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朝鮮), 일본에서 그 말은 바다를 건너 있는 제국의 식민지를 뜻하는 단어였어. 


지금으로부터 약 28년 전인 메이지 43년에 조선은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연호가 메이지(明治)에서 다이쇼(大正)로, 다시 또 쇼와(昭和)로 바뀐 지금에 와서도 조선은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인 채로 남아 있었지.


소녀는 지금까지 내지에서 내지인으로 태어나 내지에서 살아 간 18년 동안 딱히 조선에 대해 별다른 감정을 가진 적은 없었어. 그저 모두가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서양의 열강들의 식민지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국가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생각 말고는 없었지. 


내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더러 조선인에 대해서 미개하고 천박하다며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존재했지만, 소녀는 딱히 조선과 조선인들을 나쁘다거나, 좋다던가 같은 별다른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어. 얀붕이를 만나기 전까지 소녀는 누구도 사랑하지 못한 채 마음이 얼어붙어 있었기에 자신 말고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단어를, 지금까지 내지인이라 생각해 왔던 얀붕이의 인적 사항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는 소녀도 알지 못했지.


『最近、家に遅く帰って来るね。』

“요즘 집에 늦게 들어오네.”


그 서류 - 지금 소녀가 들고 있는 가방 안에 들어 있는 것 - 을 보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 조금 전 니혼바시의 카페에서 만난 것과, 지금 같이 거리를 걸어가는 것을 제외하고 가장 마지막으로 만난 뒤 집에 돌아왔을 때였을까. 부모님은 집에 없었고 거실에는 장녀인 마토이 아이코 - 소녀 - 와 차녀인 마토이 아야코 두 사람만이 의자에 앉아 있었어.


『礼子が気にする事じゃないでしょう?』

“네가 신경쓸 일은 아니잖아?”


소녀는 그 때까지만 해도 여동생인 아야코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독서를 하고 있었지. 작년쯤에 출판되어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소설인 ‘Gone With the Wind’ 를 영어 원문으로 읽고 있었어. 영문학과를 전공하는 소녀에게 언어의 장벽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고, 그 때까지만 해도 소녀는 이 책을 번역한 제목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風と共に去りぬ)’ 가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태평하게 독서를 하고 있었어.


『柳って言ってたね?一体、そんな人が何が凄いからって会いに行くんだよ?』

“야나기라고 했었지? 대체, 그런 사람이 뭐가 대단하다고 만나러 가는 거야?”


아야코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 전까지는. 아야코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녀는 책을 덮고 아야코를 쳐다보았어. 탁 하고 읽던 책이 접히는 소리와, 주방의 수도꼭지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 비가 내리는 창 밖의 소리만이 작게 나고 있는 방에서는 매우 고요한 적막이 돌고 있었지.


『柳さんの事を無闇に言うな。』

“야나기 씨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마.”


아무리 하나뿐인 가족이라도, 이미 죽은 부모의 유산을 상속받는 장녀인 자신이 밉다고 해도, 소녀는 누군가가 얀붕이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어. 도쿄 제국 고등학교의 학생이라는 말 한 마디로, 얀붕이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충분히 입증할 수 있었으니까. 단호한 목소리를 들은 아야코는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여전히 말을 잇고 있었어.


『そうーそう。私も知ってる。東京帝国高校の義学部の生徒。普通の実力では其処に入れないでしょう。』

“그래-그래. 나도 알아. 도쿄 제국 고등학교 의학부의 학생. 평범한 실력으로 거기에 들어갈 수는 없겠지.”


긴 머리를 땋아 내리고 흰 유카타를 입은 16세의 마토이 아야코는 소녀를 바라보았어. 흑갈색 눈동자에는 소녀를 향한, 보통의 가족들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는 감정이 담겨 있는 듯했지.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시선으로 몇 초 동안 소녀를 바라보던 아야코는 이내 시선을 돌려 비가 내리는 창 밖을 바라보았어. 비는 점점 더 거세게 내리고 있어 오늘 밤 내내 내릴 것 같았지.


『なのにーお姉さんは、』

“그런데—언니는,”


이내 다시금 아야코는 창가에서 시선을 돌리고 천천히 탁자로 향해 걸어갔어. 무언가를 주우려고 하는 듯한 몸짓에 소녀는 아야코가 무엇을 할 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지. 탁자 위에 놓여진 서류 봉투 - 소녀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 를 주우며, 천천히 그것을 소녀에게 보라는 듯 한쪽 손으로 잡은 채 약간 흔들고서는 말을 이었어.


『あの人について知っている事が、全部嘘だと思った事はない?』

“그 사람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들이, 전부 거짓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


『何を言ってるのか分からな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 대화가 끝난 직후, 창 밖에서는 천둥이 치며 벼락이 어딘가로 낙하해 일시적으로 집 안이 새까매졌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안에는 은은하면서도 불안해 보이는 전등의 빛으로 밝아져 있었고,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의 적막 끝에 대화는 다시금 이어졌어.


『遺産を相続されないからといって、お金が全くない訳ではない。』

“유산을 상속받을 수 없다고 해서, 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야.”


유산. 그 말을 몇 번이나 들었을까. 언젠가 부모가 병으로 오랫동안 시름시름 앓다 죽었던 2년 전의 일이 떠올랐지. 장녀인 소녀는 부모와 그 선조들이 쌓아 온 막대한 유산들을 상속받을 권리가 있었고,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지금은 대리인 겸 보호자로서 숙모가 집에서 두 사람을 보고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소녀는 그 돈들을 전부 상속받을 예정이었어. 하지만 둘째 딸이라고 해서 돈을 받을 수 없는 것도 아닌데 아야코가 왜 저러는지 소녀는 이해할 수 없었지.


『お金は沢山の事を成し遂げられるようにしてくれ。服も、家も、御飯もー』

“돈은 많은 것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지. 옷도, 집도, 밥도—”


언제부터 저렇게 되어 버린 걸까. 소녀는 조용히 생각하며 말 없이 아야코가 하는 말을 듣고 보고 있었어. 대체 아야코는 무엇 때문에 나를 미워하는 것일까. 이유 없이 화를 낸 적도 없고, 무언가를 빼앗은 적도 없고, 강제로 무언가를 시킨 적도 없는데 어째서 자신을 미워하는 것인지 소녀는 알 수 없었어- 아니, 알지 못했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했을지도 모르지.


『人の事までも、全部得られるよ。』

“사람에 대한 것까지도, 전부 얻을 수 있어.”


그 말을 듣자마자 소녀는 지금 아야코가 무엇을 했는지, 지금까지 무엇 때문에 자신을 미워했던 것인지 전부 알 수 있었고, 머릿속에서는 빠르게 톱니바퀴가 짜 맞추어지며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모든 답들을 전부 풀어내고 있었지. 먼 미래에 자동으로 계산을 해 주는 기계가 나와 자신의 머리에 들어간다면 이런 기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소녀는 모든 답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겨 가고 있었어. 


어째서 자신을 미워했을까. 그 답은 너무나도 간단했어. 돈, 다시 말해 부모의 유산 때문이었지. 어렸을 적부터 무언가를 갖고 싶어 하며 어떤 방법을 써서도 그것을 얻어 내던 아야코의 모습이 소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지금까지 자신을 대했던 태도와 취했던 행동들을 전부 이해할 수 있었어. 아야코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인 돈을 원했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자신이 받기를 바랐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자신을 미워하고 있는 것이었지. 


「礼子、どうしてお姉の人形を盗んだの?」

‘아야코, 왜 언니의 인형을 훔친 거니?’


「私も欲しかったです。其れじゃダメですか?」

‘저도 가지고 싶었어요. 그러면 안 되나요?’


소녀는 계속해서 자신의 답에 확신을 더하기 위해 옛날의 기억을 더듬었어. 어렸을 때, 자신의 붉은 원피스를 입은 봉제 인형이 방에서 사라졌다는 걸 알았지만 소녀는 신경쓰지 않았던 적이 있었지. 무엇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길 수 없던 소녀에게 인형이 사라지는 것은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고, 아야코가 그것을 가지고 싶어 훔쳤다는 사실 또한 소녀에게는 큰 일이 아니었었지.


하지만 지금은 달랐어. 얀붕이를 만나고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소중히 할 수 있게 되어 삶의 의미를 되찾은 소녀에게 그 일은 더 이상 사소한 일이 아니었어. 그 뒤에도 계속해서 아야코는 자신의 것들을 조금씩 훔쳐 갔다는 사실들을 다시금 기억해낸 소녀에게 아야코는 자신의 것을 빼앗은, 그리고 빼앗을- 사라져야 할 사람이 되어 있었지.


그리고 지금 아야코는 자신이 사랑하는 얀붕이를 잃게 하기 위해, 소녀가 이걸 보고 얀붕이와 관계를 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정보를 얻기 위해 돈을 써 자신의 앞에 보여주려 하고 있었어. 하지만 전혀 두려움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어. 소녀의 사랑은 결코 부서지지 않을 것이고, 얀붕이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더욱 더 강하고 단단해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そう、こっちに頂戴。一体柳さんのどんな事が入ってるからー私に見せてあげようにしてるの?』

“그래, 이리 줘 보렴. 대체 야나기 씨의 어떤 것이 담겨 있길래 나에게 보여주려 하는 거니?”


소녀는 더 이상 아야코와 대화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아야코가 든 서류 봉투를 가져갔지. 이내 그 생각이 정답이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야코의 목소리가 들려왔어.


『ちょっと、其れをどうやってーあ!』

“잠깐, 그걸 어떻게—아!”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며 말하는 아야코는 서류가 얀붕이에 대한 것이라는 소녀의 확신을 더욱 굳혀 주었어. 서류 봉투를 빼앗긴 아야코의 단말마를 뒤로 하며, 소녀는 서류 봉투를 열어 그 안에 든 종이 한 장을 꺼냈고, 그 종이에는 얀붕이의 호적 - 조선 - 이 적혀 있었어.


그 순간 소녀는, 이제 두 번 다시 없을 테지만 아주 짧은 순간의 공상을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했어.


이제 자신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든 것들을 전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예상한 직후에 소녀는 입을 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