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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ca.live/b/yandere/9072739  눈치없는 당신만을 바라보고 바라보는 여우 - 1




 "할 얘기가 없다고 했잖아. 다른 사람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네."


오늘따라 유난히 산산한 가을바람이 나이가 듦에 따라 윤기가 없어 건조해지기 시작한 내 얼굴을 스치며 지나간다.

노을이 저물기 시작하면서 어두워진 하늘을 밝히기 위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 가로등 몇 개와 공원에 우거진 나무들.

그러한 으스스한 풍경이 자아내는 인적이 드문 차도에서 내 앞에 서 있는 너.


 "오늘 하루만. 하루만 시간 좀 내줘."


그녀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하루? 시간?

최소한 정상인 정도의 양심은 가지고 있었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대화를 해주었던 것인데 이렇게나 못 알아듣는 인간이었다니.

가난한 우리 집과 다르게 부유하고, 공부 머리 더럽게 안 돌아가는 나보다 학점도 높았고,

평상시에 비렁뱅이 같이 살며 끼리끼리 놀던 우리 집과 다르게 차원이 다를 정도로 수준 높은 사람들과 어울렸을 네가 말이다.


제발 좀 깨달아.

지겹게 하지 말고.


 "제발 그만해.

  설령 네가 나한테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마음이 없다고 하잖아."


전부 다 설명했잖아.

그만 좀 하라고.


 "어, 어떻게든 네가 날 더 볼 수 있도록 돌려볼게.

  네가 마음에 들도록 어떻게든 더, 더 잘할게.

  아주 더 잘할게. 그러니까…."


흔하디흔한 헤어지고 나서 연인을 붙잡는 사람들이나 할법한 말.

보통 이런 것은 차인 사람이 한다는데.

우리 둘의 경우는 그 반대의 상황이지.

날 찼던 건 너인데 이제 와서 매달리는 건 너라니.

하늘도 유분수지. 이런 상황을 나 같은 인간에게 내려주시다니 말이야.

X같은 상황이 아닐 수가 없지.


 "그 잘하는 거. 더 잘하겠다고 하는 그거.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해.

  나보다 좋은 사람 만나서 그 사람한테 해.

  그때의 나보다 너를 훨씬 더 아껴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주 많아.

  그러니 좀 찾아봐. 찾으면 나와.

  언젠가 나와.

  내가 너의 끝이 아니야.

  그러니까, 좀 그만해라."


제발 거기서 벗어나.

그때의 나한테 갇혀 있지 말고.


 "아, 니야. 너만큼 잘해준 사람이 없었어. 이제 와서 찾는다고 해도, 그런 사람은 없을 거 같단 말이야…."


바람이 너무 차서 그런 것일까.

가을 날씨치고 굉장히 얇게 입고 온 네 얼굴이 조금씩 붉어지는 것이 보인다.

내 눈에 더 예뻐 보이고 싶었던 마음이었던 것일까.

생각해보니 오늘의 네 모습은 머리스타일 하나 빼고

내가 너한테 고백했을 당시의 그 모습이구나.

그때도 이런 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리고….

그 어울리지도 않은 못난이 조약돌 팔찌.

우리 집에 온 날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착용하고 있네.


아니지, 옆으로 새면 안 되지.

저 소리.

또 또 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다.

쓰일 곳 하나 없는 개똥 같은 말.

뭐?

너 말곤 그런 사람 없다고?

그런 이상한 소리 좀 그만해라 제발.

찾으면 당연히 나오고 네가 진실한 행동으로 상대를 대한다면 상대도 그에 부응하려고 보답하려고 노력한단 말이다.


 "야. 당연히 그땐 좋아했으니까 조금이라도 더 착해 보이고 조금이라도 더 좋아하게 만들려고 그런 노력을 하는 것이지.

  그건 정상적인 연애를 하는 것이면 누구나가 할 수 있고 누구나가 받는 거야.

  이 세상에서 너만! 특별하게 받는 게 아니라고.

  그 누구도 받지 못하는 것을 이 내가! 너를 특별하게 여겨서 잘해준 게 아니라고.

  이 세상, 온 세상, 작든 크든 동물부터 시작해서 남녀노소, 동성 커플이든 이성 커플이든 누구나 다 했을 거라고!

  남들도 연애할 때 다 하는 거라고! 이 세상 누구나!

  그러니까! 좀!

  그때의 나한테서 벗어나라고! 좀!

  제발 멍청하게 살지 말고. 벗어나라고 말하잖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듯 점차 차갑고 점점 더 거세지며 살갗이 아플 정도의 칼바람과 함께 최대한 내지 않으려고 참던 내 화도 치밀어 올라 소리를 질러버리고 말았다.

내가 남들보다 더 일찍 깨우쳐서

남들보다 더 잘났으니까 이런 훈계하는 듯한 말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냥….

잘못된 생각을 고치고 살라고 하고 싶은 것이다.


나한테 이렇게나 잘해준 것은 너밖에 없었다.

너라는 진국을 잃고 나서야 똥차만 만나 너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뒤늦은 후폭풍에 휘말려 마음이 아파 죽을 것 같아 너무나 미안했고 보고 싶다.

지금 널 놓치면 난 평생을 후회하면서 살 것이다. 등등


그런 쓰잘머리 없고 철없는 생각 좀, 제발 좀 그만하라고.

연애가,

사랑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삶이나 좀 챙기라고. 

정말….

진짜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닌데.

왜 이렇게 보질 못하는 거냐고.


 "없어…. 없다고…. 네 말대로 안 찾아보고 안 만나본 게 아니야…. 훌쩍…. 진짜 없다고. 없단 말이야. 너 같은 사람이…."


닭똥 같은 눈물방울을 떨구며 울상을 짖는 연화.

이리도 미친 인간이 있나.


 "우으…. 진, 짜, 너 같은 사람이…. 없었는데.

  훌쩍. 

  어떻게 하라고….

  너 말곤 그 누구도 생각이 안 나는데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너밖에 없는데!

  너 말곤 아무도 없는데!

  그렇게 잘해준 사람이!

  너 말곤 없었다고 말하잖아! 이 병신 같은 새끼야! 흑흑." 


울먹거리며 참았던 눈물을 펑펑 떨구며 울분을 토하는 너.

내 기억 속에서 우는 것 따윈 하나도 보여준 적 없던 너였는데.

처음으로

보게 되었구나.

네가 우는 모습을.

네가 울기도 하는구나.

너무나도 예쁘고, 도도하면서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에

상상도 못 했던 것인데.

나 때문에 우는구나.

고작 이런 인간 때문에 말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음 약해서 받아주는 일 따윈 없어야 한다.

다시 연애하기 위해 고치겠다고 한다고 손발이 닳도록 빌고 빈다고 치더라도,

그럴 정도의 인간이었다면 진작에 변했겠지.

변할 수 있던 것이었다면 그때 그 당시에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몇 번 싸우다가 변했겠지.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아니잖아?

넌 애초에 날 신경 쓰지도 않았고,

그저 장난감, 액세서리에 불과한 인간이었잖아.

원래 남자친구를 못 만날 때 쓰던 심심풀이 똥강아지였잖아.

왜 그리워한다는 것이냐.

그렇게도 잘해준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이 말이나 되나.

그게 말이 되냐고.


너처럼 빛나고 내 옆에 있기에 아쉬운 녀석이 왜….

그러는 거냐고.


 "그러니까 관둬. 그 노력의 대상을 나로 한다고 해서 변하는 거 아무것도 없어. 난 너 안 받아 줄 거고."

 "흑. 희연이한테는…. 희연이한테는 그렇게나 상냥하게 말했으면서….

  나한테는 왜 이래? 왜 그래?

  나나 희연이나 마찬가지잖아.

  똑같이 사귀었던 사이인데,

  나한테만 왜 그렇게 차갑게 대하고 무시하는 거냐고!"


마찬가지라고?


 "걔랑 너랑 같다고 생각하냐? 우리 어떻게 헤어졌는지 몰라서 그래?"

 "내가 널 너무 힘들게 했다는 거 알아.

  넌 열심히 해줬는데, 내가 완전히 무시한 거 알아.

  장난 치면서 가지고 논 것도 맞고,

  다른 사람이랑 비교질이나 하고, 

  맞아. 훌쩍. 나 못된 X이야.

  정신 나갔고, 양심 없고, 망할 X인거 맞다고.

  그러니까.

  진짜로 잘할테니까.

  딱,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 돼…?"


예쁘게 했던 화장도 망가질 정도로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너.

그런데도,

넌 왜 이리도 예쁜 걸까.

네 뜨거운 눈물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열심히 꾸몄을 화장이 흐려지고 못나져도

그 빛나는 이목구비를 망치지 못하고 그 아름다움 그대로를 보여주네.


치사하게.


사실은,

그 날 다시 만났을 때도 두근거리지 않았다고 속으로 그랬지만,

알면서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애써 외면하려고 노력했던 것들인데.

점차 내 마음속의 사실들을 숨기기가 힘들어지네.


그렇다고 약해질 순 없어.

여기까지 왔는데 약해질 순 없다고.

네가 완전히 나에 대해서 포기하게 하려면

그때 보았던 것들 전부 다 말해야겠지.

내가 그 날 그 꼴 다 봤다는 것을 말이야.


 "너. 우리 헤어진 날. 기억해?"

 "훌쩍. 기억해. 그걸 어떻게 잊어. 제일 후회스러운 날인데."

 "쿠큭. 아. 그래? 기억한다고? 크큭."


제일 후회스러운 날이라….

그럼 그것을 기점으로 찔러줘야겠네.

네가 제일 후회스러운 날이라고 말한 그 날이

내 삶에 있어서 제일 아프고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때라고.


뼈아프게 찌를 말을 해야 하는 원통함에 가슴 아픈 속마음과는 반대를 띄는 내 얼굴의 실소.


 "왜? 왜 웃어?"

 "끄흐흑. 하하하. 아니, 그럼 더 잘 된 것 같아서."

 "뭐가? 뭔데? 뭔데 그렇게 웃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말.

소리도, 풍경도, 냄새도

그 어떤 것 하나 꺼내고 싶지도 않은 기억.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아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문 하나를 만들어두고

자물쇠로 꽁꽁 싸매고 빗장 수십 개로 쌓아 막고 막았던 그 기억.

그런 그 기억을 다시 꺼내기 위해 빗장과 자물쇠 하나하나 풀어버리고 그 문을 열 수 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않아 시궁창 쓰레기와도 같이 썩어 문드러지고 악취만 나는 그 문 안에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비집고 다시 꺼내기 위해서.


 "바로 그 전날 네가 그 새끼랑 물고 빨고 한 걸 다 봤으니까 그 날 헤어지자고 할 때 바로 수긍하고 헤어진 거잖아."

 "...뭐?"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와 당황해하는 너.


 "그, 그걸…. 네, 가 어떻게…. 알아?"


쉽게 수긍하네.

아니라고 변명부터 할 줄 알았는데.


 "네가 그 아는 오빠라는 인간이랑 뭘 하는지 모르고 살 것 같았어?

  내가 그것도 모르고 살 것 같았냐고!"

 "...히끅."

입을 꾹 다문 체 울먹이는 너.


아주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나와버려서 갑자기 묘해지지?

더 당황해라.

더 슬퍼하고

나한테 더 미안해해라.

그래. 그렇게 계속 양심의 가책을 느껴라.

나한테 면상 들이밀기 미안하고 미안해서 죄책감에 죽어버리기 직전까지 가라.

제발.


 "내가 그거에 완전히 정떨어져서 너랑 헤어진 거야.

  난 그걸 본 날도,

  그 다음 날 너랑 헤어진 날에도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넌 관심도 없었잖아?

  아, 너무 물고 빨고 즐기고 거기에 푹 빠져 계셨던 때라 모르셨겠죠? 그렇죠? 그렇지 않나요?

  그렇잖아! 이 망할 X아!"


등 쪽에서 서서히 올라오는 격통.

눈을 질끈 감고 소리 지르고 아무 생각 없이 땅바닥에 엎어저 뒹굴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찾아오는 뼈가 녹아버릴 것만 같은 아픔.

앞으로 한 번.

한 번만 참아줘.

얼마 안 남았어.


 "으으…. 아,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이렇게 빌게….

  그런 일 두 번 다시 없어. 진짜야.

  제발. 제발 부탁이야. 믿어줘…. 제발…."


나에게 다가와 그 누구에게도 비굴하게 굽히지 않았을 그 새하얀 무릎을 저 온갖 더러운 것들이 모여있는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손발이 닳도록 빌기 시작한다.

그러곤, 방금 보다 더,

더 안타까울 정도로 울며불며 빌면서 내 다리를 붙잡는다. 내 다리에 매달려 강하게 감싸안는 네 눈을 바라본다.

그렁그렁한 눈망울. 그 눈을 타고 흐르는 서글픈 물줄기. 애처로운 네 울먹임에 마음이 약해져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진다.


아니.


약해지지 마.

약해지지 마라. 병신새끼야.

저 눈 보지 마.

저 눈 보면 또 마음 약해진다.

눈 보지 말고 다른 곳 봐.

이제 조금 남았어.

조금만 더 하면 완전히 떨쳐 낼 수 있다고.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이 미친 X아! 내가 그때 얼마나, 욱!"


콜록콜록.


몸속 너머 마음에 꽉꽉 눌러 담던 화를 터뜨려버리던 나머지 사레가 걸려버렸다. 헛기침도 나오기 시작한다.

제기랄.

거의 다 왔는데

여기서 한 발자국만 더 가면 완전히 끝낼 수 있는 거였는데….

어째서 도져버린 거냐.

어째서.


전부터 미리 상비해둔 휴지를 주머니에서 꺼내 입을 막고 몸을 돌려 입술과 손에 묻은 내용물을 닦아내고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주변에 쓰레기통도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대놓고 바깥에 버릴 순 없으니. 


 "얀, 붕아? 너 괜찮아? 너 전에 카페에서 다시 봤을 때부터도 그랬고, 오늘도 그래. 안색이 안 좋아 보여.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아플 리가 있냐! 신경 꺼!"

 "예식장에서 얀돌이 동생한테 물어봐서 다 알아.

  너 전부터 죽밖에 안 먹는다면서.

  입맛이 없는 거야? 왜? 왜 그런 건데…."


꿇던 무릎을 풀고 땅바닥에서 일어나 내 팔을 붙잡는 너.


 "아오. 씨X! 신경 끄라고!

  이 정신 나간 여자야!

  내 인생에서 제발 좀 꺼지라고 말하잖아!

  왜 말귀를 못 알아 처먹냐!

  넌 내 삶에 있어서 악몽과도 같은 존재라고!

  난 너 같이 몸 함부로 굴리고 사람 마음을 자기 멋대로 장난치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고!"

 

하고 싶지도 않은 악담을 연신 퍼부었다.

날 붙잡고 있던 널 팔에 붙은 벌레를 쫓아내는 것처럼 쳐버리고 내 차로 달려가서 시동을 걸었다.


쿵쿵!


 "얀붕아! 얀붕아!"


다급하게 운전석의 창문을 두드면서 나를 부르는 너.

X팔. 그때 약한 모습만 안 보였어도 완전히 끝을 낼 수 있었는데.

매정해져야 한다. 매정해지라고. 좀 이 병신 새끼야.

지금이라도 더 매정하게 해야 해.


 "좀 가라고 했, 잖냐! 방해된다고!"

 "꺄악!"


급하게 창문을 내려 팔을 창문 바깥으로 내밀어 연화를 매몰차게 밀어버렸다.

그리고 가속 페달을 밟아 자리에서 벗어났다.


부우웅~ 부우웅~ 부우웅~


조수석에 놓았던 내 스마트폰이 발작하는 환자처럼 쉴 새 없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망할 X…. 끝까지…. X랄이네."


나 말고는 대화할 사람 하나도 없는 이 좁디좁은 차 안에서 욕지거리를 한 사발 뿌려놓는다.



아파트 지하 메케한 먼지밖에 없는 주차장에 도착하고 집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도대체 무슨 말이 오갔길래 이리도 흔들렸던 걸까.

스마트폰을 꺼내 비행기 상태로 전환하고 도대체 누가 이리도 메시지를 많이 보냈나 하나하나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연화였다.

그것도 모자라서 희연이의 메시지도 있었다.


 "정신 나간 것들 진짜. 그렇게 말을 해줘도 못 알아 처먹냐."


너희의 행동에 속이 답답하고 개탄스레 느껴질 정도로 미칠 지경이다. 

제발 그만해.

난 너희가 원하는 것은 그 어떠한 것도 못 줘.

그러니까 제발.

제발….

제발 좀….

나를 잊고 살아.

나 말고 너희의 인생을 위해서라도.



불이 다 꺼져 별 하나 없는 서울권의 밤처럼 까맣게 꾸며진 집으로 들어왔다.

내가 들어왔음에도 반기시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도 먼저 주무시는 듯하다.

다행이다.

일찍 주무실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해지신 것 같으니.


터벅터벅


진통으로 인해 온몸의 맥이 빠져 힘없는 발걸음으로 걸어 안방에서 먼저 주무시고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곤히 주무시고 계셨다.

주름지고 까무잡잡한 피부.

편찮으신 심장을 돕기 위해 가슴 속 한 편에 불룩 튀어나와 있는 페이스메이커.

이젠 흰머리밖에 남아있지 않은 머리카락.

그 동안의 아픔으로 인해 얇아지신 팔과 다리.

그것들을 가지고 나를 키우신 아버지.

잘해드리지 못해 너무나도 죄송한 분.

그래도 이거 하나는 다행이다.

가위에 눌리시지 않은 것 같으니.


 "건강하셔야 해요. 아버지."


제 몫까지요.


들리지 않게 그렇게 말을 마치고 화장실로 들어가 손을 씻는다.

나를 보면 힘이 난다는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그동안의 고생으로 인해 생긴 오래된 나무와도 같은 주름진 얼굴과 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효자가 되고 싶었다.


지금까지 했던 행실을 생각하면 효자라고 불리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아버지의 외도와 가정폭력으로 인해 몸이 망가지신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얀돌이와 그 동생 얀붕이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직접 보면서 하나둘 배워나갔다.

물론, 이 말을 동생 얀붕이가 듣게 된다면 자기도 형 발끝 아니, 발톱의 때도 못 따라가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할 테지만. 

이 전처럼 버릇없다고 자주 말을 들었던 틱틱 튀는 말투도 고쳐나갔다.

난 아무 생각 없이 평범하게 던졌을 말이라도 아버지께는 상처가 될 수도 있으니까.

아버지의 행동에 물도 없이 고구마 10개를 처먹은 듯한 답답한 것이 생긴다고 해도 최소한 남들 앞에서는 고분고분하게 수긍했다.

설령 그것이 틀린 것이라고 하더라도 아버지의 자존심에 약간의 상처라도 입히기 싫었으니까.


어느 날, 아버지께서 자주 말씀하셔서 귀에 피가 날 정도로 지겹게 들었을 옛날이야기를 다시 말씀하셔도 묵묵히 들었다.

얀돌이가 소개해준 책에 그렇게 적혀있었다.


치매 바로 이전의 단계.


경도 인지 장애에서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로,


부모님께서 예전 이야기를 자주, 상당히 자주 말씀하기 시작할 땐 고분고분 따르고 말대답도 잘해드리라고.

그냥 예의 바르게 행동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에게는 정말….

자식들을 기르기 위해 너무나도 고생한 당신들은 정말로 그것 밖에 기억이 나질 않아서.

자기 앞에 있는 사람에게 무언가 얘기는 하고 싶은데, 이야기가 너무나도 하고 싶은데 말해 줄 것이 정말 그것밖에 없어서….

그나마 기억나는 것 하나 어떻게든 쥐어짜서 말씀하시는 거라고.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잘 들어드리라고.

놓치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잘 들어드리라고.

내 책장에서도 유난히 헤진 책에 그렇게 적혀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알아챘으면 좋았을 것을.

병신 새끼.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효도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야 조금씩 깨우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내 기준만 가지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기준으로도 바라본다는 것.



어린 시절 초등학교에서 선생님들께서 열심히 가르치시던 그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깨우치게 되었다.

모든 것이 다 남 탓.

모든 것은 다 이 대단한 나를 잘 굴러가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 탓.

저 새끼가 잘못해서 내가 이 지경이 된 것이니 난 잘못이 없다는 생각에서

내가 이런 행동을 했기 때문에 상대가 저런 식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구나 라고 말이다.

조금 더.

그러한 것들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다른 사람들을 더 아프게, 더 힘들게,

그런 아픔 따위 주지 않았을 텐데….


아니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그게 아니지.

절대로 아니지.


학교 선생님들께서 열심히 알려주신 것들인데 내가 무시했던 것이지.

멍청한 새끼 같으니라고.

이젠 기억도 왜곡하기 시작하네.

병신 새끼.


그건 그렇고.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아주 잘 돌아가던 맷돌도 관리를 안 해주면 잘 돌아가지 않듯

내 머리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기운이 빠지는지

다음에 무엇을 해야 나와 상대에게 최적의 선택이 될지 알려주던 그 머리도

아무런 선택지를 주지 못한 채 가만히 있기만 할 뿐.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젠 정말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커다란 광장거리에 홀로 미아가 되어버린 꼬마 아이처럼 어떻게 해야 할 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 중

무엇이 연화와 희연이의 삶에 더 나은 행동이 될지.

무엇이 더 아버지를 위한 행동인지.

무엇이 더 아버지의 미래를 위한 행동이 될 것인지.


그 어떠한 방안도,

그 어떠한 것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냥 모든 시간이 멈춰버리고 행동도 굳어버려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오면 좋겠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뿐.

최대한 밝고 올바른 긍정적인 생각만 하려고 했던 내 머리도, 점차 더럽고 도저히 사람으로서는 생각하면 안 되는 그런 부정적인 생각으로만 가득 찬다.


 "하하. 왜 이렇게 나약해졌나. 병신같이."


거울 속에 비치는 나를 보고 조소를 띄며 자조했다.

그러니 진작에 잘하지.

이상한 곳에 머리 굴리지 말고 잘하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병신 같은 새끼.



아. 참.



나 병신 맞지.

왜 또 아닌 척을 했는지 몰라.

이젠 머리도 제 기능을 못 하는 듯싶네.



너무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었는지 물기에 불어터져 허여멀겋고 쭈글쭈글해진 손을 닦고 화장실 밖으로 나가기 전,

주머니에 있던 휴지가 생각나 변기 속에 던져놓고 물을 내리고 밖으로 나왔다.

평범하게 쓰레기통에 버릴 정도의 물건은 아니라서 그리하였다.

그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었다.









특히, 아버지께는 더더욱.

































내 몸속에서 튀어나온 저 새빨간 체리 껍질과도 같은 내용물을 어떻게 보여드리겠어.



어떻게….



보여드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