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내 vndb에 기록된 클리어 게임 목록. 이 글은 인생 게임 대회에 감명을 받아 썼지만, 인생게임 대회 참가를 위한 글은 아니다.


그저께 수능을 치르게 되었다. 동시에 인생에 대하여 돌아보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는 시간도 가지게 되었는데, 오늘은 일본 서브컬쳐(주로 미연시)와 나의 삶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져서 이런 똥글을 싸지르기로 결심했다. 뒤로가기를 누르고 가는것을 추천한다.


내 생각에 내가 오타쿠가 된 순간은 2-3살, 어린이집에서 파워레인저를 본 그 순간부터 나는 그런 창작물에 열광하는 오타쿠가 되어있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유년기 초반은 파워레인저랑 가면라이더 등의 특촬물이 지배했다고 볼 수 있다. 이때까지만 보면 나는 그냥 파워레인저 가면라이더를 또래보다 좀 더 좋아하던 아이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후에는 뭐 일본 만화나 애니로도 흥미가 가서 그쪽에 관심을 가지다가 일본 서브컬쳐 오타쿠가 되었다, 가 나름 자연스러운 전개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4-5살이 되면서 나는 서양의 문물 레고 그리고 서양의 거대한 문화로서 자리잡은 시리즈 스타워즈를 접하면서 일본이란 나라는 급격한 속도로 내 관심사에서 사라졌다. 그와 겹쳐 부모님이 영어유치원을 보내는 등 영어가 사실상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어 나는 완전히 서양 문화 덕후가 되었다. 이걸 언급하는 이유는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창작물에 열광하는 기질이 여기서 가장 역할이 컸다고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런 영어권 문화에 열광하면서 문화를 미친듯이 소비한게 나의 영어 실력을(좀 자랑하자면) 무지막지하게 키웠고, 이를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면 아마 위의 마브러브 시리즈 등을 영어로 아무런 어려움 없이 플레이했다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일본 서브컬쳐에는 어떻게 입문했냐? 문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다. 서양 문화에서 일본 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 서양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일본 문화를 지켜보다가 결국 그 호기심에 애니 몇 편을 보고 나는 중학생 때 완전히 일본 애니메이션에 심취해있었다. 심취했다곤 해도 당시 유행하던 라이트노벨이나 러브코미디 애니메이션은 일절 보지 않았고 90년대 00년대의 명작이라고 칭송받는 오리지널 애니(에바, 공각기동대 등) 위주로 봤지만.


이 상황에서도 미연시라는 영역에 도달하기까지도 좀 시간이 걸렸다. 슈타게나 페이트같은 미연시 원작 애니들은 보면서 정작 원작에 대한 호기심을 조금도 가지지 않았다. 중3때 jrpg, 애니메이션 같은 게임들을 하고 정말 나 자신을 일본 서브컬쳐 오타쿠라는 것을 대놓고 인정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서야, 고1때 수많은 나무위키 문서를 보면서 비주얼노벨에 흥미를 가지고, vndb가 탄생한 비화에서 언급된 ever17 그리고 칭송받는 자 두 게임으로 입문하게 되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여태까지 보던 작품들은 대부분 상업성이나 분량, 제작비용, 매체 특성 등의 한계로 무언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비주얼노벨은 달랐다. 분량은 몇십시간짜리 rpg이면서 게임적 요소는 다수 배제하고 스토리로서 승부를 보면서 종이책과는 달리 사진,음악,그리고 성우 연기를 통해 몰입감도 한층 높인 나에게는 그야말로 이보다 더 취향에 맞는 스타일의 미디어는 없었다. 현실의 제약, 그리고 처음에는 좀 아쉬운 완성도를 보인 미연시들을 플레이하면서 진행이 늘어지는 등 많은 작품을 하지는 못했다.


지루한 이야기에 더욱 지루한 이야기를 덧붙이는 꼴이 되겠지만 내 현실의 이야기도 조금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는 사실 정신적으로 어딘가 어긋나있던것 같았다. 먼 옛날부터 매우 비관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는데, 이걸 별로 의식하지 않고 방치하다가 고1의 1년동안 나는 그 어긋남 때문에 내면적으로 아주 불편한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고1이 끝나서야 나는 나를 억압하던 환경을 바꾸고 의료적 지원을 통해 고2때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고2 초에 플레이한 것이 스바히비이고, 스바히비를 시작으로 좀 본격적으로 미연시, 비주얼노벨을 소비하기 시작했다(그래도 여기 있는 고수들에 비해선 적긴 했다). 고3 중반까지 무라마사, 마브러브 등의 명작들을 그냥 즐겼다. 둘 다 상당히 무거운 주제를 다루었지만 나는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좋아했다.


문제는 고3 중반 이후, 의료적 지원을 줄이고(약을 줄이고) 반동으로 살짝 예민하고 '어긋난' 사고를 가졌던 내가 되었을 때다. 나는 한글패치를 통해 접할 수 있게 된, 자주 '최고의 미연시'로 화자되던 화이트앨범2를 시작하면서, 또 다시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카타르시스나 작품의 완성도나 감동의 충격이 아닌, 그냥 분노의 충격이었다. 나는 스토리에 완전히 이입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분명 명작이고, IC를 플레이한 경험으로는 개인적으로도 높이 평가하는데, 이상하게, 화만 났다. 단순히 입체적이면서 선과 악의 구별이 안가는 인물들의 훌륭한 설계를 떠나서 나는 그냥 의미없는 분노를 창작물에 쏟아붓고 있었다. 게임을 멈추고도 그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에 즐기던 게임들을 회상해보니, 화앨2처럼 이상한 요소에 분노를 느끼기 시작하고, 끝내 나는 미연시에서 거의 항상 다루어지는 주제, '사랑' 그 자체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약을 줄여서 어긋난 사고가 돌아오려는구나'하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아직 고민하고 있지만, 지금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현재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처음부터 어긋나지 않았다. 나는 단순히 관점이 달랐고 그에 따른 결론이 다른것 뿐이다. 즉 모든 사람들이 그렇든, 생각이 다르다. 나는, 그냥 그 미연시 제작자들과 생각이 달라서 공감할 수 없을수도, 있을 수도 있는 것 뿐이다. 이 단순한 결론에 다다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었던 건, 역시 미연시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상업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작가의 취향과 개성과 생각을 최대한 담을 수 있는 비주얼노벨. 이 비주얼노벨들을 통해서, 나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창작물을 즐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겉치레와 제약으로 감춰진 다른 메이저 장르보다 이 미연시를 통해 나는 정말로 작가의 생각에 대하여 고민할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미연시는 나의 오타쿠 삶의 정상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


사실 써놓고보니 나도 뭔 개소린지 몰라서 요약도 못하겠다. 여기까지 읽어준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들어줘서 정말 고맙고 시간을 낭비하게 해서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