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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에서 언급된 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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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에서의 언급
1.1. 일본서기1.2. 삼국지1.3. 노상추일기1.4. 난중일기1.5. 김영순 일기
2. 대동지지

고서에서 언급된 김해지역[부산 강서 일대(편의상 가덕도포함) 포함]을 정리한 문서. 부산 강서구지역을 언급하는 부분은 *표. 김해지역에 대한 문헌은 김해지역/자료/도서, 문서 등 참고. 김해보다 넓은 범위의 행정구역에 대한 문헌에서의 언급은 그 문헌의 문서의 지역별 설명에 서술하고, 이 문서에서는 지리지와 같은 종류의 문헌이 아닌 문헌에서 언급된 김해지역만 서술한다.

1. 문헌에서의 언급 [편집]

1.1. 일본서기 [편집]

一書曰 素戔嗚尊曰 韓鄕之嶋 是有金銀[1]
六十五年秋七月 任那國遣蘇那曷叱知 令朝貢也 任那者去筑紫國 二千餘里 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2]
2년 이 해에 任那人 蘇那曷叱知가 자기 나라에 돌아가고자 청하였다. 先皇의 시대에 조공하러 왔다가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蘇那曷叱知에게 많은 상을 주고 붉은 비단 1백 필을 가지고 가 임나왕에게 주게 하였다. 그러나 신라인이 길을 막고 그것을 빼앗았다. 그 두 나라의 원한은 이 때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1.2. 삼국지 [편집]

  • 삼국지 위서 30 오환선비동이전
韓(弁辰)
<弁辰>亦十二國,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險側, 次有樊濊, 次有殺奚, 次有邑借. 有<已 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弁辰古資彌凍國>·<弁辰古淳是國>·< 奚國>·<弁辰半路國>·<弁[辰]樂奴國>·<軍彌國(弁軍彌國)>·<弁辰彌烏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弁辰狗邪國>·<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馬延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弁>·<辰韓>合二十四國, 大國四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萬戶.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魏略》曰: 明其爲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 土地肥美, 宜種五穀及稻, 曉蠶桑, 作 布, 乘駕牛馬. 嫁娶禮俗, 男女有別. 以大鳥羽送死, 其意欲使死者飛揚.{《魏略》曰:其國作屋, 橫累木爲之, 有似牢獄也.}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俗喜歌舞飮酒. 有瑟, 其形似筑, 彈之亦有音曲. 兒生, 便以石厭其頭, 欲其 . 今<辰韓>人皆 頭. 男女近倭, 亦文身. 便步戰, 兵仗與<馬韓>同. 其俗, 行者相逢, 皆住讓路.
<弁辰>與<辰韓>雜居, 亦有城郭. 衣服居處與<辰韓>同. 言語法俗相似, 祠祭鬼神有異, 施 皆在戶西. 其<瀆盧國>與<倭>接界. 十二國亦有王, 其人形皆大. 衣服 淸, 長髮. 亦作廣幅細布. 法俗特嚴峻.

1.3. 노상추일기 [편집]

노상추일기 문서 참고

1.4. 난중일기 [편집]

출처 다빈치지식지도 난중일기 해석
곧장 천성․가덕에 이르니, 왜적이 하나도 없다. 두세번 수색 하고나서, 군사를 돌려 당포로 돌아와 밤을 지냈다. 새벽도 되기 전에 배를 출항하여 미조항 앞바다에 이르러 우수사(이억기)와 이야기하였다. - 1592년 6월 초9일
떼를 지어 출몰하는 적을 맞이하여 낱낱이 무찌르고자 서로 공문을 돌려서 약속하며 배를 정비하고, 경상도의 적세 를 탐문하였는데, "가덕․거제 등지에 왜선이 혹 열 여 척, 혹은 서른 여 척이 떼를 지어 출몰한다"고 할 뿐 아니라, 본도 금산(나 주시 금성동) 지경에도 적세가 크게 뻗치었는 바, 수륙으로 나누어 침범한 적들이 곳곳에서 불길 같이 일어나건만, 한번도 적을 맞아 싸운 적이 없어서 깊이 침범하게 되었으므로 처음에 본도 우수사와 모이기로 약속한 오늘 저녁 때에 약속한 그 장소에 도착하였다. - 7월 초4일
새벽에 출항하여 "본도 우수사는 안골포 밖의 가덕 변두리에 진치고 있다가, 우리가 만일 접전하면 복병을 남겨두고 급히 달려 오라"고 약속하고, 나는 함대를 이끌고 "학익진"을 형성하여 먼저 진격하고, 경상 우수사는 내 뒤를 따르게 하여 안골포에 이르러 선창을 바라보니, 왜대선 스무한 척․중선 열다섯 척․소선 여섯 척(모두 마흔두 척)이 머물고 있었다. - 7월 초4일
새벽에 다시 돌아와 포위해 보았으나, 왜적들이 허둥지둥 당황하여 닻줄을 끊고 밤을 틈타 도망갔으므로 전일 싸움 하던 곳을 탐색해 보니, 전사한 왜적들을 열두 곳에 모아 놓고 불태웠는데, 거의 타다남은 뼈다귀와 손발들이 흩어져 있고, 그 포구 안팎에는 흘린 피가 땅바닥에 그득하여 곳곳이 붉은 빛인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도적들의 사상자를 이루 헤아릴 수 가 없었다. 낮 열 시쯤 양산강과 김해포구 및 감동포구를 모두 수색하였으 나, 왜적의 그림자는 전혀 없다. 그래서 가덕 바깥에서부터 동래 몰운대에 이르기까지 배를 늘여 세워 진을 치게 하고, 군대의 위세를 엄하게 보이게 한 다음 "적의 많고 적음을 탐망해서 보고하라"고 가덕도 응봉과 김해의 금단곶 연대 등지로 탐망군을 정하여 보내었는데, 밤 여덟 시 쯤에 그 탐망군인 경상우수영 수군 허수광(許水光)이 와서 보고했다. "연대에서 탐망할려고 올라갈 때, 산봉우리 아래 작은 암자에 한 늙은 중이 있기에 같이 연대로 올라가서 양산과 김해의 두 강의 으슥한 곳과 그 두 고을 쪽을 바라보니, 적선이 나뉘어 정박해 있는 수는 거의 백 여 척쯤 되는데, 그 늙은 중에게 적선의 동정 을 물었더니, 대답하는 말이 "날마다 쉰 여 척이 떼를 지어 드나 들며, 11일 본토에서 그 강으로 들어왔다가 어제 안골포 접전 때, 포 쏘는 소리를 듣고는 간 밤에 거의 다 도망가고 다만 배 여 척 이 남아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왜놈들은 너무 두려워서 도망친 꼴을 짐작할 수 있겠다. 저물녘 에 천성보로 나아가서 잠깐 머물면서 적에게 우리들이 오랫동안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게 하고, 밤을 이용하여 군사를 돌렸다. - 7월 초11일
새벽에 출항하여 가덕에 이르니, 웅천의 적들은 기가 죽어 대항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우리 배가 바로 김해강 아래쪽 독사이 목(禿沙伊項:부산시 강서구 명지동)으로 향하는데, 우부장이 변고를 알리므로, 여러 배들이 돛을 달고 급히 달려가 작은 섬을 에워싸고 보니, 경상수사 원균(元均)의 군관의 배와 가덕첨사의 사후선(척후선) 등 두 척이 섬에서 들락날락 하는데, 그 짓거리가 황당했다. 두 배를 잡아 매어 경상수사 원균에게 보냈던 바, 수사 (원균)가 크게 성을 냈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 본의는 군관을 보내어 어부들의 목을 찾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초저녁에 아들 염(苒)이 왔다. 사화랑에서 잤다. - 1593년 2월 28일
일찍이 식사를 한 뒤에 체찰사와 부사․종사관은 함께 내가 탄 배를 타고, 오전 여덟 시쯤에 출항하여, 같이 서서 여러 섬들과 여러 진을 합병할 곳과, 또 접전할 곳 등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면서 종일 의논했다. 곡포(남해군 이동면 화계리)는 평산포 (남면 평산리)에 합하고, 상주포(상주면 상주리)는 미조항(미조면 미조리)에 합하고, 적량(창선면 진동리 적량)은 삼천포(사천시 삼 천포)에 합하고, 소비포(고성군 하이면 덕명포)는 사량(통영시 사 량면 금평리)에 합하고, 가배량(거제시 도산면 노전동)은 당포(통 영시 산양면 삼덕리)에 합하고, 지세포(일운면 지세포리)는 조라 포(일운면 구조라리)에 합하고, 제포(진해시 웅천 1동 제덕동)는 웅천에 합하고, 율포(거제시 장목면 대금리)는 옥포(거제시 장승 포시 옥포동)에 합하고, 안골포(진해시 안골동)는 가덕진(부산시 강서구 천가동)에 합치기로 결정했다. 저녁에 진중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고 공사례를 한 다음 헤어졌다. - 1595 8월 25일
식사를 한 뒤에 곡포권관의 공식 신고를 받았다. 저녁나절에 경 상우후가 와서 투항해온 왜놈 여덟 명이 가덕도에서 왔다고 전했 다. -11월 25일
아침에 우우후와 방답을 불러 약밥을 같이 먹었다. 일찍 투항한 왜놈 다섯 명이 들어왔다. 그래서 그 온 까닭을 물으니, 저희네 장수가 성질이 모질고 일을 또 많이 시키므로 도망하여 와서 투항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이 가진 크고 작은 칼을 거두어 수루 위에 감추어 뒀다. 그러나 실은 부산에 있던 왜놈이 아니고 가덕도의 심안돈(沈安屯:島津義弘)의 부하라는 것이다.-1594 1월 8일

1.5. 김영순 일기 [편집]

삭제요청: https://arca.live/b/dojigwanri
출처/참고: #국사편찬위원회
2014년도 국사편찬위원회 <김해 김용식 소장 근현대 일기류 및 사진 자료> 조사 수집 최종보고서 동서문물연구소
  • 1934년 7월 26일 대홍수로 김해 전체가 물애 잠김
  • 1945년 1월 대저면 공사장 출역
  • 1961년 국가적으로는 5.16 군사 쿠데타가 있었고, 참가한 행정구역 변경 심의 위원회에서는 김해군 을 둘로 나누는 것이 논의되었다고 한다.
  • 1977년 3월 16일 대지중앙교회 목사와 신문리 개척교회에 대해 논의
  • 1978년 부마고속도로 기공식이 가락면에서 개최되었는데 장유중학생 학생 900명이 소풍 행군을 겸해서 참가하였다.

2. 대동지지 [편집]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s://kyudb.snu.ac.kr/book/text.do?book_cd=GR33590_00&vol_no=0004 大東地志
沒雲臺西南六十里一麓斗入海中西望加德等諸島 - 대동지지 4책, 동래의 산부분

몰운대서남쪽 60리에 있다. 산 하나가 바다 가운데 있고, 서쪽으로 가덕 등의 섬을 바라보고 있다.-번역(뇌피셜)
多大浦西去十里許有古里島又去十五里許有沒雲臺前洋中有隱嶼名釜嶼西南爲加德前洋
左部東終十右部西終十五上東初二十終四十下東初十終四十活川南初五終十五台也南初三十終五十七山西初七終十五栗赤西初二十終三十酒村西初十終三十進禮西初二十五終三十柳等也西南初十五終三十芿村西初三十終五十下界西初四十終五十太山本太山部曲西北初四十終六十中北西北初三十終四十下北北初十五終三十朱林北初十五終四十府內終五○水多部曲[출처2『大東地志』]-대동지지 5책, 김해의 방면 부분

좌부동쪽 끝 10(리)우부서쪾 끝 15상동처음20끝40하동처음10끝40활천남쪽 처음5끝15태야남쪽 처음 30 끝 50칠산서쪽 처음 7 끝 15율적-3서쪽 처음 20 끝 30주촌서쪽 처음 10 끝 30진례서쪽 처음 25 끝 30유등야서남쪽 처음 15 끝 30늦촌처음 30 끝 50하계서쪽 처음 40 끝 50태산본 태산부곡 서북쪽, 처음 40 끝 60중북서북쪽 처음 30 끝 40하북북쪽 처음 15 끝 30생림북쪽 처음 15 끝 40부내처음 5-번역(뇌피셜)
[1] 韓鄕를 가야로 볼 경우[2] 여기서 임나를 가야로 볼 경우[출처2『大東地志』] 0005권, 古4790-37-v.1-15, 062a-062a면,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http://kyudb.snu.ac.kr/book/text.do?book_cd=GR33590_00&vol_no=0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