 손실을 줄이기 위해 계속 병력을 뒤로 물렸다.

그에 반해 최소한의 손실로 효율적으로 그리폰을 유린하는데 성공한 철혈은 그 세력이 거의 줄어들지 않은채, 차근차근 영토를 확장하며 세력권을 공고히 하고 있었다.


지휘관과 알케미스트가 함께하는 것의 효율성을 확인한 엘리사는 그들에게 간부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수의 병력을 맡겼고, 전투와는 별개로 한가지의 임무를 추가로 내렸다.


"제가....임신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싫으면 거부해도 되는데."

"아, 아뇨! 딱히 싫지는 않습니다."


원래라면 인형은 임신할 수 없지만, 철혈에서 극히 최근에 개발한 인공 생식기 등을 인형에게 이식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철혈의 기술력을 시험하는 것과 그동안 골치를 썩이던 그리폰을 몰아내는 업적을 세운 알케미스트에 대한 포상을 겸해 엘리사는 그녀에게 이식을 권유했고, 알케미스트는 그녀답지 않게 부끄러워 하면서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식은 그날부로 즉시 시행되었고, 우려되던 부작용이나 거부반응 따위는 일어나지 않고 성공적으로 알케미스트의 본체에 자리잡았다.

이것으로 지휘관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 알케미스트는 그날 밤 지휘관에게 이 사실을 밝혔고, 인형도 임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지휘관은 놀라면서도 일부러 이식하고 올 정도라면, 자신과 아이를 만들고 싶은거냐고 그녀의 의중을 알면서도 은근슬쩍 떠보았다.


"그,그야...당연한 걸. 지휘관이, 좋으니까."


언제나의 그녀답지 않은 수줍은 표정과 태도가 너무나 꼴렸던 지휘관은 그날 밤 바로 거사를 치렀다.

인간과 달리 철혈에서 만들어낸 인공장기는 언제나 배란기를 유지할 수 있었고, 밤새도록 간부용 막사가 울릴 정도로 둘은 떡을 쳤다.

부대 이동을 위해 근처를 지나가던 디스트로이어가 그 모습을 몰래 엿보다가 컬쳐쇼크를 받을 정도로 격렬하고, 정렬적인 정사였다.


임신하겠다는 의지와 격렬한 정사. 덤으로 언제나 유지되는 배란기까지.

결과는 간단했다. 알케미스트는 그날로 임신했다.


인형의 임신기간은 사람보다 짧은 편에 속했다.

10개월간 뱃속에 아기를 품고 있어야 하는 인간에 비해, 비교적 짧은 6개월이면 만삭이 되어 출산이 가능햇다.


매일이 갈수록 알케미스트의 배는 조금씩 부풀어올랐고, 아이를 지키기 위해 그녀는 점차 최전선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런 그녀를 대신해 지휘관이 전장에 나가 공세를 지휘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늘었지만, 그만큼 만나는 것이 더욱 각별한 의미를 가지게 되어 그와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그리폰을 제압하고, 알케미스트와 함께 조용히 살고 싶다는 일념으로 지휘관은 이전보다 더욱 열성적으로 지휘에 임했고, 그리폰은 필사적인 방어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허점을 파고드는 전술과 압도적인 물량에 의해 서서히 전력을 상실해갔다.

이대로 가면 2개월 내에 그리폰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한 전망까지 나오는 가운데, 한창 어느 지휘부를 향한 집중공세를 계획하던 지휘관의 귀에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다.


"기지들이, 계속해서 습격당한다고?"

"응. 전방의 부대들도 아니고 후방기지들이 차례차례 당하고 있어."


아직까지 큰 피해는 아니었지만, 피해가 계속 누적된다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 분명했다.

허나 적의 정체가 확인되지 않은 이상, 잡을 방법도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우선은 눈 앞의 전황이 더 중요했다.

혹시 모르니 알케미스트에게도 경비를 단단히 할 것을 말해두는 선에서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날 밤, 사건은 터졌다.


---콰앙! 퍼펑!


"무, 무슨 일이지?"

"침입자입니다. 정문 쪽에서 폭발이 발생했습니다."


장시간 지휘를 한 탓에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지휘관은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폭발음에 눈을 떴다.

부관의 말에 따라 창문 밖을 바라보니 정문 쪽에서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간간이 총알과 작은 폭발음이 들리는 것으로 봐서는 전투가 이뤄지고 있는 듯 했다.


"그리폰의 부대인가....."


폐인이었을 시기, 망가진 왼쪽 눈을 고성능 의안으로 교체한 지휘관의 시야에는 부서진 문으로 들어오는 자들의 정체가 똑똑히 보였다.

철혈과는 달리 통일되지 않은 온갖 구세대의 무기들, 전투부대임에도 조금도 공통점이 없는 복장과 스타일. 저런 비효율적인 부대를 꾸리는 곳은 그리폰&크루거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과거 자신이 지휘했던 인형들도 존재했다.


"....."


입술에서 피가 날 정도로 꽉 깨문 지휘관은 잠시 침묵했고, 이내 부관에게 탈출용 차량을 준비시키고, 잔존부대를 탈출로 방호에 돌리라고 지시했다. 그가 있는 기지는 규모가 크지 않았다. 주력부대는 전선에 나가있는 상태고, 기지는 주로 중간보급 및 지휘용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낮에 하는 전면전이라면 지금 있는 병력으로도 문제가 없겠지만 이렇게 초반부터 한방 크게 먹은 기습에서는 철혈이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조금만 기다려라. 곧 돌아와 피의 복수를 해줄테니...."


자신을 이런 꼴로 만든 인형들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며 지휘관은 자신만을 위해 제작된 전용차량에 올라타 엑셀을 밟았다. 알케미스트가 있는 기지까지의 거리는 40km 남짓이다. 최대한 빨리가면 한시간 안에 도착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부우웅!!

"쯧, 벌써 쫒아오나."


기지에 있던 차량들을 탈취해 자신을 추격하는 그리폰의 인형들을 보고 지휘관은 혀를 찼다. 

피아간의 거리는 조금씩 좁혀지고 있었다.

잡힐 생각이 없었던 지휘관은 속력을 더 내려 엑셀을 밟았지만, 하필이면 어젯밤의 비로 인해 산에서 굴러떨어진 돌덩이가 도로의 절반을 가로막은 것을 보지 못했다.


---콰앙!

"크흑!"


100km에 가까운 속력으로 부딪힌 차는 크게 부서졌고, 지휘관은 그 충격으로 차에서 튕겨나와 바닥을 굴렀다.

상당부분이 의체로 바뀐 몸은 다행히도 그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주었지만, 통증까지 없애는 건 아니었다. 전신의 타박상과 고통에 지휘관은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도망은, 무린가."


추격자들과의 거리를 이제 300m도 되지 않았다. 붕괴액의 영향으로 초목이 말라버린지 오래인 이런 지형에서는 몸을 숨기고 은폐할 만한 곳도 없다. 가만히 있다간 포로로 잡히겠지.그리폰은 철혈에게 자비가 없다. 간부급이라면 모를까, 신분상으로만 보자면 배신자인 자신은 처형당할게 뻔하다. 즉결처형으로 피를 흘리며 싸늘이 식어가는 시체를 상상하니 기분이 엿같아졌다.


"적어도 내 마지막은, 내가 정하겠어."


허벅지의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낸 지휘관은 자신의 머리를 겨눴다.

죽을 때가 다가오니 여러 생각이 났다. 적어도 죽기 전에, 자신의 아이는 보고 죽고 싶었는데....


'미안하다, 알케미스트.'


자신의 아내에게 마음속으로 사과를 건네고 방아쇠를 당기려 하는 순간이었다.


"지휘관님! 그만둬요!"

---타앙!


정확하기 그지없는 저격이 권총의 슬라이드를 맞췄다. 탄피가 빠져나가는 구멍에 박혀들어간 총알은 사격을 강제로 정지시켰고, 그 운동에너지로 지휘관의 손에서 권총을 떨어트렸다.


"하,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는 건가."


십여대의 차량이 자신의 눈앞까지 다가와 멈춰섰다. 내려선 인형들은 모두 과거에 자신이 통솔했던 인형들이었다.

드디어 다시 만났다는 기쁨과 죄책감이 뒤섞인 표정이었지만, 지휘관의 눈에는 그저 증오스럽게 비칠 뿐이었다.


"지휘관님, 저희가 잘못했어요."

"제발 그리폰으로 돌아와줘! 앞으로 다시는 안그럴테니까!"


수십명이서 무릎을 끓고 자신을 올려다보며 외치는 말들을 지휘관은 코웃음으로 받아쳤다.

어처구니가 없군. 너희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바닥에 떨어진 총을 다시 주워들려 했다.


그 순간, 앞으로 나선 스프링필드가 지휘관의 팔에 매달리며 간청했다.


"제발, 한번만 다시 생각해주세요.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철혈이에요. 지휘관님 옆에 언제나 붙어있던, 알케미스트 그것이 원인이라고요! 그년이 저희의 마음을 조작한 거란 말이에요!"


알케미스트에게 그년이라는 표현을 쓴 것에 대해 격노해 스프링필드를 후려치려 했던 손은, 이전의 기억이 떠오름에 따라 잠시 멈췄다.

몇달 전, 지휘관은 알케미스트가 철혈의 중앙본부 근처에 차려둔 실험실에 간 적이 있었다.

그녀가 갖춰다 놓은 수많은 세뇌 및 조교용 도구의 사이로, 일종의 배양액 탱크에 담긴 초소형의 나노로봇들이 있었다는 것을 그는 인상깊게 기억했다. 


"저건 뭐지?"

"아, 저거? 벼, 별거 아냐. 그냥 다른 사람들이 심문대상을 보는 감정을 반전시키는 물건이지."


어설프게 변명하듯이 넘어갔던 그 때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와서 보니 이상했다.

감정이 반전된다는 말이 의미하는 건 간단하다.  사랑이 혐오로, 증오는 애정으로 변환시킨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것이 자신에게 박혀 있었다면, 하루아침에 급작스레 바뀐 인형들의 태도도 설명이 된다.


"젠장...."


믿고 싶지 않았지만, 가능성이 있었다. 지휘관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얼굴을 찡그렸다.

자신을 사랑한다더니, 그것도 거짓말인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이지? 이 모든 상황은 꿈이 아닐까?

현실 인식까지 엉망진창으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더 엿같게도, 그 당사자가 최악의 타이밍에 도착했다.


---끼익!


지휘관이 탈출하면서 날린 지원요청 메세지를 수신한 알케미스트는 황급히 자신의 기지에 있던 모든 병력을 이끌고 지휘관의 기지로 향하려 했다.  길이 하나밖에 없기에 지휘관의 탈출경로와 알케미스트의 이동경로는 자연스레 겹쳤고, 그 결과 지휘관을 가운데에 두고 철혈과 그리폰의 인형들이 대립하는 구도가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지휘관!"


자신을 걱정하는 표정으로 달려오는 알케미스트를 굳은 표정으로 노려본 지휘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에게 물었다.


"알케미스트."

"괜찮아? 다쳤으면 어서 치료를--"

"GT-11A. 그걸 나에게 심은 적이 있나?"

"무, 무슨 소리야. 어서 귀환해야--"

"말 돌리지 마!"


자신이 봤던 나노로봇의 코드명을 언급하자 당황하는 알케미스트에게 지휘관은 소리쳤다.


"네가 말했지, 그건 타인의 감정을 조종할 수 있는 물건이라고! 그걸 나한테 심었던 거냐! 그래서 그리폰에 있을 때 인형들이 나를 혐오하게 된거냐고!"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지휘관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분노했다. 

드디어 올게 왔다.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알케미스트는 사실을 말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응. 내가 심었어. 그래서 저 인형들이 지휘관을 혐오하게 되었던 거야."

"하.....그러고는, 나를 사랑한다느니 하면서 달라붙었던 거냐? 결국 나를 쓰고 버릴 심산이었어?"

"아, 아냐! 난 정말로 지휘관을 사랑한다고! 그래서 아이도 가진 거잖아?"


불룩 튀어나온 배의 정체를 알게 된 스프링필드의 눈빛이 번뜩인다. 허나 지금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고, 구원의 손길인 줄 알았던 것이 독초였다는 것을 깨달은 지휘관은 모든 희망을 버렸다.


---철컥.

""안돼(요)!""


지휘관의 머리를 향한 총구를 막으려 양쪽에서 두 인형이 달려든다.


"다음 생에는, 아무에게도 미움받지 않고 살 수 있기를...."


짧은 유언과 함께, 지휘관은 방아쇠를 당겼다.


---털썩.


한구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머리를 수평으로 관통하는 하나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지휘관은 시야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알케미스트와 스프링필드가 자신을 두고 뭐라고 싸우는 것 같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상관없겠지. 이제 나는 죽으니까.


그렇게 지휘관은 30년도 되지 않는, 한 많은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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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뒤.


한 때 철혈의 우세로 승패가 점쳐졌던 전쟁은, 다시금 일진일퇴의 공방으로 변했다.

지휘관의 뛰어난 전술능력이라는 이점이 사라지자 철혈은 이전의 수준으로, 아니 그 이하로 전투력이 하락했다. 반면 그리폰 역시 크나큰 전력을 손실했기에 마음대로 철혈을 몰아붙이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두 인형에게는 예외였다.


"사랑해...사랑해....이젠 절대 안 놓칠 거야...."

"여기가 좋으신가요? 후후훗...."


왼쪽에서는 백발의 인형이, 오른쪽에서는 갈색머리의 인형이 침대위에 누운 한명의 인간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손으로, 혀로, 몸으로. 둘은 남자에게 몸의 모든 부위를 써가며 애무했다. 수치심 따위는 일절없이, 과격한 행위도 서슴치 않아가며 남자를 기쁘게 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버틸 수 없을 정도의 쾌락에도, 남자는 아무런 반응도 내비치지 않았다.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있을 뿐이었다. 어째서?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더 이상 살아있는 자가 아니었으니까.


보존처리된 지휘관의 육체에 무의미한 봉사를 계속하는 두 인형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한때는 지휘관이 죽은 것에 대한 책임을 두고 사생결단을 내려 했던 둘이지만,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그의 죽음에 두 인형의 전자두뇌는 다른 선택을 했다. 지휘관이 죽었음에도, 그가 살아있는 것처럼 인지하게 하는 것이었다.


남이 보기에는 그저 미친짓이지만, 둘에게 있어서는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봉사일 뿐이다.

지휘관을 학대하고, 속였던 죄인인 자신들을 용서하고, 둘을 모두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말하는 환상에 서로를 죽이려 들던 두 인형은 극적인 화해를 이루었고, 그리폰과 철혈에게서 벗어난 외딴곳에 보금자리를 얻었다.


마음만 먹으면 추적이 가능하겟지만, 어차피 전투의지도 없는 간부를 강제로 끌어오는 것보다는 새 간부를 세우는 것이 이득히고, 그리폰으로서도 인형 한명의 탈주까지 신경쓰지는 않았다.


"오늘은 저도 임신하고 말거에요..."

"지휘관, 우리 둘째를 만들자. 혼자는 외롭잖아?"


사람의 손길이 닿지도 않는 오지에 숨겨진 오두막에서, 오늘도 하나의 시체와 두명의 인형, 그리고 한명의 아기는 미쳐버린 삶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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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이 거지같다고 느껴진다면 미안해.

이것밖에 떠오르는게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