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왜이리 황급히 돌아와, 이 짐들은 다 뭐고….황금?”


사내의 아내가, 외출하고 돌아온 자신의 남편을 맞이한다.


얼굴은 사색이 되어있고

오전과 다르게 수염이 덕지덕지 자라있다.

입고 있는 옷도 다르고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며, 눈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여보. 내가… 내가 나간 지 얼마나 되었지?”


“오전에 나갔다 수 시간만에 돌아와 놓고선 무슨소리야”


“단 하루도 안되었단 말인가… 어서… 어서 짐을 싸야해.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은 어디있어?”


남자는 들고 있던 수많은 금은보화를 바닥에 내팽겨 친다.

아내를 한 번 꼭 껴안고 나서 가재도구와 식료품을 챙겨든다.

보따리에 두서없이 집어넣는다.


“왜 그래, 이 금덩이들은 다 뭐고, 어디서 났어?”


“건들지마! 여기 그대로 내비둬. 그냥… 아이들 어디 있어? 빨리…가야해”


“가긴 어딜가. 우리 집은 여기잖아. 무슨 일 있어?”


“올거야… 그 여자가… 빨리… 헤라님을 모시는 신전으로… 빨리!”


남자가 계속해서 뒤를 돌아본다.

눈을 가누질 못한다.

말에 논리가 없고 앞뒤가 없다.


자신의 과오와 잘못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인지

아니면 형용할 수 없는 존재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인지…



—--



“내 아들, 내 딸, 얼마만인지 모르겠구나. 보고싶었단다!”


꼴랑 한 나절만에 나타나선, 놀러나간 아이들을 꼭 안아들고 눈물을 글썽인다.


“아빠 수염 따가워”

“아빠 왜 그래. 간지러워”


아이들의 양 볼에 자신의 얼굴을 비빈다.


그대로 아이들을 번쩍 안아든다.

봇짐도 어깨에 들쳐맨다.


어부인 사내는 힘이 좋고 건장하긴 했지만, 

오전나절보다 사내의 어깨와 팔 근육이 더욱 다부져보인다.


남자는 다시 바닷가 방향을 살핀다.

재빠르게 헤라의 신전으로 향한다.


아내는 뭔 일인지 조차 가늠 할 수 없다.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까지 먹고 살 수 있는 금은보화를 집구석에 버려두었다.

수 시간만에 나타난 남편은 더욱 건장해진 체격을 뽐내는데, 정신머리가 없이 부산을 떤다.


수 많은 신전들 중, 굳이 헤라의 신전을 집어 

예배를 드려야된다며 한시 바삐 움직인다.


신전에 도착하자 여신의 사제가 길을 막는다.


“길일은 자들이여, 이곳은 가정의 평화를 수호하는 헤라 여신님의…”


“사제님, 부디 저희 가족을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헤라님께 고하고자 합니다.”


그제서야 남자가 안도한 듯 헤라의 사제 앞에서 쓰러진다. 아이들을 부여잡고 흐느껴 운다.


사제는 사내의 가족을 신전 중앙 제단으로 이끈다.

사내는 아이들을 아내에게 맡기고, 제단에서 헤라의 여신상에 고한다.


“자비롭고 공명정대하신 헤라이시여

 수 년동안 갖은 핍박과 회유를 버텨내고 드디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나이다.


 저는 아르고 호의 위대한 이아손도 아니고,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르페우스도 아닙니다.

 그저 한낱 어부에 불과합니다.


 수 년 전, 처자식을 먹여살리고자 쪽배를 이끌고 먼 바다로 향한게 죄라면

 이제 그 벌을 모두 치른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사내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떠들어댄다.

투망질을 하러 간다며 나간게 오전나절인데

왜 수 년의 시간을 들먹이는 것일까?


왜 가장 위대한 여신님 앞에서 

남편은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여보, 왜 그래. 천벌을 받을라. 여기가 어딘지 몰라서 그래?!”


영문을 모르는 아내가 남편을 뜯어말린다.

그리고… 여신상이 움직인다.


“계속하라.”


“아아... 자비로우신 헤라이시여”

헤라의 음성이 신전 내부에 울려퍼진다.


“계속하라, 너의 진실을 고하라. 거짓을 말하면 용서치 않으리라”


헤라의 석상이, 들고 있던 왕홀을 내리친다.

사내가 뜨문뜨문,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날…고기를 잡기 위해 평소보다 먼 바다로 향했습니다.

 그물을 건져올릴 수록 수 많은 물고기가 딸려나오기에

 욕심을 부렸습니다.


 제 욕심이 과한 것인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산 것인지

 제 자그마한 쪽배는, 물고기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재물에 눈이 팔려, 제가 가라앉는지도 모르고 그물질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외딴 섬의 백사장에 누워있었습니다.

 제 배도 보이지 않고, 제가 잡은 수많은 물고기도 사라져 없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은 바다 한 가운데 표류하는 저를 구해주었다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을 만나러 돌아왔냐 물었습니다.


 저에게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저는 먹고 자고 쉬는것에 정신이 팔려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기력을 회복하고 나니, 침대에서 그 여자가 저를 붙잡았습니다.

 넘어뜨리는 힘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이윽고, 사내의 아내가, 남편을 쏘아본다.


 “아냐… 아니라고, 난 당신에게 한사코 부끄러운 일 따위 하지 않았어.

 신 앞에서 맹세할게!”


사내는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변명을 한다.


 “계속해서 고하라.”

헤라의 여신상은, 왕홀의 끝을 남자의 목에 겨눈다.

적어도, 지금까지 남자의 목이 붙어있는 이유는

그가 여신상 앞에서 진실만을 고했기 때문이리라.


 “그 여자는 저를 이아손이라 부르기도 하고, 아킬레우스라 부르기도 하고

 오디세우스라 부르기도 하고, 테세우스라 부르기도 합니다.


 온갖 영웅들의 이름을 대며 드디어 자신을 찾아온 것이냐 말을 합니다.

드디어 자신에게 되돌아 온 것이냐 묻습니다.


저는 그런 영웅이 아니라, 한낱 어부일 뿐이라 해도 알아듣질 않습니다.


이 섬에서 자신과 영생을 누리자며 저를 꼬드겼습니다.

과거와 내륙 따위는 잊어버리고, 자신과 사랑을 나누자 말해왔습니다.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라며 신들의 음식을 인간인 저에게 건네왔습니다.


저는 그녀가 여신인지, 님프, 세이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아프로디테 여신보다 아름다울 순 없지만

아프로디테 여신만큼이나 아리따웠습니다.


하지만, 맹세코, 저는 그 여자가 말하던 영웅들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 작은 항구의 어부일 뿐이옵고

제가 사랑하는건 제 뒤에 있는 아내 단 한명 입니다.

제가 보고싶던건 언제나 제 아이들입니다.


제가 그 여자 앞에서 할 수 있던건

바짝 엎드려 집으로 보내달라 비는 것 뿐이었습니다.”


아내는 제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해하는 사내를 바라본다.

헤라의 여신상 앞에서 다른 여자를 아름답다 말하는 사내가 밉기도 하지만

자신 단 하나를 사랑한다 고하는 사내가 자랑스럽기도 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분명, 저 사내의 아내는 자신 단 하나뿐이다.

남편은 배신도,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너는 아직 나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다.”


헤라의 여신상은 목에 겨누어진 왕홀을 거두어, 바닥을 내려친다.

남자는 아직까지 거짓을 고하지 않았으며, 

가정의 평화를 해치는 짓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하지 않은 것 또한 존재한다.


“저는 그 여자가 손수 만들어준 음식을 먹고 연명했습니다.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는 아니지만,

 그것을 먹을수록 몸은 튼튼해지고, 젊어지는 듯 했습니다.


 그 여자가 매일 밤 동침을 요구해왔지만

 저는 아내와 아이가 있는지라 한사코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하루 하루 버텨낸 것이 수 년입니다.

 매일 밤마다 저를 유혹하는 반라의 여자 앞에서 흐느껴 울듯이 애원했습니다.

 제발 가족에게 보내달라고

 제발 집으로 데려다달라고

 제발 나의 아이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결국, 참을성이 떨어진 그 여자가 저를 겁박했습니다.

 저를 죽이고, 자신도 죽겠다며 제 목에 칼을 들이밀었습니다.


 저는 살기 위해서 그 여자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 말하고

 그 여자와 평생을 같이 하겠다 약속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이혼하고

 제 자식들을 제 손으로 직접 내친 뒤에

 이혼의 대가로 섬 지천에 널린 금은보화를 건네주고 오겠노라 말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수 년의 시간은 단 한나절의 시간마저 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과 꿈으로 치부하기엔, 제 손에 들린 금은보화가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저에게 죄가 있다면,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하고

 처자식이 있는데도, 살기 위해 다른 여자에게 사랑을 맹세한 것 입니다.


 여신이시여, 부디 미천한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알수 없는 그 마귀로부터 저와 제 가족을 지켜주시옵소서”


남자는 여신상 앞에서 머리를 바닥에 찢는다.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하고, 용서를 구한다.


아내는 아직, 사내의 이야기를 믿지 못하지만

남편이 가져온 수많은 금은보화가 드디어 설명이 된다.


도대체, 남편이 만난 그것은 무엇이기에 이러는 것인가?


헤라의 여신상이 다시한번 왕홀을 바닥에 튕긴다.


“가정의 수호신인 나 헤라가 말한다.

이 가련한 사내는 내 앞에서 한 치의 거짓말도 하지 않았으며

아내와 자식들을 욕보이는 짓거리 또한 하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


나는 이 가족을 내 힘으로 직접 지켜낼 것이며 어느 누구도…”



“멈추세요. 어느 누구도 그 사내의 약속을 깰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치 아프로디테의 아름다움이 현현한듯 

빼어난 미모의 님프가 감히 여신의 말을 가로막는다.


“네까짓게 감히. 무엄하도다!”


여신상에 현현한 헤라가 왕홀을 바닥에 내려친다.

신전의 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지진이 일어난다.


대지가 흔들리고, 마치 가이아의 진노가 울려퍼지는 듯 하다.

사내도, 아내도, 아이들도, 사제도

그리고 여신의 발언을 가로막는 어리석은 님프도 여신상 앞에 쓰러져 무릎을 꿇는다.


“하하. 아무리 여신님이라도, 저 남자가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순 없습니다.

 

저 남자는 저에게 사랑을 약속했습니다.

저 남자는 저에게 평생을 같이하자 약속했습니다.

저 남자는 제가 해준 음식을 먹고, 제가 만든 음료를 마시고

저와 함께 같은 침대에서 잠에 들었습니다.
제가 준비한 황금을 들고 이 항구로 돌아왔습니다.


어느 누구도, 설령, 위대하신 제우스라 하여도 저와 남자의 약속을 깰 수는 없습니다!”


“간악한 것, 이 사내는 널 사랑하지 않는다.

 네가 지금까지 만나고, 보내준 남자들 처럼”


여신은, 님프의 가장 아픈 부분을 들추어낸다.

수 많은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들이 님프가 기거하는 섬을 방문했다.

그리고, 모든 남자들이 님프에게 사랑을 약속했다.


영웅들은 님프의 아리따운 몸을 취했다.

님프가 가진 수많은 권능을 몸에 둘렀다.

님프가 가진 온갖 금은보화를 배에 싣고

님프가 해준 음식과 음료를 즐겼다.

침대를 뒹굴며, 님프의 귓가에 사랑을 속삭였다.


그리고 사라졌다.

자신들이 타고 온 배에 음식과 술과 음료와 금과 은과 비단을 싣고서 떠나갔다.

다시는 님프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는 아르고 호는 없어지고, 이아손은 메데이아의 질투에 인생을 망처버렸다.

테세우스는 절벽에서 떨어져 죽어버렸다.

페르세우스는 홀로 남아 아내 안드로메다를 그리워한다.

오디세우스는 꿈에그리던 가족의 품에 돌아갔지만,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혼외자 아들의 손에 죽었다

수많은 영웅들이, 트로이 전쟁에서 죽이고 죽고 죽임을 당했다.


영웅들의 이야기는 이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만 할 뿐이다.


한없이 긴 세월을 살아가는 님프만이, 자신에게 사랑을 약속했던 남자들을 기다린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한 사내가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사내에게 지금까지 건네주지 못한 사랑을 모두 쏟아부었다.

죽음까지 각오한 그 순간에, 이 사내는 드디어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었다.


이 남자에게 처자식이 있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 자신과 함께 살아갈 수 만년의 시간에 비하면

남자의 첫 혼인생활은 찰나에 불과하니까.


중요한 것은, 남자는 자신에게 약속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신들의 이름을 걸고, 자신에게 돌아오겠노라 약속했다.

그 약속을, 이름이 걸린 신들이 모르지 않으리라.


님프는 헤라의 여신상을 바라보는건지, 그 앞의 사내를 바라보는건지…

간악한 미소를 짓는다.


“상관 없어요. 결국, 저 남자는 날 사랑하게 될테니까”


“무엄하다. 가정의 수호신인 나 헤라의 신전에서 감히 불륜을 저지르려 하다니!”


“하? 가정의 수호신? 불륜? 지나가던 똥개가 웃습니다. 여신이시여.

 저를 욕하고 남자를 지키기 전에

 본인의 처지나 돌아보시지요.”


님프가 받은 말을 여신에게 되로 돌려준다.

가정과 율법의 수호신인 헤라이지만

정작 그의 남편인 제우스는 희대의 난봉꾼이자, 여자들의 적이다.


수많은 여자와 하룻밤을 지세우고, 겁탈하고, 임신을 시켰다.

걔중엔 남편이 있는 유부녀도 있고

친족인 다른 여신도 있고

요정인 님프도 있고 

사람이 아닌 동물도 있다.


모두 차후에 있을 전쟁에 쓰일 전사를 만들기 위함이라며

헤라를 설득시켰다.


심지어, 어디선가 데려온

알지도 못하는 남자아이에게

헤라의 젖을 물리고, 

‘헤라의 영광’, 헤라클레스라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참으로 치욕스럽기 그지 없다.


수많은 여신들이, 요정들이, 님프가

아니. 여자라면 모두가 뒤에서 헤라를 비웃는다.


“네 명을 네가 재촉하는구나.”


여신상의 대리석이 사람의 살처럼 변해간다.

겉껍질이 깨져나가고, 여신상 내에서 직접 헤라가 강림한다.


님프는 현세에 강림한 헤라를 앞에두고 움츠려들지 않는다.

호기를 잡은 듯 소리친다.


“신들이랍시고, 불륜 한 번 안저지른 신들이 어디 있습니까?

평생을 함께하자던 페르세포네를 납치한 명계의 왕 하데스도

나와 같은 님프와 바람을 피웠습니다.


그 멘테를 풀떼기로 만들어버린  페르세포네도

아도니스를 두고 아프로디테 여신과 싸움을 벌였습니다.


 아프로디테 여신의 수많은 음담패설들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 남편 헤파이스토스도 아글라이아 여신을 처첩으로 거느립니다.

 

 전쟁의 신이라던 아레스는 전쟁을 하는지 계집질을 하는지 모를 지경입니다.

 아폴론은 어떻습니까? 그가 거느린 아리따운 시종들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수많은 자식들은 어떻습니까?


 도시마다 한 명씩, 자신의 아버지가 제우스라 주장하는 이들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그 모두를 내가 직접 벌했다.

 수많은 신의 배다른 자손들은 내가 내린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강간을 저지른 남자들은 내 손에 죽어갔으며

 다른 남자의 씨앗으로 잉태한 여인들은 사산과 난산을 면치 못했다.

 설령 신이라 할지라도 불륜을 저지른 이들은 내 신벌을 피하지 못하였다.

 

 그,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내 앞에서 떳떳하게 고개를 들 수 있는자는

 그래, 아테나 정도 뿐이겠지

 

 네 간사한 혓바닥을 놀린 죗값을 치를 준비가 되었느냐?”


신위라고는 쥐꼬리만큼이나 있는 님프의 앞에

헤라가 직접 당도한다.

왕홀을 님프의 목에 가져다대며, 신벌을 준비한다.


 “아 있지요, 순결과 처녀의 여신 아테나. 


분명, 제우스의 ‘첫 번째’ 정실 부인에게서 나온

올림포스 최고의 걸작이 아닙니까?


안그렇습니까? 제우스의 ‘세 번째’부인이시여”


마지막으로, 간사한 님프가 헤라의 역린을 건드린다.

순결의 여신인 아르테미스조차 출생이 순결하지 못하다.

하지만 아테나 만큼은 다르다.


제우스와 첫 번째 정실 부인인 메티스 사이에서 나온 적장자

어쩌면, 헤라 자신보다 서열이 높을지도 모르는 올림포스의 걸작.

지혜의 여신이자, 수많은 영웅들의 수호신.

올림포스 최고의 여신에게서 이름을 딴 도시는 

앞으로 만년을 넘게 그 이름을 이어갈 것이다.


언제나 헤라를 어머니라 부르며 모시지만

헤라는, 아테나를 낳은 적이 없다.


진정 자신이 배아파 낳은 아레스는, 

이 님프의 말마따나 계집질을 하느라 정신이 팔려

전쟁의 영광은 언제나 아테나의 손에 빼앗긴다.

아레스의 자손이 세운 로마 제국은

아테네보다 수 천년 먼저 멸망해 산산조각이 나버릴 것이다. 


헤라가 왕홀을 들어 님프를 내려친다.


하지만 헤라의 왕홀은 허공을 가른다.

헤라가 주변을 둘러보자 올림포스의 광활한 대지가 펼쳐진다.


올림포스의 만신전

헤라를 제외한 11명의 신들과 다른 수많은 신들이

 사내와, 그 아내와 자식들과, 님프와, 왕홀을 든 헤라를 바라본다.


“누구도 나의 신벌을 방해할 수 없다! 어떤 놈이냐?!”


헤라가 자신을 둘러싼 신들에게 소리친다.

모두가 한 번 이상 헤라에게 혼 쭐이 난 경험이 있다.

외도로 생겨난 자식들이 헤라의 손에 죽어갔으며

강간과 불륜을 저지르고 헤라의 신벌을 직접 겪은 이들도 많았다.


어느 누구도 헤라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다.


“부인, 이제 그만하면 되었소”


제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헤라에게 다가간다.


“닥치세요. 이게 다 당신이 뿌린 씨앗이지 않습니까?”


이 님프를 홀리고 사랑을 약속한 영웅들은

모두 자신의 아버지가 제우스라 주장했다.


그래. 주장만 했다.

가정의 여신을 아내로 둔 올림포스 최고위 신 제우스는

실제론 바람 한 번 피워본 적이 없다.


기간토마키아의 예언을 듣고서, 제우스는 차라리 파멸을 결심했다.

사랑을 저버리면서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지 않았다.

어쩌면, 헤라와 자신의 아이이자

전쟁의 신인 아레스가 기간토마키아를 막아주지 않을까 기대를 걸었다.


그리고, 예언은 어떠한 경우에도 실현된다.

크로노스와의 자손은 비단 제우스만 있지 않다.

헤라 자신도 크로노스의 자손이고

포세이돈, 하데스, 데메테르, 헤스티아, 아프로디테 등등

제우스와 혈연으로 묶인 수 많은 신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알게 모르게 불륜을 저지르고 혼외자를 낳는다.

신위와 신격을 지키기 위해서 신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버린다.

헤라 자신이 낳은 아레스라고 다를 바 없다. 

수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동생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다.


버려진 아이들은 장성해서 영웅이 되고.

자신의 아버지가 신이라 주장한다. 

실제로도 신이지만, 이왕 허풍을 떠는거 최고위 신인 제우스의 이름을 판다.


힘 좀 께나 쓰고, 지역 에서 이름 끗발좀 날리고

전쟁에서 명성을 떨치는 이들이 제우스의 이름을 부르짖는다.


제우스는, 다른 신들의 명예를 위해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어쩌면 조카일지도, 사촌일지도, 손자와 손녀일지도 모르는 아이들이 불쌍해서

자신이 거두어들이고 헤라에게 데려온다.


‘내 아이야, 부탁해’


라면서…


그렇게 헤라가 직접 젖을 물리고 키워낸 영웅들이 한가득이다.

그중에선 헤라의 이름마저도 얻어간 지상 최강의 영웅도 존재한다.

그렇게 기간토마키아는, 예언대로 ‘제우스의 인간 아들’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어머니, 이 사내는 아레스 제 이름을 걸고 약속했습니다. 

 제 명예가 걸린 일입니다.”


아레스가 나서서 헤라를 만류한다.


“닥쳐라, 네 잘못은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아레스가 헤라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린다.

동생의 아내인 아프로디테와 사이에서 생긴 아이들이

지금도 지상을 거닌다.


“어머니, 부디 노여워 하지 마시옵고…”


헤파이스토스가 나서서 헤라를 만류해보지만


“덜떨어진 자식이 어딜 감히 나서느냐. 다른 다리 마저 절고싶은게냐?!”


헤라가 멀쩡한 다리를 향해 휘두르는 왕홀을 간신히 피해 도망간다.


치정과 불륜싸움엔 순결의 여신인 아르테미스는 관심이 없다.

다른 모두의 과거가 헤라의 앞에서 책잡힐 일들이 많다.


선뜻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이름도 오르내린던 올림포스 최고의 걸작이 헤라의 앞에 마주선다.


“어머니. 이 사내는 어찌되었든 저의 이름을 걸고 약속했습니다.

 지금은 이 사내를 아내와 함께 살도록 두시고

 만약 사내의 아내가 먼저 죽는다면

 님프와 사내를 혼인시키는게 어떻겠습니까?”


지혜의 여신인 아테나가 모두가 만족해 할 만한 해결책을 내놓는다.

사내의 가정의 평화도 지켜내고

사내의 약속도 지킬 수 있도록

약간의 시간을 사이에 둘 수 있도록 한다.


인간의 수명은 끽 해야 100년이 넘지 못한다.

님프에게 있어선 찰나의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님프의 음식을 먹고서 건장해신 남성은 필시 무병장수 할 것이다.



“아니야…”


올림포스의 걸작 앞에서 헤라가 왕홀을 떨어뜨린다.


“어머니. 부디 저를 봐서라도 노여움을 푸세요.”


아테나가, 측은한 눈빛으로 헤라를 바라본다.


“아니야…아니라고…”


아테나가 한발짝 다가서자, 헤라가 한발짝 뒤로 물러선다.


“이것이 최선입니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의 명예도 더럽히지 않고

 어머니의 위신도 치켜세울 수 있는 방법입니다.”


“아니야…제발…아니란 말야”


맞다.

지혜의 여신이 말한 해결책은 올림포스 만신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다.

이 상황에 관심없는 아르테미스만이 딴청을 피울 뿐이다.


“어머니. 고집 피우지 마시옵고…”


올림포스의 걸작이, 최고위 여신을 설득시켜나간다.

아테나는 헤라의 권위를 고집이라 말하며 헤라의 권좌를 넘본다.


그리고, 간악한 님프의 말재간에 놀아난 헤라가

자신의 권위와 신위 그 모든걸 내버리고 소리친다.


“아니야! 너는 내 딸이 아니란 말이다! 날 어머니라 부르지 마아아아아아아!!!”


메티스

제우스의 의심병이 도져 

제우스에게 먹혀버린 첫 번째 아내. 


아직도 제우스의 뱃속에 살아남아서

자신의 딸이 장성하는걸 지켜보는 헤라의 사촌언니.


제우스는 알게 모르게 헤라의 아이들보다

아테나를 가장 예뻐하고 치켜세운다.

출신, 실적, 명예, 능력 그 모든것이 헤파이스토스를, 아레스를 앞서나간다.


모든걸 덮어두고 친딸 삼아 키우고자 했지만

결국 그럴 수 없었다.


제우스의 뱃속에 살아남아 웃고 있을 메티스를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제우스의 배를 갈라, 메티스를 끄집어 내 죽여버리고 싶다.


“아니라고! 너는, 내 딸이 아냐! 

 넌….아니야!!!!”


헤라가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는다.

태어낫을 무렵엔 친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먹혀버려 없었다.

자신을 보듬어주고, 키워준 진짜 어머니는 

눈 앞에 절규하는 헤라라고 생각했다.


그런 진짜 엄마가, 자신을 거부한다. 

최고위 신 제우스의 딸이자

최고위 여신 헤라의 딸로서

언제나 올림포스의 걸작으로 있을 수 있던 아테나의 자긍심이 바스라진다.


“어…엄마…”


“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오오…제발….부탁이니까”


헤라가 오히려 아테나에게 부탁을 한다.

하소연과 절규를 하며 아테나를 적극적으로 밀어낸다.


마지못해 제우스가 다시 헤라의 앞에 선다.


“부인. 말이 너무 심하지 않소”


“당신도 똑같아. 언제까지고 나에게 아이들을 떠밀기만 하고

 여기 있는 지 애비가 제우스 인줄 아는 천치들…”


지금까지 관심이 없던 아르테미스가, 헤라의 폭탄발언에 귀를 기울인다.

뭐야… 그럼 누가 누구의 아버지고…


“그만…그만!

 그런게 지금 중요한게 아니지 않소.


 자, 자. 당신 말대로 합시다.

 언제나 내가 가장 사랑하는건, 헤라 당신이니까.

 당신 뜻대로 합시다.”


“정말…정말이야?”


“그럼, 당연하지 않소

 나는 올림포스 최고위 신도 아니고

 천둥과 번개와 하늘의 신도 아니고

 헤라의 남편, 제우스요”


헤라의 앞에 똑같이 주저 앉아서

모든 권위와 신위를 똑같이 내버리고

헤라를 마주본다.


가정의 여신인 아내를 위해 모든걸 내려놓는 기품을 보고

오히려 신들은 제우스의 진짜 명예를 알아본다.


“진짜지?”


“내가 말하지 않소. 

 여기 처리도 당신 일이니까 당신이 마저 끝내고

 빨리 돌아갑시다. 


 자자. 아테나도 아레스가 좀 챙기고.”


 자긍심이 모두 무너져 내린 아테나를

 오히려 헤라의 발언에 적장자의 권위가 한껏 올라간 아레스를 시켜 챙기도록 한다.


 어쨋든, 아레스의 후손이 세운 로마는 

 천년을 넘게 융성하는 제국이 된다.

 그리스의 아테네는, 그리스의 이름을 찾은지 채 백년도 되지 않아 기세가 크게 기운다.


헤라의 눈물을 제우스가 닦아주고

헤라의 떨어진 왕홀을 제우스가 직접 움켜쥐어준다.

헤라를 부축해 일으켜 주어

가정의 신으로 치켜세운다.


드디어…헤라의 판결이 시작된다.


“크흠. 크흥. 지금 내 꼴이 영 말이 아닌지라.

 특별히 필멸자의 바람대로 일을 마무리 지으리라.


 가정의 수호신으로서, 사내에게 묻는다.

 바라는 것이 있는가?”


신들의 가족력과 치정싸움을 모두 지켜본 필멸자는

어안이 벙벙하다.


“가정의 평화와…행복을 바랍니다.”


사내는 계속해서 바래왔던 소원을 여신에게 빈다.


“그것은 이미 이루어졌도다.

그러하니, 이 사내의 소원은 내가 들어줄 수가 없구나. 

대신, 사내의 아내에게 묻는다.

 

바라는 바가 있는가?”


“있습니다.”


사내의 옆에서, 남편을 꼭 부여잡은 아내가 말한다.


“말해보아라”


“죽음을”


사내의 아내는, 지혜의 여신이 참으로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한다.

죽고나서 재혼을 해?

모두가 행복한 방법?

정의와 지혜의 신에게서 나온 방법이 고작 저런 것인가?

참으로 순결을 지키는 처녀신 다운 발상이다.

결혼도, 사랑도 해본 적 없는 천치들이나 할 생각을

해결책이랍시고 내놓는다.


사내의 아내는, 그런 해결책따위 바라지 않는다.

모두가 행복하다 하더라도, 자신이 행복할 수 없다.


“누구의?”


“저희 가정을 위협하고, 저의 하나뿐인 남편을 탐하려는.

 저 간악한 요정의 죽음을 바랍니다.”


사내의 아내는, 질투의 화신이라 말할 수 있는 헤라보다도 차가운 눈빛으로

이 올림포스 만신전의 신들을 모두 움츠려 들게 할 매서운 눈빛으로.

도저히 필멸자가 내비칠 거라 생각지 못한 표정으로.

인간을 빚어낸 프로메테우스조차 질겁할 표정으로


저 멀리 벌벌 떨고있는 님프를 바라본다.


“네 소원을 이루어주겠노라”

 

 헤라가 왕홀을 들고 터벅터벅, 님프에게 다가간다.


“아니..안돼…살려주세요…”

“죽고싶지 않아.”

“난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야”

“신들이시여, 도와주소서”

“왜. 어째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건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난 사랑하고 싶었을 뿐이야”

“다들 왜 나를 버리는건데”

“안돼..제발.. 살려주세요”

“헤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저에게 자비를…”

“다들 저 남자의 맹세를 들었잖아. 당신들 이름을 걸고 말했잖아!!”

“왜…왜…왜..나만 불행해져야 하는건데?”



어쩌면, 만신전의 여신들과도 필적할 미모를 가진 님프가

아프로디테의 현현이라 해도 믿을 법한 님프가

가장 못생긴 신인 헤파이스토스보다 추악한 몰골로 빌빌거린다.


그리고, 헤라의 왕홀이

님프의 머리로 내려찍힌다.


이번엔, 어느 누구도 헤라를 방해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