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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강서구 관내 여러 지역들이나 지역민들끼리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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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지역 간 관계
2.1. 명지동과 신호동
3. 사람 간 관계
3.1. 명지동과 신호동3.2. 동선마을과 눌차마을3.3. 눌차리어업조합원

1. 개요 [편집]

부산 강서구 관내에 있는 다양한 지역 간의 관계나 지역민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문서. 편향된 내용으로 지역감정을 일으키지 않게 유의하자.

2. 지역 간 관계 [편집]

2.1. 명지동과 신호동 [편집]

신호동은 명지면 신호리였기 때문에 옛부터 명지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명지는 명지도라는 섬이였고 신호동은 명지도 아래쪽의 신도 혹은 신호도라는 작은 섬이였다. 신호진이란 포구도 명지면 신전리에 있었다.(지명총람) 하지만 매립을 통해 섬이였던 신호지역은 송정동, 화전동 등과 육로로 연결되었으며 명지면이 부산으로 편입될 때에도 신호리를 제외하고 편입된 후 녹산면에 들어가게 된다. 결국 부산 강서구에 편입될 때 강서구 녹산동(신호동)으로 편입된다.

녹산공단이 생기고 서낙동강 하구를 건너는 교통 수요가 높아지고, 그에 따라 신호대교가 생겨 명지동과 신호동을 연결하게 된다.

3. 사람 간 관계 [편집]

3.1. 명지동과 신호동 [편집]

신호갯벌과 신호동의 상권을 찾아 명지사람들이 신호동을 찾기도 한다. 반대로 신호사람들은 명지 상권을 찾거나 명지에서 환승하여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 3번이나 171번을 많이 이용한다.

3.2. 동선마을과 눌차마을 [편집]

눌차도는 동선방조제에 의해 옛부터 동선, 생교동, 동선새바지마을 등과 연결되어 있었다. 동선, 생교동, 동선새바지를 통틀어 동선마을이라 하자. 동선마을과 눌차도 사이 어장에서는 대구와 같은 수산물이 났으며 그 어장은 조선시대 당시 국유에 가까웠으나 1900년대 초반 조선어업령과 같은 법령에 따라 어업권이 사유에 가까워지게 되었고 1906년 8월 의친왕은 일본인 가시이 겐타로에게 가덕도 바다의 20년간 어채권을 주어서 가덕도 어민들은 어업권을 잃게 되었다. 당시 눌차도에서는 굴 양식으로 잘나갔는데 이때 일본인과 눌차도 어민들이 눌차리어업조합을 만들어 눌차 근처 바다뿐만 아니라 동선마을 앞 해초양식 어업권과 가덕도의 대구어장까지 가시이에게 입찰받아 쓰게 된다. 광복이후 눌차는 대구어장은 돌려주지만 어업인과 어선이 적었던 동선마을 쪽 바다의 해초양식 면허권을 차지한다. 1962년 나온 수협법에 의해 가덕기도원 남쪽 지선어장의 소유권을 동선마을은 가지게 된다.

협의되기 전 눌차마을과 동선마을 사람들의 갈등이 깊어지며 눌차마을 어장에 동선동 해녀가 배타고 들어오면 눌차사람이 장대로 내쫓고, 유혈사태도 있었다 한다. 두 마을 간 지역감정은 협상 이후 없어지고 현재 고령화로 어업인이 없어지는데 부산신항 건설로 어장도 없어져감에 따라 아예 없다.[출처1]
[출처1] 가덕도 어촌의 근현대 공유재의 변천사 -가덕도 마을어장의 식민지 자원수탈과 부산신항 영향의 사례연구- 문혜진

3.3. 눌차리어업조합원 [편집]

일제강점기 눌차리어업조합이 만들어지고 눌차도 주변 어장에 대해 일부 고위 간부가 사유화하여 분쟁이 있었는데 조합원들이 진정하여 없어졌다. 공유재 인식이 없던 옛날에 공유재가 되어가며 자익을 위해 사점화를 하려던 일이다. [출처1]
[출처1] 가덕도 어촌의 근현대 공유재의 변천사 -가덕도 마을어장의 식민지 자원수탈과 부산신항 영향의 사례연구- 문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