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본인은 경남 한구석에 찌그러진 듣보잡 섬동네 거제도에 사는 앰생임.


이 거제도란 동네가 매장도 없고, 유딱 유저는 흔적조차 안 보이며 딱지 인프라는 딱 석기시대 흙탕물 대중탕 수준인, 가히 딱지계의 크래시 타운인 곳인데


그래도 본인 어릴때 딱지 치던 기억이 살짝 나서 썰 풀려고 앉아봄.



어릴때 필자가 살던 동네는 어른들 대부분이 맞벌이를 하시던 곳이었음.


덕분에 오후만 되면 아파트 놀이터나 단지 내 문방구엔 학교 끝난 애들이 그레이스 통과한 스파이랄 빌드마냥 우글거렸는데,


그중 가장 인기있는 장소는 접근성 좋고 성능좋은 만족 초등학교식 놀거리가 많은 문방구 앞이었음.



본인이 쁘띠라노돈이었던 11년부터 꽤 오랫동안 500원짜리 -메- 종이딱지가 유행했었는데


내가 종이 딱지를 포기하면서 종이딱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푸키먼 고무딱지만이 홀로 남았었음.



그렇다면 공석은 누가 채웠을까? 바로 유딱이었음.


근데 아까도 말했듯이 그 계기를 아무도 모른다는 게 영원한 미스터리임.


단지 5학년 2반의 누군가가 문방구 앞 밴치에서 동네의 운명을 건 세기의 명듀얼을 펼쳤고, 그 듀얼에 감화된 추종자들이 유딱을 퍼뜨렸다는 이야기만이 전해질 뿐임.



여하튼 그 날 이후로 동네 곳곳에서 애들이 유딱을 치기 시작했음.


운명의 듀얼이 있었다던 그 날을 기점으로 우리 동네는 반으로 갈라졌는데,


원딱지-네모딱지-오각딱지로 계보가 내려져오는 전통의 종이 딱지파와


듀얼이라 불리우는 전투의식과 유성, 유마란 이름의 형제신을 숭상하는 유딱파였음.


이 중에서 나는 사각형에서 팔각형으로의 최종 진화를 마친 종이 딱지파의 떨거지 1이었는데


어느 순간 종이 딱지파의 대부분이 유딱으로 넘어가버리는 탓에 끝에 가선 종이 딱지파의 마지막 수장같은 입장이 되어버림;



내가 유딱으로 넘어가게 된 계기는 크래시 거제타운 4학년 중 오직 나만이 딱지 따먹기를 즐긴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였음.


그때 내 친구였던 딱잘알이 하나 있었는데, 그 녀석의 권유로 유딱에 발을 들이게 되면서 종이 딱지파는 자취를 감추게 됨.



하지만 그때의 난 몰랐음.


14년의 가을, 파란의 9기가 시작된 이 마법의 가을이 어떤 파도를 몰고 올지...




좀 길어져서 분리함

피곤해서 한숨 자고 아침에 마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