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링크 삭제 이동 러시아 (r126 편집) [오류!]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login이상의 권한이 필요합니다.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 기울임 취소선 링크 파일 각주 틀 ====# [[노브고로드 공국|노브고로드 루스]] - [[키예프 루스]] #==== 9세기 초중반 루스족의 일파는 러시아 내륙, [[벨리키 노브고로드]] 일대까지 진출하여 정착했는데, 이 루스인들은 현지인(슬라브인, 추드인, 크리비치인, 메레인, [[벱스인]])들에게 무리하게 공물을 받으려 했고, 현지인들은 이에 반발하여 저항하여 루스인들을 북쪽으로 내쫓았다. 하지만 현지 부족들은 서로 간에 싸움을 멈추지 않았고, 그들(루스인, 바랴기)을 찾아가 자기들 대신 통치하여 질서를 잡아주기를 청하였다.[* 원초연대기에서 발췌.] 이에 류리크가 이끄는 루스인들은 노브고로드 지역에 정착촌을 만들어 862년 노브고로드 루스([[노브고로드 공국]])를 건국했다. 류리크가 죽고 제2대 노브고로드의 올레그가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을 정복한 뒤 중심지를 그쪽으로 옮겨 [[키예프 루스]]로 이어졌고, 옛 수도 노브고로드도 계속 중요시되었다. 즉 이 노브고로드 루스가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공동 기원이 되는 나라다. 때문에 [[러시아 제국]]에서는 1862년에 건국 1,000주년 기념 행사를 하기도 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의 기원이 되는 국가를 건설한 류리크는 원초연대기에 [[루스인]](즉 노르드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러시아로 치면 단군 할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외국인이라는 건 러시아 입장에서 거부감을 일으키다보니 러시아 학계에서는 이는 오류라고 주장하며 류리크가 동슬라브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3국의 공통 시조가 되는 루스 카간국은 스웨덴에서 건너온 [[북유럽]]인(바이킹)[* '바랴기'라고 불렸다. 동로마 황제의 바이킹 출신 호위대인 바랑기안 친위대를 뜻한다.]들이 세운 나라이다. 다만 이 지역에는 [[슬라브족의 이동]] 당시에 이주한 현지 [[슬라브]]인 살고 있었고, 이들과 어느 정도 공존했을 가능성이 점쳐지고는 있지만 확실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즉 최초의 노브고로드 루스는 순수 루스인(바이킹)들로만 구성된 나라였을 수도 있고, 루스인들과 이들보다 먼저 현지에 정착해 있었던 슬라브인이 함께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체로 노르드인과 슬라브인들이 어떤 형태로든 공존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후 노브고로드 공국과 그 후신인 [[키예프 루스]]는 주변 슬라브인들을 복속하며 적극적인 팽창을 했기 때문에 슬라브인들이 피지배 계층을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분명한 것은 지배계층은 루스인들이었고, 노브고로드 공국과 그 후신인 키예프 루스(키예프 공국)은 노르드인들의 문화가 지배했던 나라였다. 스웨덴계 노르드인의 일파인 루스족이 현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건국 시조라는 이 노르드설은 현재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역사가들을 제외한 세계 역사학계에서 사실상 정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쪽에서는 동슬라브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에서 역사적으로 상당히 민감한 주제다.[* 2차 대전 당시 게르만의 또다른 일파인 독일이 이 노르드 루스설 및 동방식민운동과 같은 여타 역사적 사례를 들먹이며 쳐들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사와 민족주의가 결합된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노브고로드 루스를 세운 류리크는 부하 장군인 아스콜트, 디르를 남쪽으로 파견했고, 이들은 키예프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한편 노브고로드 공국에서는 류리크의 후계자로 올레크 베시가 등극했으며, 882년 올레크 베시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키예프를 지배하고 있던 아스콜트와 디르를 죽이고 일대 부족들을 점령해 나가면서 키예프를 수도로 하는 키예프 루스를 세웠다. 올레크 베시는 이후 키예프를 중심으로 주변의 여러 슬라브족들을 정복해 나가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이후 [[키이우|키예프]]를 중심으로 하여, [[노브고로드 공국]], [[폴로츠크 공국]], [[체르니고프]], [[야로슬라블]], [[로스토프]], [[갈리치아-볼히니아]] 등의 여러 공국들이 성장하였다. 이렇게 초기 러시아사의 중심지는 북쪽의 노브고로드와 서쪽의 키예프 일대였고 현대 러시아의 중심지인 [[모스크바]] 쪽은 소공국들이 존재하기는 했지만(황금의 고리) 아직 루스 공국들 사이에서도 변방이었다. 당시 [[키예프 공국]]은 '여러 루스 도시의 어머니'로 불리며 대부분의 루스를 영향권 하에 두었고 이곳의 지배자는 대공이라고 불렀다. 10세기, 쿠데타를 일으켜 친형 야로폴크 대공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하여 통치자가 된 블라디미르 대공은 종교를 수용하기로 결정,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로마 가톨릭]], [[동방 정교회]]) 등을 탐색한 결과 동로마 제국의 [[정교회]]를 선택하여 국교로 삼았고[* 블라디미르는 [[기독교]]로 결정하고 신하들을 [[동로마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으로 두 그룹씩 보냈다. [[신성 로마 제국]]으로 간 신하들은 [[가톨릭]] 미사를 보았지만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고 보고한 반면, [[동로마 제국]]으로 간 신하들은 [[정교회]]의 성찬예배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아 자신들이 신계에 있었던 건지, 지상에 있었던 건지라고 보고했다.]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형제들을 살해하고 권력을 찬탈한 블라디미르는 동방 정교회의 성인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블라디미르의 아들 야로슬라프 대공은 루스 최초의 고대법전인 <루스카야 프라우다>을 창립했고, 이후 야로슬라프의 종손 야로슬라프 모노마흐 대공까지 황금시대가 10세기를 전후해서 100년 정도 이어졌다. [[키이우|키예프]]는 대도시로 번영을 누렸으며, 농민은 농노 신분이 아닌 자유민 신분으로 민회에서 참정권까지 가졌다. 이러한 [[키예프 루스]]의 번영은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사이의 무역로 덕분에 가능했다. [[지중해]]의 무역이 [[아랍]] [[해적]]들에게 방해받은 탓에 흑해에서 [[드니프로 강|드네프르 강]]을 타고 키예프 지역을 통해 [[발트 해]]로 둘러가는 무역이 성행했던 것. 아울러 블라디미르의 손녀 가운데 한 명은 [[프랑스]] 왕, 또 한 명은 [[헝가리]] 왕, 셋째는 [[노르웨이]] 왕과 각각 결혼해 서유럽과 많은 연결선을 유지했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을 전후해서 [[사라센]] 해적들이 약해지고,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 등의 [[지중해]] 무역국가들이 성장해 직항로를 트게 되면서, 상인들의 발길이 뜸해지며, [[아시아]] 유목 민족인 플로프치족(혹은 [[쿠만족]])이 스뱌토슬라프와 블라디미르가 쳐놓은 방어선을 뚫고 들어와 1095년 키예프를 점령했다. 이로서 루스의 황금시대는 끝나고 키예프도 몰락한다. 이후의 공국들은 끊임없이 갈라지고 쪼개진 상태였으므로 나라다운 나라라고는 [[노브고로드 공국]], [[블라디미르-수즈달]], [[할리히-볼히니아]] 정도에 불과하였다. 변경 사항 요약 약관 동의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당신은 기여한 내용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으로 배포하고 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문서를 하면 문서의 편집 역사에 (3.137.218.230)가 기록되며 이에 . 저장